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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씨네 WeeCine Jun 10. 2018

로마 공화정

데이비드 M. 귄 지음 (2015, 신미숙 옮김, 교유서가)

본 글은 교유서가에서 출판된 '로마 공화정'에 대해, 저의 가치관에 따라 요약된 글로, 그 어떤 영리적 목적을 취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책의 내용 상당부분이 생략되어 있으며, 해당 글에 대한 출판사 등의 저작권 검토 요청이 들어온다면 곧바로 삭제하겠습니다.



제 1로마 건국 신화 (안개에 싸인 과거)     


공화정이 건설되기 전, 수세기에 걸친 로마의 왕정은 문헌사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해당 시대에 대한 기록물은 ‘아이네아스(Aeneas, 트로이의 왕자 이야기)’를 서술한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19)의 동시대인에 의해 쓰여 졌는데, 이는 왕들이 통치한 시대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베르길리우스는 공화정시대 조차 아닌, 공화정이 무너지고 황제가 등장 하게 된,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에 살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로마의 건국과 왕정에 관한 이야기들을 신화와 전승으로부터 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때문에 로마 관련 전승의 중요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중요성은 너무나 확실하다. 후대의 로마인들은 로마의 초기를 사회구조가 형성되고, 로마를 위대하게 만든 미덕이 나타난 황금시대로 여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루크레티아’의 이야기는 로마 여성의 전형을 확립했고, 독재자 ‘타르퀴니우스로’부터 로마를 해방시킨 브루투스의 이야기는 공화정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남겨주었다.     


비록 신뢰할 만한 근거와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초기 로마를 연구하는 것에 있어서는 다른 형태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 즉 최초의 로마인들을 자연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탐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전승 속 로마의 건국과, 자연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탐구로 이야기를 끌고 가 보자.     


전설에 따르면, 로마의 역사는 트로이의 멸망에서 시작한다. 트로이가 함락 당했을 때, 왕족인 아이네아스(Aeneas)는 도시의 생존자들을 지휘하며 이탈리아로 망명해 갔다. 그들은 이탈리아 반도의 라티움 평원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라티움 평원은 이탈리아 서부 해안의 중간쯤에 있는 비옥한 지역으로, 중부 이탈리아의 비옥한 토양 대부분을 포함한 지역이며 조밀한 농업 인구를 부양할 수도 있었다.     


아이네아스의 아들인 율루스 아스카니우스(Iulus Ascanius)는 라틴인의 도시인 알바롱가(Alba Longa)의 왕이자, 후에 로마의 중요한 가문인 율리우스(Julius) 씨족의 선조가 되었다. 바로 이 율리우스 가문에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한 카이사르와, 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등장한다. 돌아와서, 이 아스카니우스의 후손들은 수세대 동안 알바롱가를 통치했는데, 이 왕가의 권력다툼으로부터 로마 건국의 태동이 시작된다.     


알바롱가의 왕 누미토르에게는 동생 아물리우스가 있었는데, 아물리우스는 왕이 되고자, 형 누미토르를 폐위시키고 형의 아들들을 처형시켰으며, 딸 실비아는 여신 베스타에게 바쳐 여사제로 만들었다. 그러나 실비아는 전쟁의 신 마르스에게 겁탈 당했고 이내 쌍둥이를 출산했는데 이들이 바로 로마의 선조라고 일컬어지는 로물루스와 레무스다. 쌍둥이 형제는 늑대의 젖을 먹고 컸으며, 성인이 되자 아물리우스를 몰아내고 자신들의 할아버지에게 알바롱가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테베레 강가의 팔라티누스 언덕에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기원전 753년(전설상으로)에 건국된 로마다.     


