② 시대를 닮은 악녀, 변화일까 변주일까?
‘아침에 눈을 뜨면 지난 밤이 궁금해 오늘은 어떤 사건이 날 부를까?’, [미재사건파일] 시리즈는 명탐정 코난의 오프닝 곡 가사처럼 눈만 뜨면 새로운 사건이 눈앞에 닥치는 세상에서,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미디어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재현에 대해 다룹니다. 이번 [미재사건파일]에서는 익숙하고 재밌지만,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인 ‘악녀’에 대해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이번 시리즈가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사건의 실마리가 되길 바라며, 사건 파일 오픈합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악녀의 모습도 함께 달라졌다. 악녀 프레임을 조금 더 심층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악녀의 변천사를 짚어보며 그 과정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시대를 닮은 악녀의 모습은 과연 변화일까 변주일까?
1970년대에서 1980년대는 가부장제 속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이 시대의 대표작으로는 <여로>, <울 밑에 선 봉선화>, <아씨> 등이 있으며, 특히나 1972년에 방영된 <여로>는 가난 때문에 고단한 시집살이를 견디게 되는 여성 ‘분이’의 기구한 삶을 다룬 이야기로 7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처럼 이 시대는 가정 내에서 현모양처이며, 수난을 당하지만 참고 견디는 인고의 여성이자 아무리 부당한 일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천사표 며느리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에 대립하는 악녀로서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등장했는데, 이는 착한 며느리를 시집살이시키고 아들과 며느리 사이를 이간질하며 며느리를 괴롭히는 역할이었다.
이런 관계에는 당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적용되었던 종속적 권력관계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가부장제에 복종하는 여성을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내세움과 동시에 그를 괴롭히고 모함하는 여성을 악녀로 설정했다. 이 사이에서 남편이자 아들로 등장하는 남성은 가정 내에서 연장자인 시어머니보다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 둘의 관계를 그저 관망하는 방관자의 역할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작품 내에서 ‘며느리’, ‘아내’, ‘엄마’로서만 자신의 기능을 다 하고, 온갖 고난을 겪던 여성이 우연한 계기로 기울어졌던 가세를 일으키며 가족을 부양하게 되는 서사가 압도적이었다. 이런 모습은 앞서 살펴본 악녀에 대한 프레임과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볼 수 있다.
다음은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의 드라마다. 이 당시에는 ‘커리어우먼’이라는 단어가 유행어처럼 번지며 비로소 가정 밖에서 일하는 여성을 그리기 시작했다. 드라마에서 여성 캐릭터의 직업으로는 주로 당시에 여성의 직업으로 선호되었던 아나운서, 신발이나 쥬얼리 등의 패션 디자이너가 대부분이었고 종종 요식업과 관련된 직업도 있었다.
이 시대는 캔디와 신데렐라가 합쳐진 일명 ‘캔디렐라’ 여성 주인공이 대거 양산되었다. 이들의 특징은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으며, 대립하는 여성 캐릭터의 계략으로 인해 매번 곤경에 처하지만 늘 저 멀리서 테리우스 같은 왕자님이 나타나 이들을 구해준다. 이들과 대립하는 악녀는 능력과 재력을 모두 갖췄음에도 오로지 자신도 이 왕자님을 좋아하기 때문에, 혹은 가난하거나 평범하지만, 이 왕자님을 통해 신분 상승을 하기 위해 캔디렐라 주인공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괴롭히는 여성이다. 이 두 여성 캐릭터는 주로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며, 테리우스 왕자님과 회사에서의 성취라는 왕관을 두고 경쟁한다. 언뜻 보면 여성의 자아실현을 다루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문제는 ‘성취’라는 왕관마저 본인 스스로 쓰는 것이 아니라 왕자님의 손에 의해 씌워진다는 것이다. 반드시 백마를 타고 잃어버린 구두 한 짝을 들고 달려오는 왕자가 존재해야만 여성 주인공 캐릭터를 완성할 수 있다는 지점이 당시 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특히나 악녀와 선한 여성 캐릭터의 대비가 극명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90년대에 유행했던 소위 ‘벽돌립’의 도회적인 메이크업이 주를 이뤘고, 2000년대에 넘어오면서는 빨간색이나 분홍색의 색조가 가미된 메이크업과 세련된 원피스 디자인의 의상이 악녀의 특권처럼 작용했다. 1999년 방영된 드라마 <토마토> 속 두 여성 캐릭터가 대립하는 장면에서는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누가 악녀인지, 그리고 대충 어떤 상황인지까지 짐작이 가능하다. 사진 너머로 “네까짓 게 뭔데!”라는 대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이 시대에는 악녀 프레임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착한 여성은 늘 사랑받고 나쁜 여성은 버려지는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구조 속에서 여성 캐릭터를 선과 악으로 양분화하여 분류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나 이 당시에는 선한 여성 주인공을 시기하고 괴롭히는 것만이 서사의 전부인 악녀가 대거 등장했다. <미스터Q>의 ‘황주리’(송윤아), <토마토>의 ‘윤세라’(김지영), <명랑소녀 성공기>의 ‘윤나희’(한다감) 등이 대표적인 예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개인적 서사, 즉 '악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가진 악녀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 시발점으로 볼 수 있는 게 2000년 방영한 <이브의 모든 것> 속 배우 김소연이 연기한 '허영미'였다.
