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이 말을 해> 안녕바다
2023년 4월 14일.
신경 쓰이던 사람이 신경 쓰이는 일을 하면 그 일에 끼고 싶어 진다. 나는 그냥 그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고 경찰에게 인계한 것뿐인데 여기까지 주워 온 과정을 알아야 한다며 경위서 작성에 협조를 해달란다. 오늘 편의점 마감도 일찍 잘 끝내서 기분 좋게 맥주 한 잔 하려고 세계 맥주 네 개도 골라놨는데. 지금쯤 카운터 옆에서 미지근해져 갈 맥주에게 미안해 죽겠다. 이따 가서 찬 걸로 바꿔야지. 몇 시인가 싶어 핸드폰을 들어보니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엄마에게도 언제 오냐는 문자가 몇 통 와 있다.
- 지금 파출소. 편의점 앞에 있는 취객 데려다 놨는데 이것저것 절차가 있나 봐. 금방 하고 갈 테니 주무셔요.
- 너 맞았어?
- 아니. 그냥 길에 누워 있는 취객 데려다줬는데 경찰이 기록 남겨야 한대. 별 일 아니니까 끝내고 갈게요.
분명 파출소라는 단어에 민감하시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이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고개를 들어 오늘의 원흉이 누워 있는 실내용 벤치를 쳐다봤다. 누구에게 된통 맞은 모양인지 오른쪽 얼굴이 퉁퉁 부었고 게다가 경찰이 인적사항 확인한다고 지문을 채취해 가서 두어개의 손가락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저런 꼴로 벤치에 쪼그려 누워 있는 걸 보니 괜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저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담배 살 때 민증 몇 번 봤는데. 1999년 생이라는 거 말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긴, 어느 아르바이트생이 동성의 민증을 자세히 쳐다보고 기억하겠는가. 저 남자는 내가 처음 편의점 알바를 시작하기 전부터 아르바이트생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여기에 처음 온 순간을 기억하는 건 아무도 없었지만, 월요일과 금요일 저녁이면 와서 담배를 사러 오는 건 모두 알고 있었다.
- 말보로 화이트 후레시 하나 주세요. 감사합니다.
저 두 문장이 우리가 들은 그의 목소리 전부다. 사실 담배 사는 손님이 한 둘도 아니고 기억에 남을 것도 아니지만, 그는 좀 특이했다. 항상 편의점에 바로 들어오는 법 없이 플라스틱 테이블에 앉아서 본인이 들고 있던 대여섯 가치 정도의 담배를 다 태우고는 들어와서 또 다른 담배를 산 뒤에 돌아갔다. 가끔은 담배와 컵라면을 사서 컵라면까지 먹은 다음에 갈 때도 있었지만. 그가 머무른 자리는 항상 깨끗했다. 테이블은 항상 담뱃재 하나 없었고, 컵라면도 국물 한 방울 남기는 법이 없었다. 편의점 알바들끼리 저 사람은 뭘까, 하며 궁금했지만 그 누구도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눈길을 끄는 외모도 아니고, 그런 사람들의 사연이 아름다울 리는 없으니까.
소란스러울 것만 같던 한밤의 파출소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가끔씩 경찰끼리 무전으로 상황을 공유하는 말들만 오갈 뿐이었다. 사건을 접수하겠다던 경찰이 나를 본인의 자리 옆으로 불러내서는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 이 근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해요. 10시에 야간한테 일 넘기고 집에 가려는데 사장님이 오셔서 가게 뒤에 단골손님이 술에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도와 달라 하더라고요. 그냥 지나치지 뭐 하러 돕나 싶긴 했는데, 가보니까 가로등 아래에 저 사람이 인사불성으로 앉아 있는데 누구한테 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잖아요. 병원을 가든 경찰서를 가든 해야 할 것 같아서 연락드렸어요.
- 사장님은 어쩌다 발견하셨대요?
- 알바들 얼굴 본다고 이틀에 한 번은 얼굴 비추시거든요. 오시는 길에 보셨대요.
- 사장님은 어디 계세요?
- 가게예요. 필요하면 오신데요.
- 단골손님이라고요?
- 네. 매주 월요일 금요일에 와서 담배 사가는 분이에요. 특별한 건 없어요.
- 아, 이거 곤란하네요. 평소 같으면 그냥 가시라고 할 텐데 안면도 있다 그러고, 저분이 지금 누구한테 맞았잖아요. 깨어나면 진술 듣고 보내드릴게요.
- 빨리 쉬고 싶은데. 제가 가서 깨울게요.
- 아뇨. 제가 하죠. 민증도 돌려줘야 하고. 잠시만 저 쪽에 앉아 계세요.
아, 재수가 옴 붙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일까. 경찰 입장에서야 절차를 지키는 것일 테지만 나는 괜히 일이 꼬인 셈이다. 사장님한테 잘 보일 요량으로 경찰이랑 동행한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전화만 하고 퇴근할 걸 단단히 잘못했다.
- 남재훈 씨.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
남재훈이라 불리는 저 원수의 손에 민증을 쥐어주며 깨워봤지만 일어나질 않는다. 미치겠다. 경찰 목소리가 너무 사무적이라 목소리가 귀에 안 들어가나. 경찰이 한숨을 푹 쉬더니 그 사람의 몸을 뒤져 핸드폰과 지갑을 찾아냈다. 지갑에 민증을 넣어준 뒤 다시 들어 그 사람의 핸드폰을 이리저리 톡톡 두드린 경찰은 어떤 번호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인간관계 관리를 어떻게 했나, 거는 족족 받지를 않는다. 그러다 누군가 전화를 받았는지 경찰의 목소리가 급하게 수신자를 잡아 챈다.
