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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섭 Jan 31. 2024

방글라데시 귀환 이주노동자를 만나는 길 (2024)

0. 2023년 8월 3일, 16년 만의 만남

2007년 마석가구공단 이주노동자 진료소에서 이정호 신부님, 의과대학 후배들과 (위), 2023년 남양주 이주민연대 샬롬의 집에서 이정호 신부님, 서울대 연구실 학생들과 (아래)


윗 사진은 2007년 마석가구공단 이주노동자 진료소이고, 아래 사진은 2023년 남양주 이주민연대 샬롬의집이다. 


마석 이주노동자 진료소는 2주에 한 번씩 학생들이 가서 밤늦은 시간까지 진료하고 1박 2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학생시절부터 동아리 활동에 간간히 참여하다가, 졸업한 다음에는 진료소에 갈 의사가 없을 때는 급하게 가서 환자를 보기도 했었다. 그럴 때면, 이주노동자들과 친구처럼 지내며 꾸준하고 넉넉하게 현장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분이 계셨다. 성공회 이정호 신부님이셨다.


신부님께서는 몇 년 전 사제로서 일을 마무리하고 은퇴하셨다고 알고 있었다.  남양주 샬롬의집을 찾아가 미등록/제조업 이주 노동자에 대해 어떤 연구를 해야 할 지에 대해 미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신부님이 출근하셨다. 신부님은 아직도 사무실에 나오고 계셨고 활동하고 계셨다. 16년 만에 만난 신부님께 인사를 드리고, 그때 진료봉사를 오던 의대생이었다고 말씀드리며 위 사진을 보여드리면서 감사했다고 말씀드렸다. 신부님이 일구어 내셨던 현장에서의 경험이 제가 성장할 수 있는 뿌리가 되었다고. 이주노동자 건강 연구를 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찾아왔다고, 오랫동안 천천히 쉬지 않고 연구하겠다고 약속드렸다.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1. 방글라데시 캠프 출발 10일 전

내일은 연구실 석사과정 학생, 통역자와 함께 하루 동안 경기도를 돌며, 한국에서 일하다 다쳤던 세 명의 이주노동자를 만나 그들의 산업재해 경험을 기록하는 질적 연구를 진행한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저임금 노동을 비정규직에게 떠넘기는 '위험의 외주화' 끝에는, '위험의 이주화'가 있다. 노동법과 사회보장의 사각지대에서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은 가장 위험한 작업환경에서 가장 저렴한 임금을 받고 일한다.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과 건강 연구는 기본적으로 행정 자료를 이용하기 어렵다. 건강보험 데이터로 그들의 병원 이용 기록을 확인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아플 때 병원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경제적, 심리적, 물리적(거리, 교통수단) 장벽에 언어적 장벽이 보태져서 그들은 아파도 참고 일한다. 그래서, 그들의 병원 진료 기록은 얼마나 몸이 아팠는가를 보여주기보다는, 누가 얼마나 아플 때 병원에 갈 수 있었는가를 반영한다. 이주 노동자의 노동과 건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발로 뛰면서 만나 데이터를 수집해야 한다. 


네팔, 방글라데시, 베트남 등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의 산업재해 경험으로 논문을 함께 쓰고 있는 연구실 학생이 몇 주 전 내게 말했다. 


"교수님, 인터뷰 참여자 섭외가 잘 안 돼요. 매주 주말마다 이주노동자 관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인사도 하러 다니고 얼굴도 비추는데, 어떨 때는 한 마디도 못 건네고 뻘쭘하게 있다가 와요."


학생에게 아주 잘하고 있다고 했다. 그 어색한, 긴장의 시간을 꼭 경험하길 바랐다고. 데이터가 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 연구라는 것을 해보기 위한 고군분투의 경험을 하는 것은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연구를 하는 이에게 꼭 필요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건너뛴다고 해서 좋은 학술지에 논문을 못 내는 것은 아니지만, 몸으로 겪은 그 경험들이 작성한 논문으로부터 스스로가 소외되는 일을 막아준다고 말했다.


