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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밤 Dec 18. 2022

책방과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선물"

  'ㅇ' 책방 사장님께

 

  책방에서의 독서 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엔 언제나 만족스러운 포만감에 휩싸입니다. 결이 맞는 사람들과 어울려 책과 취향에 대해 한껏 대화한다는 게 일상에 얼마나 큰 활력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기분 좋은 영혼의 배부름 뒤엔 약간의 식곤증이 따라오기도 합니다. 풍성한 양질의 담소와 그 안에서 건진 영감을 소화하기엔 아직 제 깜냥이 미약해서, 집에 돌아오면 과부하된 상태로 침대에 누워 한동안 대화들을 곱씹습니다. 오늘은 이런 주제에 대해 나눴지. 이런 인사이트를 얻었네. 생각한 것과 깨달은 것들을 정리하다 보면, 나 홀로 외로운 독서 후 책을 덮었을 땐 결코 알 수 없었던 새로운 페이지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아마도 독서 모임의 묘미 아닐런지요.


  처음 'ㅇ' 책방 독서 모임을 알게 되었을 때, ‘나 이 모임 꼭 해야 할 것 같아’ 하는 강렬하고도 절박한 심정이 되었습니다. 왜 살면서 그럴 때가 있잖아요. 무언가 강렬한 예감이 뒤통수를 때리고 가는 듯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요. 지금 반드시 이걸 잡아야만 할 것 같은, 그렇지 않으면 무던히도 후회할 것 같은 촉이랄까 육감 같은 것 말입니다. 그래서 모집이 마감되었음에도 참석이 가능한지 머뭇머뭇 연락을 넣었는데 다행히도 이렇게 함께할 수 있게 되었네요. 사실 원래의 저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행동이었는데요. 이상하게도 그땐 되든 안되든 용기 내어 문을 두드려봐야겠단 생각이 드는 겁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아찔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격주 토요일마다 책방 책상에서 쬐는 오전의 햇살과, 고소한 커피 향 사이로 도란도란 번지는 대화, 모임을 통해 알고 읽게 된(모임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수도 있는) 믿음직하고 정겨운 여러 권의 책들을 절대 경험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래서 사장님께 언젠가 한 번은 꼭 감사 인사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모임을, 이러한 공간을 영글어가 주신 것에 대해서요.



  아참, 크리스마스 책 마니또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이번 모임에서 우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책 마니또가 되어 자신이 뽑은 비밀 친구를 위한 책 한 권씩을 준비했습니다. 사실 우린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저 한 달에 두어 번 만나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헤어지는, 긴밀하면서도 느슨한 관계니까요. 하지만 책에 얽힌 그 촘촘한 대화들 사이로 서로의 취향, 삶에 대한 태도를 어슴푸레 짐작할 수는 있었어요. 그 실루엣을 더듬어 누군가를 위한 책을 고르고, 초록 트리와 빨간 산타 일러스트가 알록달록 박혀있는 포장지로 정성껏 싸매며, 혹여나 이 책을 읽진 않았을까? 과연 마음에 들어 할까? 하는 즐거운 고민으로 2주를 보냈습니다. 다행히 모두가 책 마니또의 선물을 유쾌히 받았고, 우리는 산타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넉넉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당일보다 그날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이 시기가 더 설레듯이, 받는 기쁨보다 역시나 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걸 느끼며 또 하나의 훈훈한 기억을 공유했지요.


  그러다 문득, 이 모든 게 '크리스마스 선물'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요. 태어나고 자란 고향으로 10년 만에 돌아왔지만, 이 익숙하고도 낯선 도시에 마음을 붙이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은 날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서의 새삼스런 생활에 발 붙이지 못한 채 부유하는 밤에는 그리움과 공허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 바다 위 부표처럼 둥둥 떠다니던 찰나에 시작된 독서 모임. 그것은 하나의 작은 구심점이 되었고 특별한 이벤트는 어느새 친근한 일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사이 헛발질하던 두 다리는 중력장에 들어서서 작금의 삶을 단단히 딛고 적응의 뿌리를 내렸고요. 그 모든 과정들 사이사이에 간간이 존재했던 독서 모임에서의 시간들은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반갑고 다정했습니다. 그래서 내년에도 그리고 내후년에도,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쌓인 선물을 하나씩 풀어보는 두근거림을 안고 모임에서 만나길 고대합니다. 오래오래, 그리고 쭈-욱.


  언젠가 사장님을 두고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지요. 그건 다시 말해 '꼭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이라는 뜻일 겁니다. 상대방을 맞춰주려 없는 말로 꾸며 말하지 않고, 되려 필요한 때에 적확한 단어와 문장으로 요긴한 알맹이를 전달하는. 당신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대하기 어렵다 싶으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진솔하고 인간적인 존재라고 여겨요. 지금처럼 스스로가 글로 쓰고 싶은 것과 써야 하는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 할 때도,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책방을 꾸려나갈지 혼란하고 망설여지는 순간조차도 이토록 담백하게 솔직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삶에 대해 꾸준하게 성실하며 진심인. 그런 사람. 전 그게 참 쉽지 않다고, 그래서 멋있다고 느낍니다.(그렇지 못한 사람도 사실 많다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사장님이 조만간 세상에 내보일 첫 책도, 몇 달간의 겨울방학 뒤 다시 오픈하게 될 앞으로의 책방 운영도 잠잠한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는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어떤 모양새든 어떠한 형태든 전 분명 지지하고 응원하고 싶어질 테니까요.


  춥고도 지난한 계절입니다. 차갑고 캄캄한 걸 유독 싫어하는 저로서는 겨울이라는 녀석이 도통 맘에 차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뾰로통한 표정으로 한 계절을 보낼 수만은 없기에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며 시간을 때웁니다. 붕어빵과 귤, 폭닥한 스웨터, 겨울 하면 생각나는 몇몇 영화들과 크리스마스 트리. 요정도만 그려봐도 마음에 훈김이 물씬 돕니다. 혹 사장님께도 그런 온기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있는지요. 이번 겨울엔 이 편지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하길 바라봅니다.


  작은 마음을 담은 조그만 선물에 편지를 동봉합니다. 당신이 똑단발 한쪽을 귀 뒤로 넘기며 이 편지를 읽을 때쯤, 창밖엔 소복한 첫눈이 내리고 책방 안엔 캐롤이, 그리고 발 밑엔 뜨끈한 난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그 정도면 혹독한 겨울도 무리 없이 견딜 수 있을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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