로마의 첫 번째 왕인 로물루스의 이후로 로마에는 여섯 명의 왕이 존재했다. 로물루스는 퀴리누스 신으로 신격화 되었고, 그의 계승자는 폼필리우스라는 ‘사비니’인이었다. 건국 당시 로마는 여성과 노동력이 부족해 타 부족이라 할지라도 거리낌 없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폼필리우스는 로마의 달력과 종교의 의례들을 조직했다. 세 번째 왕인 호스틸리우스는 전사였는데, 선조들의 도시인 알바롱가를 파괴하였다. 네 번째 왕 안쿠스 마르키우스는 앞의 두 왕의 선례를 따랐다. 종교 의례를 수립하고, 주변의 라틴 민족을 제압했다. 다섯 번째 왕은 에트루리아 출신의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이어받았다. 그의 치세에 유피테르 신전의 기초를 건설했으며 이러한 도시 건설 사업은 다음 대에도 이어졌다. 여섯 번째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로마 주민의 인구조사를 실시했으며, 세르비우스 성벽을 세워 도시의 경계를 규정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왕은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였다. 그는 독재자로 공포 정치를 행하였고, 원로원을 무시했으며 그의 자식들은 악행을 일삼았다. 이에 분노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후에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의 조상이다.)는 로마 시민들을 모아 오만왕 타르퀴니우스와 아들들을 추방하였다. 그리고 로마느 왕을 대신해 두 명의 집정관이 선거로 선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기원전 510년, 로마 공화정 시대의 시작이 되었다.     


제 2공화정의 발전 (공화정이 형태를 갖추다)     


로마 공화정의 성립 이후, 몇 세기 동안 로마는 안팎으로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러한 시련과정을 통해 공화정은 성숙해지고 단련되었다. 먼저 외적인 충돌을 살펴보자.


기원전 510년에서 기원전 275년 사이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지배세력이 되었는데, 그 과정은 손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에트루리아인부터 남부의 그리스인들 까지 로마의 이름 아래 두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 공화정이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 하는 것의 시작은, 레길루스 호수의 전투였다. 로마는 초기 공화정에 반발하는 라틴인 도시들의 연합체와 전투를 벌였는데,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서 라틴 도시들은 로마의 동맹국이 되어야 했다. 동맹국이 된 라틴도시는 로마에 세공을 납부하지는 않았지만, 일정 수의 병사들을 제공하여 로마 장군의 지휘 아래 로마 군에 복무해야 했다. 또한 사회적, 문화적으로 로마와 라틴도시들은 매우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는데, 동시대 그리스 세계의 지극히 독립적이고 각자의 권리를 지키기에 급급한 개별 도시국가들에 비하면 로마와 라틴도시들의 관계를 매우 혁명적이고, 정교했다. 라틴도시 덕분에 로마는 인구와 군사력 측면에서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로마는 스파르타와 아테네와 같은 일개 도시국가의 한계를 뛰어넘게 된 것이다.     


라틴 동맹국들에 도움에도 불구하고 공화정 초기에 라티움 지역 밖으로 로마의 권위를 확장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세기 동안 투쟁한 끝에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에서 점진적으로 우위를 점해가고 있었다. 갈리아인의 약탈이라는 끔찍한 재해가 있었지만, 로마는 그것은 버티어내고, 빠르게 복구하여 남부 이탈리아로 그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상대는 바로 ‘삼니움인’이었다. 삼니움인은 남부 이탈리아의 거친 산악 민족이었다. 3차에 달하는 로마와 삼니움인의 전쟁을 통해, 운명은 결국 로마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과정 또한 녹록치 않았다. 실제로 제2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327~304)에서는 로마가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며 물러서야 했다. 하지만 로마는 군사력인 우위뿐만 아니라, 위대한 운명에 대한 확신, 그리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집념을 통해 결국 스스로를 역사의 승리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삼니움인과의 전쟁에 이어서, 로마는 갈리아인, 에트루리아인, 삼니움인의 연합군 또한 기원전 295년 센티눔 전투에서 그들을 분쇄하였고, 이탈리아반도의 최강 세력이 되었음을 알렸다. 게다가 이탈리아 서남부 해안에 정착한 그리스인의 도시들인 마그나 그라이키아들 또한 이내 로마의 동맹 세력권 하에 편입됨에 따라,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여왕으로서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외적인 팽창을 하는 동안, 공화정의 사회, 정치 구조 또한 발전시켰다. 최초의 귀족 계층으로 알려진 파트리키, 즉 특정한 대 가문들로 구성된 원로원이었지만, 외적인 팽창이 진행됨에 따라 일부 부유한 평민들은 여느 혈통귀족 만큼이나 거대한 부를 소유하게 되었고, 로마 군사력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재산이 있는 평민들이 스스로 무장한 보병들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부유한 평민들 또한 정치권력에 있어서 동등한 몫을 귀족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한다.      


