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아버지 부고에 대한 단상

시아버지가 안 계신 세계

by 플레인스콘

중국 육아에 대해 브런치에 글을 올리려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중국 시아버지 부고에 대한 생각의 글로 거의 6년 만에 글을 올린다.


2026년 2월 18일 오전, 그날은 느낌이 좀 찜찜해 엄마랑 길동 성당 재의 수요일 미사에 다녀왔다.

시아버님은 최근 기침이 멈추질 않아 병원에서 검사를 해봤는데, 결국 12월 말쯤 폐결핵 확정 후 한 달 동안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하게 됐다. 의사도 장기적 치료가 필요하지만 심각하지는 않다고 했고, 우리도 입원 치료 후 약을 먹고 집에서 회복하면 점차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한 달간 입원 후에 퇴원하는 날에도 남편에게 한 4번은 전화가 왔다고 하길래, “으휴, 쫄보 시아버지, 도시에 있는 병원이라 또 퇴원 수속 관련하여 엄청나게 걱정하셨구먼..” 속으로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그 뒤로도 청양에 있는 집에서 잘 요양하고 계신 줄 알았다.

그리고 춘절이 시작되기 딱 이틀 전, 집에 와보니 남편이 시부모님과 심각하게 전화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 일인가 했는데 시아버지 상태가 갑자기 심각해져 병원에 가봐야 하겠다는 소식이었다. 근데 저번에 한 달 동안 입원한 병원은 죽어도 싫고 고향 근처 병원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래서 남편도 알겠다고 하고 칭다오에 돌아가면 같이 옮기겠다고 했다.

그다음 날 오전 시어머니가 아무래도 상태가 심각해서 오늘이라도 고향 근처 병원으로 가야겠다고 해서 남편이 상해에서 디디로 급하게 택시를 불러서 옮겼고, 남편도 바로 고향 병원으로 갔다. 그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병세가 심해졌다고만 생각했지 며칠 뒤에 돌아가실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다.

남편이 도착한 후로 뭔가 상황은 계속 악화 되는듯해 보였다. 그래도 생명에는 위험이 없고 또 교류는 가능하다고 하니 그때까지만 해도 치료가 가능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그 뒤로 계속 상황이 안 좋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더 심각해진다면 중환자실로 옮겨야 할 수도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 이건 좀 심각한 상황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아버지와는 말이 통하지 않아 많은 교류가 없었지만 중국 농촌 노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절약이 몸에 배고, 또 정말 가난하고, 중국의 모든 변혁의 시대를 몸소 겪어낸, 그로 인해 삶을 즐길 줄도 모르고 즐기면 마음의 죄책감부터 몰려오는, 그저 자식들만 잘 되길 바라는 그런 마음으로 평생을 농부로서 부지런하게 살아오신 분이셨다.

매우 순박하고 학력도 초등학교 졸업이신 것도 있지만 아주 단순한 사고방식은 지니신 분이었다. 유안이를 가끔 봐주실 때도 온몸을 받쳐 정성껏 요령은 없지만 열심히 봐주셨고, 항상 밥을 먹을 때도 밥 한 톨이 아까워 꼭 물을 부어 깨끗하게 싹싹 드셨다. 저녁에도 전기값이 아까워 집에 불을 안 켜고 빨래도 전기값이 아까워 손으로 하셨고, 청양 집에 겨울에 오실 때도 야채 값이 비싸서 돈 아깝다며 농촌에서 바리바리 싸들고 오시는 분이었다. 나는 절약이 몸에 밴 노인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낭비가 몸에 밴 나로서는 어떻게 저렇게 절약을 할 수 있는지 아마 시대가 다른 나는 절대로 따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은 가능할 거 같지만…?

그럴 줄 알았음 칭다오 청양 아파트 계실 때는 좀 찾아갈걸 후회가 된다. 유안이 국제학교 준비한다고 방학 때마다 서울에서 영어 공부를 시키느라 시부모님을 찾아봬야 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열악한 환경인 농촌에 가볼 생각조차 안 했다. 농촌에 가서도 농촌 근처 호텔에서 하루를 잤으니 말 다했지, 내가 까탈스럽다기보다는 평생 서울에서 자란 나는 하루라도 지낼 수가 없는 구조였다. 자기 합리화 같긴 하지만..

사람은 결국 모두 재로 돌아간다고 신부님이 이마에 재가루를 뿌려줄 때까지는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줄 몰랐는데 미사에 갔다 와서 시아버지 부고에 대한 연락을 받았다. 우연의 일치치 고는 조금 신기하긴 했다. 시아버지는 한 달 동안 패결핵으로 고생하시긴 했지만 그래도 암이나 이런 병처럼 고통 속에 돌아가시는 않았고 정신이 또렷한 상태에서 돌아가셨으니 그나마 위안은 되었다. 또 나이도 올해 80세 이 시고, 젊었을 때 담배에 술에 온갖 안 좋은 거는 다 하셨다고 하니,, 또 상당히 다혈질인 전형적인 고집 센 가부장적인 면모를 지닌 옛날 마인드의 사람이었어서 시어머니와 가족들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래도 어찌 됐든, 2월 18일 오전 11시 시아버지의 부고 이후의 공기는 나한테는 다르게 다가왔다. 시아버지가 계신 세계와 안 계신 세계. 그것은 우리에게 확실히 다른 구분이고 다른 세계를 우리가 이제 건너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사람의 존재는 어떻게든 주변에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끼친다. 우리 부모님도 그렇고 하루하루가 기력이 안 좋아지고 연세가 드는 걸 생각하면 언제 또 누구와 작별 인사를 할지 마음이 허해진다.

그래도 집안의 가장 나이 많은 어른으로서의 존재감, 까탈스러운 시어머니를 투덜대면서도 많이 챙겨주신 우리한테는 정신적으로 의지가 되는 의젓한 집안의 어른이었다. 힘들어도 우리한테는 힘들단 말 한마디 하시지 않으셨다. 우리는 한국에 있어서 병원에도 못 가보고 도움이 하나도 되지 못했지만 나의 기억 속의 시아버지는 좋은 분이셨다. 평생을 농부로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오신 존경스러운 분이셨다. 가난한데 고집만 세고 유안이가 태어나고도 정말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약간 원망스러운 마음을 갖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나 자신도 부끄럽다. 도움을 분명 주고 싶었지만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이셨을 텐데, 그래도 좀 찾아뵙고 인사라도 드릴걸…

그렇게 2월 18일, 우리 가족에게는 시아버지가 안 계신 세계라는 또 다른 인생의 챕터가 펼쳐졌다. 앞으로 많은 일이 있겠지만 한평생 햇빛에 그을린 마른 몸매에, 어린아이 같이 해맑았던 시아버지는 내 기억에 챕터에 고이 모셔 놓고자 한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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