1월 말에는 남양주샬롬의 집과 함께 방글라데시를 직접 찾아가, 한국에서 일하다가 산업재해를 겪고 조국으로 돌아간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해 보려고 한다. 한국에서 일하다 다친 몸과 마음을 그들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어떻게 감당하고 또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한국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연구하면 예상했던 것보다 건강한 경우가 많다. 이주노동자들은 건강해야만 한국에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해야 이주해서 한국에 들어올 수 있고, 건강한 상태로 남아있어야 '쓸모 있는' 노동력으로 인정받아 추방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적 수준의 건강 노동자 효과(Healthy Worker Effect)'인 것이다. 특정한 시기의 조사만으로는 그들의 몸을 잘못 해석하기 쉽다. 왜 어떻게 한국에서 이주 노동을 하게 되었고, 또 왜 어떻게 이주 노동을 그만두고 조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지에 대해 질문하지 않으면,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건강하고 튼튼하다'는 식으로 생각을 할 수 있다. 실은 '건강하고 튼튼하지 않으면 일할 자격이 박탈된다'는게 보다 현실에 가깝다. 


2024년은 2004년 8월 17일 실시된 고용허가제가 20년이 되는 해이다. 인구 감소에 대한 대책으로 '우수한' 이주민들을 들여오겠다는 정책이 국가 공식정책으로 논의되는 상황에서, 이 연구는 이주민의 목소리를 통해서 지난 20년간 우리는 누구였고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2023 세계이주노동자의 남 기념대회에서 이주노동자 산업재해를 연구하는 서울대 연구실 학생과 함께 (2023년 12월 17일)


2. 방글라데시 국제협력캠프 출발 하루 전

내일 방글라데시로 간다. 8일가량 머물며, 한국에서 일하다가 돌아간 이주노동자들의 가정과 사업장 등을 방문한다. 2000년대 초반 마석 가구공단에서 일하며, 내가 의과대학 학생으로 참여했던 이주민 진료소에서 진료를 받았던 노동자들이라고 한다. 20대에 한국에 와서 일했던 그들이 이제 40, 50대가 되어 본국에서 살고 있다. 그 사이 나도 40대 중반의 연구자가 되었다. 


귀환한 이주노동자의 가정집에 주로 머물 예정이라고 했다. 낮에는 20도, 밤에는 13도 정도 되는 날씨지만, 보일러도, 온수도 없는 곳에서 생활을 한다. 내게는 낯선 숙소 환경이나 황열이나 말라리아보다도 어떻게든 에너지를 끌어올리려 하지만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몸과 마음이 더 걱정이다. 



3. 고통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다. 

이주민 단체에서 상근하고 있는 한 활동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세계 이주민의 날'에 정부 관계자분들과 함께 하는 행사에, 한국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미얀마 노동자를 초청해 이야기를 들었다. 활동가는 그 이주노동자가 한국에서 겪은 차별과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해 주리라 생각했는데, 마이크를 잡은 이주노동자는 "한국이 자신에게 준 기회에 대해 깊게 감사한다."는 말을 했다. 


평소 그 이주노동자가 겪었던 고통에 대해 잘 알고 있던 활동가는 그 말을 들으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당연하다. 196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민한 한국인이 온갖 어려움과 차별을 견디며 하루하루 일하다가 미국 정부가 마련한 이주민의 날에 초청받아 마이크를 손에 쥐게 된다면,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까. 


고통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다. 


4. "납득이 되었다"

며칠 전 연구를 위해 만났던 베트남 노동자는 5년 가까이 경기도 광주의 한 공장에서 일을 했다. 워낙 성실했던 그는 사장님과의 관계도 좋았다고 한다. 그가 결혼을 할 때, 사장이 베트남에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왔을 정도였다. E-9 비자로 일하는 기간이 끝나고, 그는 성실외국인근로자(재입국 제도) 제도로 다시 한국에 와서 같은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경기가 나빠지자 3명이 일하던 사업장에서 2명이 일을 그만두었고 홀로 모든 일을 맡아해야 했다. 결국 그동안 한 번도 안 해오던 옷감 운반 일을 맡아하다가 점점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고, 허리디스크(요추간판탈출증) 진단을 받았다. 사장과의 관계도 점점 악화됐다. 사장은 허리가 그 정도로 아픈 것은 심각한 게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자는 일을 할수록 몸이 악화되는 게 보였고 일하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다가 같은 일을 더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사장은 태업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결국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를 찾아가 산업재해 신청을 했다. 