평민들의 권리 획득 요구 운동 첫 번째는 바로 ‘평민들의 철수’로 불리는 사건이었다. 기원전 494년 군대가 소집되었을 때, 평민들은 소집에 응하지 않고 대신 로마 외곽에 모여 혈통 귀족들이 모종의 대표권을 줄 때까지 움직이기를 거부한 것이다. 결국 물러선 혈통 귀족들은 평민들만의 민회인 평민회를 소집할 수 있게 하고 평민의 권리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대표자인 호민관을 선출할 권한을 주었다.     


두 번째는, 성문법을 제정한 일이었다. 기존에는 혈통귀족이 법을 장악하고 있었고, 관습적인 불문법에 의해 판결이 내려졌다. 이러한 관습법 때문에 호민관이 평민을 보호함에도 불구하고 귀족이 평민을 착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결국 기원전 450년경 혈통 귀족의 자의적 사법권에 대한 반발로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이 제정되었으며, 그것이 발전되어 기원전 287년경 호르텐시우스법에서 평민들의 결의가 정점에 달하였다.  

   

그러나 부유한 평민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한 세기 이상의 투쟁을 겪은 뒤 기원전 367년, 결국 평민이 집정관 후보에 입후보할 자격을 허용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342년부터는 2명의 집정관중 1명은 반드시 평민이어야만 했다. 혈통귀족과 평민 사이에 출생에 의한 차이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공화정의 지배계층은 귀족과 평민을 아우르는 것으로 확대된 것이다. 혈통 귀족과 평민을 포함한 새로운 귀족층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이것으로 행정관(집정관, 법무관 등), 원로원, 민회로 대표되는 로마 공화정의 독특한 정치 구조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당시의 진정한 정치적 힘은 행정관 개인의 힘 보다는 원로원의 집단적 권위에서 나왔으며, 민회 또한 실제로는 원로원의 지도를 따랐다. 원로원이 집단 지도권을 행사했으므로, 어느 한 개인이 전체 권력을 소유할 수 없었으며, 공화정은 안정되고 보수적이지만 융통성 있는 체제로 발전해 나갔다. 이것은 로마가 위대하게 성장 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로마의 공화정을 압박하는 원인이 되었다. 경쟁심이 강하고, 호전적인 원로원 엘리트들이 이끄는 로마는 계속해서 팽창하고자 했고, 이것은 로마에게 승리를 안겨주었으나, 지나친 팽창에 의한 압력을 공화정 구조가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이다.    

  

제 3위엄(디그니타스)과 영광(글로리아) (남성, 여성, 그리고 신들)     


초기 로마의 일화 중 킨키나투스의 이야기가 있다. 킨키나투스는 로마의 위기에 독재관직을 수행하여 훌륭히 로마를 구원하였으나, 그 직후 사퇴하여 권력을 내려놓았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킨키나투스의 일화는 후대의 로마인들이 생각한, 공화정을 구성하는 모든 미덕을 몸소 구현한 것이었다. 이처럼 초기 로마는 후대의 로마인들에게 황금시대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사치를 멀리하고 부패하지 않은 단순한 생활 방식을 소중히 여겼다. 이러한 고결한 생활을 통해 신의 은총을 받으며, 역경 속에서 힘을 발휘하고, 이웃민족 보다 우월한 지위는 점했다고 믿었다. 동시에 후대는 이러한 영웅적인 선조들을 본받고 따를 뿐만 아니라, 그들을 능가하라는 교육을 받았다. 공화정이 팽창의 길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준 것은 바로 선조들을 능가하려는 이러한 열망이 주요했다. 그러나 공화정 막바지에 혼돈과 내란으로 무너져갈 때, 로마의 사람들은 로마의 팽창과 획득한 막대한 부에 따라,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선조들이 갖추었던 미덕을 상실했다는 점을 비극의 원인으로 꼽게 된다.  

