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보내며
*이 글은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가장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가던 드라마 <작은 아씨들>. 700억이라는 체감하기 어려운 액수로 시작한 이 이야기는 세 자매가 각자의 이데아를 향하는 모습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우애 좋은 자매에게 찾아온 절체절명의 위기로 시작된 이 드라마는 제목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달리 여성 느와르에 더욱 가까웠다. 세 명의 자매와 그들의 조력자는 가난이라는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정치적인 이야기로부터 뻗어나가 끝내 한국 사회를 꿰뚫는 거대한 악의 연대기를 끊어내는 여정을 이끌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작은 아씨들> 속 낯설게 다가오는 여성들이었다. 맹목적으로 무언가를 원하는 눈동자, 굳은 결심을 드러내는 얼굴,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위하고 걱정하는 모습. 감정과 욕망을 숨기지 않는 여자들의 모습은 뻔하지 않았다. 이 드라마엔 나쁜 여자도, 착한 여자도 없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이해관계를 향해 달려가는 여성들만 존재할뿐이다. 인주는 사랑을, 인경은 정의를, 인혜는 재능을 동력으로 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때론 그들의 사랑, 정의 그리고 재능이 그들을 비난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손을 잡고 맞서 싸운다. 때론 답답하고, 가끔은 막막하기도 한 세 자매를 응원하게 되는 이유는 결국 그들의 결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완벽하지 않은 여성 캐릭터'를 그려내고 싶다는 정서경 작가의 인터뷰처럼, 그들은 어딘가 한 구석이 텅 빈 사람들끼리의 연대를 통해 점점 선의에 가까워지고 그 선의를 기반으로 악에 대항한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되돌려주지 않는 인주의 성정 덕분에 죽을 뻔한 화영을 지켜낼 수 있었고, 원령가에서 효린을 구해낸 건 인혜가 효린에게 마음의 틈을 내어주었기에 가능했으며, 인경이 굴복하는 방법을 모르는 꼿꼿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더군다나 이들과 대립하는 원상아, 고수임, 장마리는 시대가 묘사해왔던 '악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이전 글에서 다뤘던 '악녀 프레임'은 이 드라마 내에선 쉽게 통용되지 않는다. 온실 속 화초처럼 보이지만 사실 독 품은 난초였던 원상아는 그 무엇보다도 사람의 목숨을 제 손으로 맺고 끊을 수 있는 커다란 권력을 원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남편과 딸을 잃었음에도 그의 전부, 즉 그가 만들어낸 연극의 무대에서 벗어나길 거부하며 마지막까지 악인으로서의 최후를 맞이한다. 그를 따르던 고수임과 장마리 또한 마찬가지다. 드라마에선 언급되지 않았으나 고수임과 장마리 또한 원상아와 비슷한 결말을 맞지 않았을까. '정란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묶인 그들은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악인으로서 최선을 다한다. 그 누구도 아닌 조직에 속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는 지금껏 가족을 위한 희생과 헌신이 악녀가 저지른 악행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던 이전의 서사와는 다르게 여성 악역의 내면과 정체성에 더욱 집중하여 새로운 인물이 탄생시켰다.
이처럼 낯선 표정과 눈빛을 가진 인물들은 혈연을 매개체로 '천륜'이 되어버린 가족 이데올로기의 새로운 이면을 보여준다. 세 자매의 어머니인 안희연은 여행 한 번 못 가봤다는 자기 연민에 빠져 두 딸이 막내를 위해 모은 수학여행비를 훔친 후 아버지인 오수복을 만나기 위해 필리핀으로 떠난다. 어쩌면 이 이야기의 시발점은 700억도, 원령가도 아닌 '부모가 편취한 250만 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은 끝까지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가족 단톡방에 망고 사진이나 원피스 사진만 전송할 뿐, 세 자매의 보호자로서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가족의 연은 천륜이라며 억지로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저 그들은 그들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남겨진 세 자매에겐 부모를 원망하거나 저주할 시간적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안희연이 유일하게 남기고 간 유산인 열무김치고 나발이고, 화영이 남긴 20억을 담기 위해 인주는 열무김치가 담겼던 통을 씻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세 자매는 고모할머니인 오혜석의 도움을 받지만, 오히려 이후 그의 죽음으로 더 큰 풍파를 맞는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인혜가 스스로 원령가로 걸어 들어간 것은 납득이 되는 선택이다. 세 자매 중 가장 어린 인혜에게 효린의 집은 미디어에서 비추는 이상적인 가족상으로 보였을 테니까. 평생을 불안정한, 마치 다리 하나 없는 의자에 앉은 것처럼 삐그덕대던 인혜의 시선에서 바라본 원령가는 아주 견고하게 잘 만든 원목의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혜와 효린은 손을 맞잡고 거대한 인형의 집에서 빠져나온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 같던 효린은 인혜를 만나 집 안의 피조물이 아닌 젊은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물론 이 도피 또한 효린 앞으로 증여된 자본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지만, 효린은 그 자본의 근원 대신 인혜를 믿고 영문 모를 세상으로 뛰어든다. 인혜 또한 마찬가지다. 비싼 원목으로 만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곪은 나무로 만든 의자에 앉아있던 인혜는 의자에서 박차고 일어나 스스로 길을 개척한다. 망가진 의자를 버리고 튼튼한 두 다리로 걷기 시작한 인혜와 효린은 결국 피로 이어진 혈연이 경험과 감정을 공유한 타인과의 관계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인혜의 마지막 내레이션처럼 세 자매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는 가족 공동체적 관점에서 벗어나 각자 다른 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늘 싸우잖아요.
합리적으로 행동해야 할까, 욕망이 이끄는 대로 가야 할까.
세 자매를 통해 한 사람의 마음속 서로 다른 자아들이 어떨 때는 싸우고 어떨 때는 뭉치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정서경 작가의 인터뷰처럼 <작은 아씨들>은 세 자매의 내면으로부터 뻗어 나와 다른 인물과의 관계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친숙함과 달리 여성들이 울고, 구르고, 싸우며 낯선 통쾌함을 선사한 이 이야기는 같은 제목을 가진 고전 명작처럼 각자가 몰입한 여성의 얼굴로 우리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