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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밤 Aug 25. 2022

성실함도 재능이 될 수 있을까

효율의 시대, 아직도 선함과 진실함을 믿고 있다면

안녕, 나의 성실한 강아지풀


  성실함은 결국 빛을 발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선생님! 저희 여태까지 헤매다 왔어요!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어문 곳을 빙빙 돌고 돌았다며, 오랫만에 찾아온 교복 무리들은 인사도 잊은 채 한참을 재잘거렸다. 길만 건너면 되는데 그걸 모르고 쩌어-기 공원까지 갔다온 거 있죠. 길은 모르겠지, 날씨는 더워서 어질어질하지.. 저희 진짜 기절할뻔 했다니까요! 송골송골 방울땀이 맺힌 얼굴에 연신 부채질을 해가며 억울함을 토로하는 아이들의 입가엔 그래도 반가움의 미소가 넘실거렸다. 다 큰 줄 알았더니 아직 초딩이네. 시원한 거나 마시러 가자. '초딩'이라는 단어에 발끈하는 녀석들을 이끌고 골목대장 마냥 앞장섰다. 바람에 살랑이는 코스모스 같은 이 모습을 내가 참 예뻐했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그 중 R은 4년 전 가르쳤던 제자다. 살짝 까무잡잡하고 깡마른 체구에 헤실거리며 웃는 모습이 수수하고 정다운 강아지풀을 닮았다. 사실 그 당시엔 그리 눈에 띄는 편은 아니었다. 동양적이고 단정한 마스크에 수더분한 성격, 노력하는 것에 비해 다소 평이한 학업 성적과 적당히 무난한 또래관계. 그 무엇 하나 그리 뒤쳐지지도 유달리 튀지않는 무던하고 평범한 학생 정도였달까. 그런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무모해보일 정도의 성실함'이었다.


  R은 성실함에 있어서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자신이 감당 못할 수준의 과제여도 되든 안되든 끝까지 붙잡고 있었고, 작은 일도 늘 진심으로 대하며 우직하게 덤벼들었다. 모둠활동에 비협조적인 모둠원과 함께해야 할 때면 제 돈 주고 아이스크림 사먹여가며 동료들을 격려했고 그 결과 제법 그럴싸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한번은 그 작고 가녀린 골격으로 스포츠클럽 대회에 나가 시교육감 상을 받아오자 깜짝 놀라 담당 체육 선생님께 '얘가 그리 체력이 좋았나요?' 물었다. 체력이나 정신력이라기보단, 성실함이죠. 대수롭지 않아 하는 대답에 아 그렇죠, 하며 멋적게 뒷머리를 매만졌다.


  그렇게 희미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R은 어김 없이 해사한 미소를 넘실거리며 눈 앞에서 재잘거렸다. 언젠가 '이러다 얘가 잇속이 밝은 친구를 만나 이용당하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남모를 걱정을 해보기도 했는데, 중학교에 가서는 오히려 친구들을 잘 이끌고 반장도 줄곧 한다는 얘기를 듣자 무척이나 기뻤다.


  작지만 씩씩한 강아지풀을 닮은 녀석을 보니 한 화가가 떠올랐다. 성실함의 대가로 손꼽히는 국민 화가, 일찍이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에 감명을 받아 우리네 농민들의 토속적인 일상을 그려낸 '한국의 밀레'. 바로 박수근(1914-1965) 화백이다.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린 화가, 박수근


  누군가를 일컫어 '성실하다'고 할 때 어떤 부분을 들 수 있을까. 부지런하다? 착실하다? 사전에선 성실의 뜻을 '정성스럽고 참되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 빗대어 보았을 때 화가 박수근을 성실하다고 표현한다면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일 것이다.


  첫째로 그가 다루는 작품의 주제 기법이 정성스럽고 참되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볼 수 있으며, 둘째로는 그의 삶 자체가 성실함 그 자체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박수근 화백과 그의 가족 / 집(우물가), 1953


  박수근이 주로 다루는 주제는 특별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소박하고 보편적인 일상 즉, 작고 평범한 우리네 모습 그 자체이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판잣집,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그 곁에서 어린 동생을 업고 공기놀이를 하는 어린아이, 손과 머리에 짐을 이고 지고 길을 가다 큰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쉼을 청하는 여인과 근처 강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 이처럼 정겹고 푸근하지만 한편으론 애잔하면서도 평화로운 서민들의 모습을 담담히 화폭에 담아냈다.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화가의 염원이 담겨서일까?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친밀감과 향수는 왜인지 그리 낯설지 않다.

  

  한편 박수근이 주로 사용하는 표현 기법 또한 살가운 구석이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양구. 어려서부터 자라며 온몸으로 느끼고 교감했던 자연 속 화강암의 투박하지만 순박한 그 느낌을 화가는 온전히 구현했다. 먼저 캔버스 위에 물감을 적게는 4차례, 많게는 20차례 이상 여러 겹 두텁게 바른 뒤 굳으면 긁어내고, 그 위에 다시 물감을 올려 굳히는 과정을 반복하는 일종의 마티에르 기법을 사용하여 거친 재질을 만들어낸다. 그 위에 흰색, 회갈색, 황색과 같은 자연의 색을 덧입히고 검은색 물감으로 선을 그려 대상을 묘사한다.