   

또한 원로원 내에서 한 인물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위엄(디그니타스)’임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 사이의 위엄은 단순한 위엄이 아니라 복합적 개념의 위치를 가진다. 한 개인의 인격적 가치과 가문의 가치를 모두 합한 그 무엇인 것이다. 그러한 위엄을 높이려 한다면,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영광(글로리아)’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공화정기 로마에서 최고의 영광은 전쟁을 통해서, 즉 군대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으로써 얻을 수 있었다. 로마의 모든 귀족은 자신의 위엄을 증진시키기 위해, 또 그를 통해 원로원의 서열에서 경쟁자들을 압도하기 위해 영광을 추구했다.     

 

로마의 상회와 정치생활을 지배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명성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선조들의 업적을 모방하고 능가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는 공화정에서 군사적 팽상의 원동력이자 로마 세력 확장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든 동시에 그것은 로마의 공화정이 몰락하는 데에 중요한 원인을 제공한다. 점점 더 위에 대한 능력을 획득한 귀족들은 다른 귀족뿐만 아니라, 원로원의 집단적 원위에 까지 경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점차 개인의 위엄이 국가에 대한 봉사보다 더 중요해 졌으며, 결국에는 로마를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킬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는 사람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제 4포에니 전쟁 (카르타고를 파괴해야 한다.)    

 

기원전 275년 무렵 로마의 공화정을 구성하는 정치, 사회 구조는 확고하게 안정되었다. 외적으로도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그들을 최고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은 여전히 지역 세력에 불과했고,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지중해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 무렵, 상황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로마의 시야가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서기 시작하자, 북아프리카의 도시국가 카르타고와 직접적으로 충돌하게된 것이다.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년에서 기원전 146년 동안 3차에 이르는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의 전쟁으로, 로마는 심각한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고,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또다시 운명은 로마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이후 로마는 진정한 지중해의 지배세력으로 발돋움한다.     


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의 지배권을 두고 시작하였다. 카르타고는 오랫동안 시칠리아에 개입하고 있었지만, 로마는 전쟁과 정복으로 인한 경제적 보상과 군사적 영광을 원했다. 결국 로마를 전쟁에 몰아넣은 인들은 원로원 귀족층이었다. 당시 로마는 해군이 없었지만, 좌초된 카르타고 함선을 바탕으로 갤리선을 건조하기 시작했고, 전함에 ‘까마귀’라는 장치를 부착하여 백병전에 특화된 로마군의 특성을 더욱 살릴 수 있는 방안도 내놓았다. 이를 바탕으로 로마의 함대는 기원전 260년 밀라이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고, 많은 격전이 있었으나 결국 로마는 승리하였고, 시칠리아는 로마 최초의 속주가 되었다.     


시칠리아와 여타 지역을 상실하게 된 카르타고는 해외에 남아있는 마지막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에 힘을 집중시켰다. 그곳의 지휘권을 맡은 장군은 하밀카르 바르카로 그의 아들이 바로 유명한 장군 한니발이다.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병력을 다시 한 번 전쟁으로 이끌었다. 한니발의 도발로 기원전 218년 제 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한니발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수, 알프스를 넘는 것으로 이탈리아 반도 내에 갑작스럽게 출현하며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한니발은 로마의 동맹 도시들을 ‘해방’한다는 선전구호로 진군하였고, 실제로 그가 승기를 잡자 어느 정도 선동의 효과도 있었다. 특히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의 성공은 정점에 이르렀고, 군사적 천재로서의 명성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하지만 보급과 자원 부족 등의 복합적인 이유로 로마시의 코앞에서 그는 진군을 멈추어 있어야만 했다. 이때 로마에 영웅이 출현한다. 바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다. 24세의 청년 스키피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군대를 정비하였다. 로마인의 칼로 유명한 글라디우스도 이때 도입되었다. 군대를 정비한 스키피오는 이내 이베리아 내에서 카르타고를 철수시켰고, 이 성공을 바탕으로 북아프리카 공격의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스키피오는 곧바로 카르타고로 진군했고, 한니발은 로마의 남겨두고 본토를 지키기 위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카르타고에서 만난 두 영웅의 승자는 스키피오였다. 누미디아인의 지원을 받은 스키피오는, 지치고 질이 낮은 군대를 가진 당시의 한니발로서는 이기기 힘들었던 상대였다. 카르타고와 로마는 강화조약을 체결했고, 카르타고는 치명상을 입었다. 로마는 막대한 부를 얻게 되었으며, 스키피오는 거대한 개선식과 아프리카누스 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바로 이 이름에 함축되어있는 스키피오의 전례없은 경력은, 로마의 귀족들을 자극시켰으며, 원로원 엘리트의 경쟁을 격화시켰다.    