- 아니요. 그게 아니고. 혹시 남재훈 씨 아십니까. 예. 다름이 아니라 지금 남재훈 씨가 과음 상태에서 폭행을 당해서, 보호자로 와주실 분을 찾고 있습니다. oo파출서로 잠깐 와주실 수 있을까요?
상대가 알겠다고 했는지, 경찰은 금세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지구대의 위치를 읊고는 전화를 끊었다. 난 그때 분명 봤다. 남재훈인가 뭔가가 한숨 쉬듯 웃는 거. 아, 완전히 속았다. 저 사람 저거 아까 전부터 잠이 깼던 게 분명하다.
- 저 사람 깼어요!
- 술 덜 깼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시죠.
내가 분명 웃는 걸 봤는데! 왜 아직도 자는 척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뉴스에서 경찰이 취객 상대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다. 뉴스를 볼 때는 경찰이 불쌍했는데 막상 내 일이 되니 빨리 안 끝내주는 게 고역일 뿐이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별 수 있나.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거의 고수 레벨에 오른 핸드폰 게임을 하나 켰다. 같은 사탕을 세 개에서 다섯 개 한 줄로 이으면 사탕이 깨지는 퍼즐 게임이다. 어떤 게임이든 마찬가지지만 순간의 선택으로 게임 결과가 판이하게 갈리는 게 재미있었다. 게임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잘못하면 다음 판을 하면 되고, 빨리 끝내고 싶으면 아이템을 사서 문제를 풀면 그만이었다. 물론 그것도 타이밍을 놓치면 아이템만 낭비하는 꼴이었지만. 인간세상과 다르게 수많은 기회를 치트키로 만들 수 있는 게임이 맘에 들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희미한 미소를 감추는 남재훈이라는 남자를 바라봤다. 저 사람은 뭘 위해서 맨날 담배를 피우며 편의점 앞에 있던 걸까. 퍼즐을 잘못 옮긴 걸까? 아니면 어떤 아이템을 사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 버린 걸까?
그때 파출소 유리문이 흔들 거리며 열리더니 사장님이 들어오셨다. 손에는 내가 챙겨놨던 맥주가 든 편의점 봉지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사장님은 당연히 금방 끝내고 돌아올 줄 알았던 내가 소식이 없으니 답답한 마음에 출두하신 듯했다. 경찰은 아까 나에게 말하듯 저 사람이 폭행당한 흔적 때문에 나를 그냥 보낼 수는 없다고 했다. 그 얘길 듣자 사장님 얼굴에 화색이 돈다.
- 내 이럴 줄 알고 CCTV 영상 가져왔어요. 우리 알바 억울할 뻔했잖아.
사장님 나이스! 나는 한걸음에 사장님 옆에 서서 경찰과 함께 사장님의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장님이 핸드폰으로 찍어온 CCTV 동영상에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남자가 가로등을 붙잡고 서서 한참을 있더니 갑자기 주먹을 쥐고 자기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본인의 힘에 놀랐는지 남자는 가로등 아래에 풀썩하고 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 그 남자를 발견한 사장님이 사라졌다가 나와 함께 다시 가로등 앞에 등장하는 것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 뭐야.
-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저 아니라니까요?
경찰은 당황한 것도 잠시, 증거자료로 동영상을 제출해 달라고 했다. 핸드폰으로 열심히 증거 영상 보내는 법을 배우고 있는데, 파출소 유리문이 열리며 시원한 바람이 등줄기를 스쳐갔다.
- 저 실례합니다.
차분한 여자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의 여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자는 벤치에 누워 쪼그려있다시피 한 그 남자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여자는 경찰 하나에게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 저 사람 보호자 필요하다는 연락받고 왔는데요.
- 아, 한밤 중에 죄송합니다. 다른 분들은 연락이 다 안 돼서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 신혜리요.
- 남재훈 씨랑은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 대학 동기예요.
한참 여자와 경찰의 대화를 엿보고 있는데 사장님이 나를 툭툭 쳤다.
- 영상 다 넘겼다. 이제 가도 된대. 가자. 내가 택시 태워 줄게.
사장님의 말에 부리나케 내 짐을 챙겨 나가며 이 모든 고생의 원흉, 남재훈의 얼굴을 쳐다봤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분명 웃고 있었다. 술이 덜 깨 잠든 사람은 절대 못 짓는 표정으로. 저 여자였구나? 경찰서 유리문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고생 많았다며 잡아주신 택시에서 사장님 손에 들려 있던 편의점 봉지를 열어봤다. 내가 챙겼던 맥주와 안주 몇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맥주도 차가운 걸로 바뀌어 있다. 예스! 시간 확인한다고 핸드폰을 켜니 하다 만 게임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CCTV 본다고 내팽개쳤더니 어떻게 풀고 있었는지 잊어버렸다. 아이템을 쓸까 고민하다 게임을 종료시켰다. 이미 타이밍을 잃은 게임이다. 그때,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
- 집에 가는 중.
- 잘 해결 됐어?
- 응. 그냥 찌질이 하나 도와 준거야.
- 찌질이? 술 취한 사람이라며.
- 술 없이 뭐 못하는 치사한 놈이니 찌질이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