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써둔 거니까 올리고 잘래. 오늘도 아무 일도 못했어

by 이브의 설렘


네가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말해주어도

나는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겠지


내가 니 때문에 자꾸 울어서 미안할까

나에게 도움이 안 되는 거 같아서 그게 참을 수 없는걸까

그래서 뭐라도 내가 너에게 의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서 내 손을 잡을 자격이 된다고 여기는 걸까

있잖아

그냥 네가 있어주면 되.

지금도 너한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어.

네가 날 좋아할 거란 망상회로를 희망 삼아 돌리면서 간신히 정신 붙들고 살고 있잖아.


오늘 영화를 보니까 예전 생각이 났어.
있지.

나도 꽤, 아니 아주 엄청 힘든 십 대 이십 대를 보냈어.

유복한 집에서 태어난 내가 아무 고민 없이 자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지난한 세월을 견디고 나니까

선물이라면서 네가 내 삶으로 튀어나왔어.

그 암흑같던 시절을 지나간 후에

너를 만나게 되어서 정말이지 너무 다행이야.

최고의 타이밍이었달까.

나는 있잖아.

말했었나?
어릴 때부터 정말 많이 상처를 받아서

결국 누구를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포기하고 살아왔다?


그래서 너도 나를 좋아할 리가 없을 거라고 당연하게 그렇게 여겼어.

내가 날 깔본 거야.


아주 어릴 때부터 같은 반 남자애들을 하나 둘씩좋아했는데

그새끼들한테 받은 상처들이란..


못생겼다 뚱뚱하다 얼굴이 스펀지밥이다 멍청하다 눈치없다 네 허벅지가 내 허벅지 두 배다 뛸 때마다 출렁거린다 여드름 좀 봐 눈이 작고 코가 낮아 성형 좀 해야겠다 얼굴 엄청 크네 옷이 그게 뭐야

또 뭐가 있었지 지금 생각나는 것만 해도 이 정도인데 또 눈물이 날 거 같네.


나를 자기들 틀 안에 넣어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짓는 사람들한테서 나를 지키기 못하고 마음을 닫아버렸어.

한 톨의 상처도 받지 않겠다고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을 찾았던 거지...

그래서 상처를 받지 않고 살았냐면...

아니. 나에게 가할 수 있는 최악의 상처를 줬어.


그러다 너를 만난 거야.

실면서 여자에게 가볍게 끌리긴 했지만

진지하게 좋아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너라는 사람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자마자 그렇게 끌려가다니.
그러다 네가 참여하는 줄 몰랐던 모임에 들어갔다가 너를 다시 보게 되고

너와 친해지고 싶다에서

너를 좋아하는구나

사랑하는구나

마음을 알리고 싶어 미칠 거 같아지는 미래를 맞이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29살이 되어서

모든 두려움을 이고지길 포기하고

용기를 내어서 일을 그만두고

하고싶은 일을 하러 세상으로 나왔더니


거기 네가 있더라.


떼잉~ 산타 할아버지는 한국 사람인가 봐 존나 빠른 배송이라니 하학ㅋㅋ



내 동창 친구 신애 알지?
언제였지

작년 여름쯤이었나...

오랜만에 만나서

너를 좋아한다고 털어버렸는데

하하 이미 눈치 챘었다고 하더라.


내가 널 보는 눈빛이며 모든 행동이 널 좋아하고 있더래.

그때만 해도 좀 입덕부정기였거든.

널 좋아하긴 해도 그렇게 깊게는 아닐 거라고 여겼던 때인데.


나를 십 대 시절부터 보았고

내가 짝사랑했던 남자애를

좋아한다는 걸

얘한테도 아주 나중에서야 말했는데

나는 이 친구도 알겠거니 했는데

정말 아~무도 몰랐을 정도로 모든 걸 숨길 수 있던 나인데


그게 어찌할 도리 없이 삐져나왔었나 봐.

나는 정말 필사적이었거든.

아무도

너마저도

내 마음을 모르기를.

그래서 네 가장 친한 친구로라도 오래오래 네 곁에 머물 수 있기를.

네가 나를 좋아하게 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니까...

너를 있는대로 챙기고 사랑하고 싶어서

네 주변 모든 사람들을 더 열심히 챙기게 됐다는 것도 말한 적이 있었나...


아무튼

네 덕에 가슴이 열렸고

다른 모든 존재들에게도 마음을 온전히 열 수 있게 됐어.

고마워.






혹시 내가

정상적이라고 하는

이성하고 살 수 있는 기회를

네가 뺐어버린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럼 정말 서운해.

나의 이야기를 제대로 말한 적 없으니 당연히 서운할 일도 말이 안 되는 거지만.


음... 나는 네 덕에 가슴을 열고 사람들을 대할 수 있게 된 거야.

너가 아니었음 남자고 여자고 철벽만 치다가 생이 끝났을 거야.