  

로마와 카르타고는 기원전 2세기에 마지막으로 충돌한다. 그러나 비록 3차 포에니 전쟁이라고 이름이 붙었을 지라도, 사실상 학살에 가까웠다. 카르타고는 회복하지 못했고, 이웃한 누미디아 왕국의 침입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전 146년 로마는 카르타고를 파괴한다. 카르타고의 땅은 저주를 받았고, 소금이 뿌려졌다. 카르타고의 북아프리카 영토는 이제 로마 공화정의 속주가 되었다.


제 5끝없는 팽창의 시작 (지중해의 여왕) 

    

카르타고에 승리한 이후, 로마는 서부 지중해의 가장 주요한 세력권으로 발돋움 했다. 그러나 고대 지중해 세계의 전통적 세력 중심지는 서부가 아닌 동부에 있었다. 비록 기원전 200년 무렵에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영광스러운 과거는 역사에 묻혀 사라져있었지만, 그들의 언어와 문화는 여전히 문명화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로마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적, 군사적 힘을 가진 그리스 도시국가가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그리스를 단순히 정복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로마인은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을 야만인이 아닌, 문명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이길 원할 뿐이었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은 여전히 매우 야심적인 원로원 엘리트들이 이끄는 공격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세력이었다. 이런 로마의 두 모순된 성격의 갈등은 기원전 196년 코린토스에서 열린 이스트미아 경기에서 내려진 ‘그리스의 자유’ 선언으로 전자가 승리하는 듯 했다.    

  

실제로 이후 약 20년 동안 로마 공화정은 코린토스에서 자유의 선언을 통해 시행한 정책을 지속하기도 했다. 그리스에 로마 군대를 전혀 주둔 시키지 않았고, 동방의 어떤 지역도 로마의 속주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공화국 등이 왕위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카르타고가 파괴된 해, 즉 기원전 146년에 로마의 장군 루키우스 무미우스의 명령에 의해 코린토스가 파괴되었다. 이는 그리스인에게 부여되었던 자유를 종식시키기에 적합한 상징적인 행위였고, 로마 공화정은 정복을 시작했다.      


제 6제국의 씨앗 (제국의 비용)     


