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선언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
뭐든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고, 그 믿음을 잊어버린 채 살아온 시간도 있었습니다. 마치 처음 받아 보는 질문인 양 말문이 막히면 내 안의 목소리는 모양을 바꿔 끈질기게 되묻습니다.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엄민정 <작가 선언> 프롤로그 중
누구도 만나지 않는 날이 누구라도 만나는 날보다 많아졌다. 내가 혼자 노는 법을 터득했다는 걸 깨달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한때는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 휴대폰 연락처를 의미 없이 스크롤하며 몸부림치기도 했으나, 이제 나는 온종일 절간 같은 적막 속으로 파고든다.
그때, 정적을 깨고 날아온 문자 한 통. "죽었냐?"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와 끊임없이 연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지치게 한다. 생명이란 관계의 맥을 잇고 거미줄처럼 엉켜 있어야만 비로소 가치를 얻는 것일까. 우리가 모인 자리에서 나눈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매끈한 얼굴 위에 얹은 가짜 웃음과 그 이면에 숨긴 피로, 집에 돌아온 밤에 이불처럼 덮쳐오는 후회들.
나는 이제 무리에서 조금 비켜나기로 한다. 나를 좋아해 달라는 무언의 구걸을 멈춘다. 내 마음을 내팽개치고 타인의 안색을 살피는 대신, 나를 잘 대접하는 것부터 시작하려 한다. 그 비켜난 자리에서 나는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비로소 짐작한다. '나는 사색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들이 모여 이 책을 이루었다. 이것은 나의 생존 기록이자 살아갈 계획이다.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려 한다. 타인과 나를 같은 수직선 위에 세우는 대신, 차라리 선 밖으로 툭 떨어진 점 하나가 되고 싶다. 너무 가까워 놓치고 살았던 코끝의 숨처럼 나 자신 또한 너무 가까워 가장 멀었던 사람은 사람은 아니었는지.
친구의 문자에 뒤늦은 답장을 한다.
'아니, 이제야 겨우 살고 있어.'
작가 선언 | 엄민정 | 미다스북스(리틀미다스) - 예스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