<이브의 모든 것>은 거의 5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하며 드라마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또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중에서도 '얼굴이 예쁜 여자'로 묘사되는 악녀 '허영미'와 '마음이 예쁜 여자'로 묘사되는 여성 주인공 '진선미'의 대립 구조가 주목받았다. 알코올 중독자이면서 가정폭력까지 행사하는 아버지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허영미가 지긋지긋한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공부하여 명문대 신문방송학과에 합격하고, 이 과정에서 주인공 진선미의 가족과 얽히게 된다는 전개는 당시 주인공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었던 작품들 사이에서 차별점을 가진다. 극 중 허영미는 진선미가 오랜 시간 동안 짝사랑했던 상대인 '김우진'(한재석)이라는 남성 캐릭터를 뺏어서 자기 남자로 만들고, 허영미와 진선미가 함께 방송국의 아나운서로 입사한 후로는 진선미를 좋아하는 방송국의 이사인 ‘윤형철’(장동건)을 유혹하며 '방송국 안주인' 자리를 노린다. 동시에 허영미는 대학 시절부터 아나운서 생활을 하면서까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진선미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화장품에 아세톤을 넣기도 하고, 원고를 찢어서 없애버리기도 하며 생방송 중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도록 몰래 데스크 밑에 핸드폰을 넣어두기도 한다. 이처럼 허영미는 '서사 있는 악녀'의 원조이면서 동시에 화려한 외형과 특정 여성 캐릭터와의 대립,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녀로서 모든 프레임 속 요소를 갖추고 있는 대표적 악녀 캐릭터로 각인되었다.
이 시대에는 '막장 드라마'가 하나의 장르적 특성을 이룰 만큼 발전했다. 자극적인 소재와 복잡한 인물 관계가 돋보였으며, <아내의 유혹>을 필두로 '김순옥 유니버스'가 열리고 김순옥 작가가 탄생시킨 악녀 캐릭터가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후 집필한 <왔다! 장보리>, <내 딸, 금사월>, <언니는 살아있다>, <황후의 품격> 그리고 가장 최근 작품인 <펜트하우스>까지 연이은 히트를 하며 '신애리'(김서형), '연민정'(이유리), '천서진'(김소연) 등의 악녀 캐릭터가 등장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악녀는 모두 김순옥 작가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악녀의 등장과 함께 악녀가 벌이는 악행의 수위도 이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당시 <이브의 모든 것> 속 허영미가 선배 아나운서의 자동차를 고장 내서 사고를 당하게 만든 장면을 보고 시청자가 어떻게 저런 짓을 할 수 있냐며 경악했던 시절이 무색하게, 지금의 악녀는 사람 죽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는 듯이 군다. 실제로 '허영미'와 '천서진'을 모두 연기한 배우 김소연은 인터뷰에서 '천서진이 완벽한 악인이라면 허영미는 귀여운 수준'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극적인 악행은 극을 이끄는 주요한 사건이 되고, 시청자를 끌어모을 수 있는 자극적 재미를 부여하면서 시청률 견인차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과거 악녀를 비판하는 데에 그쳤던 시청자가 오히려 선한 여성 주인공의 답답함을 대신 해소해주는 악녀를 응원하고 지지하기 시작하며 주인공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며 가지고 싶은 건 기를 써서라도 손에 넣어야 하는 이들의 독기는 큰 호응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이 시대는 악녀 프레임이 본격적으로 굳어진 시대이며, 우리가 떠올리는 악녀의 이미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김소연’이라는 같은 배우가 연기한 다른 시대의 악녀인 ‘허영미’와 ‘천서진’ 사이엔 주목할만한 변화가 있을까? 18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둔 두 악녀는 다른 모습을 지향하고 있을까 혹은 여전히 같은 프레임에 갇혀 있을까? 둘 사이의 차이가 과연 유의미한 변화일지 그저 변주일 뿐인지를 다음 시리즈에서 확인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