제 2차 포에니 전쟁, 그리고 동방의 그리스로 영향력을 확장한 결과 로마 엘리트들 내부에서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게 되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전례 없는 경력은 원로원 의원들 간의 평등이라는 공화정의 근본 정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최초로 원로원의 집단의지를 압도할 정도의 권위와 인기를 누리는 로마 귀족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로마 엘리트들 간의 경쟁 심리로 인해 다른 귀족들도 스키피오를 능가하려고 애쓰게 되었는데, 점점 고조되는 부와 영광에 대한 경쟁은 엘리트 전반으로 확대되어 로마의 세력을 계속해서 팽창시키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팽창의 경제적 효과는 로마에 큰 영향을 끼쳤다.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켰고, 인플레이션을 발생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화정의 안정과 통합을 위협했다. 귀족의 대토지와 노예노동의 확장이 로마 공화정 군대의 중추가 되었던 로마와 이탈리아의 소농들에게 압박을 가했던 것이다. 원로원 개인의 부는 증대되었을지언정, 군대에 복무하는 소농들은 재산을 잃어갔고, 군대에 복무할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런 사회적 모순과 불평등으로 인해 쌓여만 가는 불만은 그라쿠스 형제의 등장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라쿠스 형제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들로 공화정 최고의 귀족층 출신이었다. 하지만 형, 티베리우스는 이베리아로 가는 도중 목격한 북 이탈리아 지역의 풍족한 귀족의 대농장과 그와 반대되는 소농의 비참한 현실을 보면서 충격을 받고, 사회 개혁을 추구하기로 한다. 티베리우스는 호민관에 선출되어 여러 가지 사회개혁안을 내놓았지만, 그것은 원로원 귀족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베리우스는 그의 개혁을 밀고 나갔지만, 이내 그는 구타당하고 살해되었다. 티베리우스가 사망한 뒤, 그의 유지를 동생 가이우스가 이었다. 형의 비극적인 운명을 목격했음에도 여전히 개혁의 길을 선택한 가이우스는 형의 개혁안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들을 많이 내놓았다. 그의 광범위한 개혁안들은 그에게 명성을 안겨주었고, 형이 실패하고 암살을 당한 원이이었던 호민관 재선에도 성공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티베리우스보다 더욱더 원로원의 심한 견제를 받게 되었다. 원로원은 공화정을 수호한다는 명목 아래, 원로원 최종결의를 통과 시켰다. 집정관들에게 공화정을 수호하기 위해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그 결과 가이우스는 자살했고, 그의 지지자들은 숙청을 당해야만 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비극적으로 그 끝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들이 해결하고자 한 사회적 모순은 전혀 해결되지 못한 모습 그대로였다. 이로부터 결국, 공화정에는 위기가 닥쳐오기 시작한다. 첫 번째 위기는 유구르타 전쟁을 통해 들어났다. 아프리카 속주에 인접한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는 로마를 도발했는데, 그를 대적한 장군으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그의 부관이자 경쟁자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출현한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에서의 승리를 통해 엄청난 명예를 얻었다. 또한 마리우스는 재산이 없어 군복무 자격이 없던 카피테 켄시들도 자신의 군대에 받아들였고, 그들의 장비 또한 마리우스 본인이 부담했다. 그 결과 로마는 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통일성을 갖춘 전문 군대이자 사병을 목격하게 된다. 일명 ‘마리우스의 노새들’이다. 또한 마리우스는 군 제식에 대한 개혁을 실시했고, 이를 통해 로마 제국의 유명한 ‘로마 군단’이 출현한다. 마리우스의 개혁과 강력한 전문 보병 부대의 출현은 로마 시민군이라는 오랜 이상의 포기와 동의한 사건이었다. 마리우스는 그의 군대와, 전쟁에서 얻은 부, 승리를 통해 얻은 명성과 위엄을 통해 집정관은 7번이나 역임하는 일견 독재관으로 까지 보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마리우스의 부관이자, 뒤를 이어 등장한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마리우스와 같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공화정은 마리우스와 같이 원로원을 압도하는 명성을 가진 이의 출현을 원치 않았다. 술라가 동방으로의 원정을 떠난 사이 그의 지휘권을 박탈하려고 한 것이다. 술라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고, 그의 군대는 로마로 진격하였다. 술라의 진격은 로마 귀족의 야망과 마리우스의 군사 개혁이 초래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영광과 탁월함을 갈망하면서, 술라는 병사들에게 자신의 위엄을 위해 싸우라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이 병사들은 국가가 아니라 술라에게 충성을 바쳤고, 약속된 토지와 재산을 하사 받기 위해 그에게 의존했다.     

 

이제 팽창에 의한 압력과 그라쿠스 형제의 도전으로 인해 약화된 원로원의 집단적 권위로서는 사적인 군대를 소유한 군사 지도자의 세력을 압도할 수 없었다. 공화국의 운명은 이제 억제 될 수 없는 경쟁 심리에 불타며 탁월함을 갈망하는 개별 장군들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고, 공화국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제 7로마 공화정의 몰락 (로마 공화정 최후의 시기)    

 