아무도 건드릴 수 없게 꽁꽁 싸매놨던 걸

네가 한순간에 쪼르륵 풀어버렸어.


풀린지도 모르고 지냈는데

그냥 너랑 즐겁고만 싶었는데


파헤쳐지고 난 속 안에서

뭐가 막 끊임없이 나오는 거야.

주체할 수 없게.


그게 너무 행복하면서도 너무 불행한 거야.

너하고 신나게 떠들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고민을 나눌 순 있어도 그 이상을 나눌 수 없다는 게 너무 싫었어.

손바닥과 머리카락이 생각보다 까칠한 걸 알게 됐을

네가 찬구들 무릎을 베고 눕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

네가 울 때

네가 웃을 때

네가 다른 사람한테 네 어깨를 내어줄 때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친구로서 해줄 수 있는 건

네가 아프지 않게

네가 좋다는 사람하고 잘 되기를.

그래서 나는 너랑 가장 친한 친구로 오래오래 같이 있읊수 있기를 바라게 되는 것뿐이었어.


애초에 체념으로 시작해서 이어지는 관계였기에...



서른 가까이 돼서 사회에서 만난 너를

마치 또 열다섯 살 그때처럼

졸이며 좋아하고 있는 게 한심하다가도 입술을 꾹 구겼어.

닐 만나기 전에 누구라도 사귀어 볼 걸.

연애하는 것 좀 배워둘 걸.

맘을 누구에게 전해나 볼 걸.

그럼 널 좋아한다 처음 느꼈을 때

좀 더 능숙하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하고 좀 그게.후회가 돼.




네가 무엇 때문에 망설이고 바쁜 건지

왜 그게 나한테 다가오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 건지

그걸 유일하게 모르겠고 이해가 안 갔는데

방금 이걸 쓰면서

아...그럴 수 있겠다 했어.


예전에 너가 그랬잖아.

여기다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부모님이 돈 문제로 엄청 다퉈왔다고

둘의 관계가 돈 때문에 골이 깊어져 버렸다고...


나는 겪어보지 못 한 아픔 고충 고민이라서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우리 부모님은 유복하고

평생 두 세 번 우리 앞에서 싸우셨나 하니까.


그치만 그 두 세 번의 싸움도 나에게 엄청 큰 충격으로 남아있어서

그런 경험을 혹시 수도 없이 한 거면

얼마나 그게 너를 크고 깊게 할퀴어 놨을지...

마음이 아프네


그때 너를 알았더라면

저녁마다 우리 집에서 같이 밥이라도 먹고

쭈쭈바 사서 같이 그네 타면서 먹다가

너네 부모님이 다 잠들고 나면 너를 집에 데려다 줬을텐데

우리 알고 보니까 십 대 때도 이십 대 때도 꽤 가까이에서 살고 있었잖아 신기하게

특히 내가 대딩 때는 네 본가랑 코딱지만한 거리였다.

너랑 나랑 길 가다가 지나쳤을지도 몰라!

신기하네...


아무튼

네 상처가 지금도 너의 뇌관을 틀어막는 포인트겠구나 하니까

머리 아프게 고민을 거듭하는 네가 이해가 가.

나도 나만의 문제에 대해 29년을 그랬고...


군데 나는 있잖아.

나도 너도 결국 잘 될 거란 것도 알고

뭐가 막 엄청 잘 되지 않아도

너랑 스무 평 정도 되는 전셋집에서

도란도란 지낼 수 있으면 족해


아니 존나 행복할 거야.


딱 하나는 꼭 채워져야 해.


네가 너의 모든 감정과 경험을 나와 공유한다는 전제야.

이것만이 내가 너와의 관계에서 행복한가 아닌가를 가르는 기준이더라.


욕심 내지 않고 살면

한 달에 얼마 안 들어가더라고~

그래도 일단은 법적인 보호를 못 받는 동성 커플인 우리는

더더욱 병원비 비상금 등을 차곡차곡 쌓아둬야겠지만


근데 뭐 아무튼 한 번에 다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아직 시간 많아~

백 이십 대 시대래잖아~

십 년 이십 년 길게 보고 나아가면 되자 않을까?

나랑 네 일 두 가지 전부 집중하느라 머리 터질 게 걱정될지 모르겠는데

네 일 할 때 나도 내 일 하고

데이트는 카페든 어다든 가서 각자 힐 일 하면 되지 않나.

나는 너랑 뭐 어디 놀러가서 맛난 거 먹고 좋은 거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네 얼굴 봐서 웃음 나고

내 일 할 거 하면서

니랑 손도 잡을 수 있고

너랑 떠들 수 있고

너랑 뽀뽀할 수 있고


그러면 되거든. 그게 행복한 사람이라서.


그래도 네가 정 안되겠다면

그것도 이해해

그게 너니까.

그래도

네가 생각한 것보단

좀 일짝 와주라


너무 데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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