그러나, 불승인이 났다. 허리디스크는 누적 외상성 질환인지라 최소 몇 년간 유해인자에 노출되었다는 기록이 행정적으로 필요한데, 바뀐 작업환경에서 일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질병이 시작되었으니까. 공단에 찾아갔더니, 허리디스크는 워낙 흔하고 나이 들면서 생겨나는 경우가 많아, 한국노동자들도 보통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직원이 이야기했다. 그에게 일하다 다쳤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억울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는 답했다. 


"납득이 되었다. 그런 상황이면 이주노동자인 나는 당연히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하는 거니까. 어쨌든 작업장을 옮기게 되어 허리가 더 나빠지지 않는 곳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만족한다."


5. 말하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고통 

휠체어 장애인의 이동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는 일 자체가 아니라, 이동하지 못해 교육을 받지 못하고 일하지 못하고 투표하지 못하고 연인을 만날 수 없는, 그렇게 삶의 가능성이 제약받고 침해당하는 과정을 탐구하려 했다. 

그런데, 태어나고 자란 모든 무대가 항상 차별적이었던 상황에서, 그 너머의 상황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던 이들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가져본 적이 없었고 그 가능성을 누린다는 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기회가 없었기에, 자신이 마땅히 누렸어야 하는 가능성에 대해 말할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 특히 시설에 오래 머물다 나온 이들은 더욱 그러했다. 


"어디 가서 뭘 혼자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못하고, 안 했던 것 같아요"


어떤 고통은 말하기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 부당함을 인지하고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걸까. 


6. 인간은 고통 속에서도 길을 찾아간다는 사실

인간의 삶을 보다 깊게, 다층적으로, 대상화하지 않으며 이해하기 위해서 연구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차별 속에서 고통받지만, 그 차별이 존재자체를 잠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 고통을 품고도 인간은 관계를 맺고 길을 찾고 나아간다는 사실을 연구는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7. 새것 같은 중고 휴대폰

인천 공항이다. 각자의 배낭에 짐을 하나씩 더 넣을 수 있냐고 해서, 가능하다고 말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조국의 가족에게 보내는 새것 같은 중고 핸드폰이었다. 방글라데시로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이, 돌아가면 한국에 다시 올 수 없는 이들이 조국의 가족들에게 보내는 선물이다.


우편을 통해 배달하면 안심하기도 어렵고 시골의 가족에게 그 물건이 온전히 전달될지 두려운 이들이 샬롬의 집 활동가들을 통해 선물을 전달한다. 핸드폰을 준비했던 한국의 이주노동자는 기뻐할 가족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고, 며칠 뒤 선물을 받게 될 방글라데시의 사람들은 한국에서 노동하는 자신의 가족을 생각할 것이다.


그 두 시간 사이에, 지금은 그 선물이 내 가방 안에 있다.


방글라데시 다카의 샤잘랄 공항(Hazrat Shahjalal International Airport) 도착 (2023년 1월 22일)


8. “교수님, 방글라데시를 이렇게 활용하는 것은 괜찮은 건가요?" 

건강불평등 연구의 역사를 공부하다가 방글라데시를 만난 적이 있다. 1990년 뉴잉글랜드의학저널(NEJM)에 출판된 <할렘 지역의 초과사망 (Excess Mortality in Harlem)> 논문이었다. 미국이 급격한 경제성장을 하며 전 국민 사망률이 가파르게 감소하던 1960년-1980년, 할렘의 사망률이 오히려 증가했다. 거주민의 96%가 흑인이었고 뉴욕에서도 가장 위험한 우범지역으로 알려진 할렘은 미국 내의 섬과 같은 존재였다. 


콜린 맥코드(Colin McCord) 박사 연구팀은 1980년의 미국 백인 사망률을 기준으로 삼아, 할렘지역의 초과사망이 어느 나이대에서 어느 이유로 발생하는 지를 검토한다. 그 결과 25-54세에서 할렘의 사망률은 미국백인 사망률에 비해 3.28-5.98배 높게 나타났고, 그 초과사망에 기여한 질병은 심장병, 간경화, 타살, 암, 약물중독, 당뇨, 알코올중독 순이었다. 나머지 원인도 다르지 않지만, 간경화/타살/약물중독/알코올중독은 명백히 생활습관, 거주지역의 안전과 닿아있는 예방 가능한 이유였다. 사회적 환경의 차이가 사망률의 차이로 이어졌다. 