술라의 로마 진격은 마리우스가 병사함에 따라서, 그에게 대적할 이를 남기지 않았다. 술라에겐 그 어느 집단적 권위조차 대항할 수 없게 되었다. 로마를 장악한 술라는 자신의 지위를 공식화하기 위해서 독재관이라는 관직에 스스로 앉았다. 그러나 술라는 전통적인 독재관이 최대 6개월의 임기에 한하였던 것과 달리, 무한정 그 자리에 앉아 있고자 하였고, 동시대인들의 관점에서 그것은 사실상 왕위에 앉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술라는 반대파를 잔혹하게 숙청하였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병사들에게 토지를 나눠준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술라는 신실한 공화주의자였다. 일단 자신의 지위가 안전해지자, 원로원에 그라쿠스 형제 이전의 권위를 회복시켜주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 마리우스나 술라 자신과 같은 군사 지도자들의 출현하지 못하게 하는 예방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원로원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개혁을 완수한 뒤(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술라는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술라는 그 누구보다 공화정을 뛰어넘은 개인적인 영광을 획득하였지만, 말년에는 오히려 공화정의 가치를 회복시키기 위해 헌신한 것이다. 사견으로는, 그것이 아마 술라에게 있어서, 최고의 존엄과 영광을 획득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의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공화정의 완전한 회복을 염원한 술라의 의지와는 달리, 그의 지지자였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로마의 국면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들은 술라 시대에 막대한 부를 획득하였고,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반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의 반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격파하며 영광을 얻었다. 반대급부로, 그들을 제외하고 무능력했던 원로원은 더욱 약화되었다. 두 장군은 자신의 군대를 해산하지 않은 채 로마 시 밖에 주둔했다. 두 사람은 함께 집정관 직에 출마하였는데, 그 중 폼페이우스의 나이가 주목해야할 사안이었다. 당시의 그의 나이는 겨우 36세였고, 공직 경험도 전무하였다. 이는 공화정의 전통을 묵살한 채 집정관이 된 것이었다. 결국 원로원에 권위를 집중시키려던 술라의 노력에 타격이 가해진 것이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그에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전쟁과 해적 소탕 등으로 그들의 영광을 더욱 증대시키기 시작했다. 또한 그것들이 성공적으로 진행됨과 동시에 막대한 부 또한 그들에게 들어갔다. 그들은 로마에서 서로를 제외하고는 대적할 이가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원로원의 그들에 대한, 특히 폼페이우스에 대한 경계 또한 만만치는 않은 것이었다. 폼페이우스는 노련한 군인이었지만, 정치가는 아니었고 과거 술라에게 쏟아졌던 증오의 대상이 될까 두려워했다. 크라수스는 상대적으로 폼페이우스보다 욕심이 덜 하였고, 원로원의 경계가 거세지가 그도 주춤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로마에는 또 다른 영웅이 등장한다. 바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씨족의 후손으로 적어도 혈통에 있어서 그를 넘을 만한 위엄의 원천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폼페이우스보다 훨씬 관례적인 경력을 쌓았는데, 통상의 연령에 이르러 통상의 하급 관직을 보유했다.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몇 번의 소규모 원정을 성공시킴으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는데,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로마의 국면을 자신의 상황에 유리하게 정치적으로 교묘히 이용하였다. 그는 서로 경쟁하고 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연합하게 하였고, 그들을 배경으로 삼아 집정관에 출마했다. 이렇게 하여 제 1차 삼두정이 성립되었고, 이는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 결혼함으로써 더욱 굳건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삼두정간의 유대 또한 옅어져 갔다. 그러던 와중에,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제국 공격이 실패하고, 그 자신도 전사함에 따라서 로마 세계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진영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당시 집정관의 임기를 마치고 갈리아 원정을 떠나 있는 상태였는데,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고 있음을 느끼고는, 카토 등의 보수파들과 연합하여 공화정의 옹호자를 자처하였다. 이에 한 세대 전의 술라가 그러하였든 카이사르 또한 로마로 진격했다. 기원전 49년 1월 11일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 영토로 들어갔다.      