농악, 1962 / (화강암 표면) 박수근의 그림을 살펴보면 화강암의 재질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처럼 그의 그림은 우둘투둘한 표면 위에 그려 넣은 것이기에 사실 형태를 첫 눈에 파악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숨을 죽이고 가만히 바라보다보면 왠지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 실루엣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어린 시절 시장에서 보았던 풍경, 공기놀이를 하다 문득 느껴지는 까끌거리는 흙의 느낌, 할머니집에서 맡았던 푸근한 밥 짓는 냄새와 같은 정겹고 수수한 추억의 잔상들이다. 얼핏 평범해보이는 박수근의 그림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화가의 강한 신념과 정성스러운 기법이 어우러져, 보면 볼수록 힘이 강하다.


  한편 박수근의 성품과 관련하여 작가 박완서와 얽힌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결혼 후 생계를 책임질 가정이 생긴 박수근은 생활고에 시달리던 차에 당시 미 8군 PX(지금은 신세계 백화점 본점 건물)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기념품점에서는 박완서가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박 작가가 미군을 대상으로 주문을 받아오면 박수근과 같은 이른바 '간판쟁이'들이 손수건 등에 초상화를 그려주는 식이었다.


박완서의 소설 <나목>과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알려진 박수근의 작품 <나무와 두 여인(1962)>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이후 오빠와 숙부까지 잃은 상황에서도 보란듯이 서울대 국문학과에 입학한 박완서였지만, 전쟁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 아침에 삶이 180도 바뀐 20살의 그녀를 압도한 것은 불행감과 모멸감. 그때문에 악착 같이 초상화 주문 끌어오는 일을 했고 자기 덕분에 먹고사는 화가들에겐 온갖 생색을 내며 매몰차게 굴었다고 수필 <박수근>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날 박수근이 가만히 다가와 자신의 화집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을 본 박완서는 깜짝 놀란다. 자신이 그토록 무시하던 별볼일 없는 간판쟁이 중에 진짜 화가가 있었다니. 박수근은 그저 수줍게 그림을 보여준 뒤 별다른 언급 없이 돌아갔고 그 뒤로도 조용히 자기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이 일은 박완서에게  큰 울림을 남긴다. 자신과 비슷하게 굴욕적인 처지에 있으면서도 어떤 흔들림이나 불행의식에 빠지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웠고, '내 불행에만 몰입했던 눈을 들어 남의 불행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그녀는 훗날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나목>을 집필하게 되고, 소설 후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박수근은) 1·4 후퇴 후의 암담한 불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나. 생각하기 따라서는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의 모습을 증언하고 싶은 생각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 박완서, <나목> 후기 中




성실함도 재능이 될 수 있을까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은 자신의 아버지를 두고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을 사신 분'이라고 평했다. 아침에 일어나 요강을 비우고 이불을 갠 뒤엔 간단한 청소. 이후 아침을 먹고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그림을 그리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삶을 살았던 아버지인데 어느 순간 '우리의 화가 박수근'이 되어 있더라고. 이처럼 특별할 것 없는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며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그의 일생을 살펴보며, 성실함에 대해 재정의를 내려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따금씩 성실함이 미덕으로 여겨지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우직함은 미련함으로, 정성스러움은 어수룩함로 치환되는 시대다. 우직하게 한 분야를 들이파고 작은 일에 진심을 다하는 이보다는, 효율적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어필하고 홍보할 줄 아는 사람이 더 빨리 인정받는 요즘이다.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당연하겠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이따금씩 흔들릴 때가 있다. 이게 맞긴 한 건가.. 성실함은, 선함과 진실함은 정말 세상을 이길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그러면 반드시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과연 힘있게 내세워 말할 수 있나. 막연하던 가운데 만난 박수근의 그림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나의 마음을 녹진히 어루만져주었다.


  일찍이 습작을 많이 하고 독학으로 스케치와 데생 연습을 꾸준히하여 기본기가 탄탄한 화가. 이를 바탕으로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낸 화가. 물건을 살 때는 큰 상점보다는 노상의 손수레나 광주리 장사에게서 사며 그들의 모습을 담담히 그림에 담았던 화가. 그렇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며 작품 활동에 했던 화가. '우리의 화가 박수근'을 만든 건 특별한 게 아니었다. 성실함 그 자체였다.


박수근, 고목, 1961


  성실함은 재능이 될 수 있을까. 재능이라 인정받아 마땅할까. 오랫만에 멋지게 성장해 눈 앞에 나타난 R과 박수근을 번갈아 되새기며 '어쩌면 그럴 지도 몰라'하고 나직이 내뱉었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요즘은 성실함으로 삶을 일궈나간 사람을 만나면 마치 '기적' 같아서 반갑고 기쁘다. 성실함이라는 삶의 가치가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너도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얘기해주는 것 같아서 무척이나 격려가 된다. 잠시나마 그걸 잊고 살았던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워지지만, 그건 대(大)작가 박완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아무렴 어떤가.


  '진실하게 살려고 애썼다. 또 나의 고난의 길에서 인내력을 길렀다.'라고 고백하는 어느 거목의 그림을 보며 그래도 시련의 순간들을 감내해보자고, 성실함이 빛을 발하기까지 눈 앞의 주어진 삶에 매진해보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렇게 다짐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준 나의 '성실한 강아지풀'에게 고마움을 담아 이 글을 마친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 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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