그리고 논문은 할렘지역 건강불평등의 심각성을 보다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외국에서 비교집단을 가져온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널리 알려졌던, 1980년 당시 1인당 GDP가 227달러에 불과했던 방글라데시였다. 미국의 백인, 할렘지역의 주민, 그리고 방글라데시인, 이렇게 3집단을 비교한 표가 아래 그림이다. 


최소한의 의료시설이 부재하고 영양실조에 시달리던 방글라데시에서 미국보다 영유아 사망률이 높은 것은 놀랍지 않다. 그런데, 영유아 시기 압도적인 높은 사망률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경우 55세까지 살아남을 확률은 방글라데시인이 할렘의 사람들보다 10%가량 높았다. 영유아 시기 사망률 차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20살 이후 급격히 증가하는 사망률 때문이었다. 


당시 이 논문은 세계 최강대국으로 불리는 미국의 국민 중에는 세계 최빈국의 사람들보다 더 빨리 죽는 이들이 있다는 결과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연구를 출판했다. 의학에서 가장 저명한 학술지인 뉴잉글랜드의학저널이 이 논문을 출판하기로 결정했던 것도 그 충격적인 함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논문은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연구자들에게 많이 읽히고 또 꾸준히 인용되었다. 


그런데, 작년에 연구실에서 이 논문을 읽고 논의할 때, 평화운동을 오랫동안 해온 박사과정 학생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교수님, 제가 연구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일지 모르지만, 방글라데시를 이렇게 활용하는 것은 괜찮은 건가요?"


미국의 건강불평등이 이렇게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가장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나라를 비교집단을 삼아, 우리가 심지어 그들보다도 더 심각한 상태다라고 보여주는 것은 괜찮냐는 질문이었다. 물론 저자들은 논문에서 방글라데시를 폄하하거나 비난하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양적 연구의 특성상 결과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비교집단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한다. 


그런데, 반대로 미국의 자리에서 방글라데시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방글라데시에서 미국을 바라봤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다르지 않았을까. 결국 어느 위치에서 바라보는가, 누가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있고 어떤 이유로 말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 아닌가. 내가 1990년 이 논문을 출판하는 연구자라면 과연 다른 선택을 했을까. 난 아직도 그 학생 질문에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9. 환대란 무엇인가.

방글라데시 다카의 샤잘랄 공항(Hazrat Shahjalal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한 것은 현지 시각으로 밤 12시, 한국시간으로 새벽 3시였다. 한국에서 일했던 방글라데시 노동자들 8명이 공항에 나와 있었다. 이정호 신부님과 포옹을 하며 기뻐하다가, 이내 서로 농을 주고받는다. 배가 왜 이리 나왔냐, 이래 가지고 선물로 사 온 옷 입을 수는 입겠냐.


한국에서 일했던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모임인 KBFS(Korean Bangladesh Friendship Society) 사무실에 멤버들이 모두 모인 것은 현지 시간으로 새벽 1시였다. 


신부님은 코로나로 인해 지난 몇 년간 못 봤는데 공항에서 손을 흔드는 비두 씨를 보자 이게 꿈인가 싶어 울컥했다고 말했고,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은 눈망울이 생글생글한 눈으로 신부님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코로나19 때 방글라데시에서 노인들이 자꾸 죽어나가는 것을 보며 신부님을 걱정했었다고 말했다. 신부님이 감염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다 같이 모여서 기도했었다고.


신부님과 샬롬의 집이 쌓아온 20년이 넘는 세월 위에서 이 만남이 이루어지는구나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 이토록 만남의 감정이 두터울 수는 없으리라. 보일러도 난방기구도 없기에 바닥이 차가워 담요를 깔고 둘러앉은 방에서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 담요 한가운데에는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배가 고플까 봐 그들이 준비해 준 찐 감자가 있었다. 


환대란 무엇인가.

다카의 미르풀 센터에서 새벽 1시에 만난 찐 감자


10. 가장 고통스러운 이들은 홀로 견디고 있다.