이후 5년간의 치열한 내전 끝에 중부 그리스의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그 결판이 났다. 카이사르는 상대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병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폼페이우스를 격파하였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주하였지만, 배반자들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후 잔당들을 소탕하며 카이사르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말로 승리는 기념했다. 마지막으로 폼페이우스의 지지자들이 이베리아에서 재집결하였고, 기원전 45년 문다인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승리함으로써 로마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로마를 지배하자마자 많은 개혁들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에 대한 반발은 그러한 개혁이 아닌 그의 위엄에 있었다. 카이사르는 그 술라보다도 오래 독재관 직을 보유하겠다고 주장했다. 종신 독재관이 된 것이다. 이는 로마에 전혀 걸맞지 않았으며, 카이사르가 공화정 정서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음을 드러내는 조처였다. 수세기 동안 왕이라는 칭호를 혐오한 문화에서 카이사르는 너무도 눈에 띄는 독재자였다.   

  

결국 기원전 44년 3월 15일, 대규모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하던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난도질을 당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60명이 넘는 사람들이 카이사르 살해 음모를 알고 있었다고 하니, 이는 그가 불러일으킨 적대감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카이사르를 암살한 이 ‘해방자’들은 카이사르가 죽임을 당한 이후의 미래를 그려볼 능력까진 없었다. 단순히 카이사르가 죽으면 공화정으로의 복귀가 이루어 질 것이라고 희망했을 수도 있지만, 사실상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로부터 승리하고 공화정을 위해 소카토가 순교함에 따라 공화정은 이미 죽어있었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다른 이들이 채워야 할 권력의 공백을 남겼을 뿐이었다.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그의 부관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더불어 제 2차 삼두정을 형성했다. 문장가로 유명한 키케로는 카이사르 시대에서 조차 살아남았지만 결국 이 시대의 권력자들로부터 희생되었다. 그러나 무능한 레피두스는 이내 소외되었고, 또다시 로마는 이탈리아를 거점으로 하는 옥타비아누스와 이집트와 동부를 거점으로 하는 안토니우스간의 대결 국면으로 접어든다. 그리고 결국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도주했지만, 자살한다.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지배자가 된 뒤, 5년 후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전제 지배를 암시하는 그 어떠한 칭호도 거부하였고, 오히려 전통적인 호칭인 ‘프린켑스(원로원의 권위 있는 시민)’를 선호했다. 비록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황제였고, 공화정의 지배구조는 명목상이었을 지라도, 그는 카이사르의 사례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그는 존경심을 갖고 원로원을 대했고, 공화정에 입각한 사회가치를 수호했으며, 도덕과 종교를 보호했다. 그렇게 하여 기나긴 내란으로 지쳐있던 로마 시민들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여 보다 안정적으로 회유한 것이다. 서기 1세기에 노골적인 전제정치를 열망한 아우구스투스의 후대 황제들, 칼리굴라와 네로, 도미티아누스는 모두 살해되었다. 로마의 과거 공화정을 알지 못하는 프린켑슨ㄴ 지배할 수 없던 것이다.     


로마 공화정은 약 500년간 지속되었다. 왕의 추방에서 시작하여 황제의 등장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로마 시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던 작은 도시에서 광대한 지중해 제국의 여왕으로 변모했다. 로마 제국의 지배권은 단지 내부 투쟁에 의해서만 위협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공화정의 승리와 비극은 서로 떨어질 수 없이 얽혀 있었다. 공화정의 독특한 정치체제는 로마에 안정을 가져오고, 원로원의 집단적 권위는 사회를 하나의 방향으로 이끈 반면, 귀족들의 경쟁과 ‘영광’을 향한 갈망은 사회적 압력을 형성해 로마를 팽창의 길로 몰고 갔다.     

하지만 팽창으로 인해 공화정이 감당해 낼 수 없는 사회, 정치, 경제적 힘들이 분출되었다. 경쟁의 수위가 높아감에 따라 권력은 군사 지도자들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그들 간의 경쟁은 물리적인 내란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공화정의 이야기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무익한 경쟁과 유혈로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로마의 지중해 지배는 이후 수세기간 지속되었으며, 이 제국은 바로 공화정의 업적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공화정의 정치, 사회, 문화적 유산은 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했다. 로마 공화정은 후세의 이상이며, 지금고 경고를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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