동네 시장 끝 강에 닿아있는 작은 건물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라집은 마석과 하남 등지의 가구공장에서 7년을 일했던 노동자였는데, 그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였다. 한국에서 우리가 자신을 찾아와 인터뷰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자랑스러웠는지, 함께 온 어린 아들에게 핸드폰을 건네며 인터뷰하는 장면을 계속 사진에 담게 했다. 


그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사이의 수술자국을 보여주며 마석 가구공장에서 톱날에 크게 찢긴 적이 있는데, 철심도 박았다고 말했다. 수술을 하고 두 달 동안 일을 못했는데, 사장이 매월 150만 원의 월급을 줬고 치료가 끝나고 돌아가서는 일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산재보험에 대해 알고 있었냐고 묻자, 몰랐다고 말했다. 사장은 자신에게 욕을 한 적이 없었다. 한국이 그립다고 말했다.


통기바리 지역에서 작은 가구공장을 운영하며 지내는 라집은 한국에서 보낸 시간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운영하는 작업장에는 14, 15살 남자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일을 하지 않으면, 국가가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가족은 생계를 꾸릴 길이 없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아동노동은 쉽지 않은 주제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로 10대 후반, 20대 초반 한국으로 건너와 노동을 했던 이주 노동자들은 생활력이 강하고 자기 통제가 뛰어난 친구들이 많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국가를 떠나 한마디 말도 모르는 타국으로 가서 몇  년씩 일을 하는 과정을 감당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에 방글라데시에 함께 온 한국에서 활동하는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있다. 그는 한국에서도 활달한 편이었지만, 방글라데시에서 자신이 편안한 언어와 사람들 사이에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할 때는 분위기의 결이 다르다. 상대방을 외려 압도하는 카리스마, 일이 되게 만드는 추진력 같은 것이 있다. 부딪치면 물러설 생각이 없다. 그만이 아니라, 방글라데시에서 만난 귀환 노동자들 중 상당수가 방글라데시에서 그러하다. 


둘째로, 피해자/생존자 인터뷰를 진행할 때면 매번 발생하는 어찌하기 어려운 선택 편향이 있다. 세월호 생존 학생,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천안함 생존장병 연구 모두에서 그러했다. 가장 고통받고 있는 이들은 조직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홀로 견디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연락이 닿지 않고 또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려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일하다 다쳤던 이주 노동자들 중 가장 가혹한 시간을 보냈던 이들은 죽었거나, 심각한 장애가 생겨서 집 밖으로 나오기 어렵거나, 혹은 트라우마로 인해 한국 사람은 만나고 싶지도 않고 자신의 경험은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산업재해를 경험한 귀환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은 그 세 범주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11. 운전, 식사, 코코넛 그리고 까마귀

- 나는 이곳에서는 운전을 할 자신이 없다. 내 기억이 맞다면, 신호등을 본 적이 없고 설사 신호등이 있더라도 누구도 지키지 않는 게 분명하다. 모든 길에서 모든 방면에서 차와 사람은 언제든 끼어드는데  그게 당연하다. 시장 근처에서는 거의 5초마다 경적을 울리는 데, 한국에서 내가 운전을 했으면 가슴을 쓸어내렸을 장면이 쉼 없이 계속된다. 이것도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운전하다가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어차피 보험이 없기 때문에 서로 욕하고 싸우다가 헤어진다고 했다.

- 길에서 아이를 안고서 구걸을 하거나 물건을 파는 사람이 있었는데,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말하길 저런 아이를 대여해 주는 업체도 있다고 했다. 아이를 받아 약을 먹여서 재운 채로 품에 안고서 구걸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업체는 커미션을 받는다고 했다. 


- 계속 방글라데시 가정식으로 식사를 하는데, 이곳 노동자들은 오른손으로 식사를 한다. 나도 방글라데시 식으로 시도를 해보려 했는데, 엄두를 못 내고 젓가락을 사용하기로 했다. 오른손으로 잘 흩어지는 쌀을 모아 뭉친 다음에 포클레인처럼 걷어 올려 입으로 올리는 과정이 실은 매우 숙달이 필요한 작업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 코코넛을 그 자리에서 잘라 빨대를 꽂아 주는데 고속도로 노점상이 잘라주는 코코넛 음료는 느끼하더니, 오늘 방문한 센터에 직원분이 시장에서 구해와 건네준 코코넛 음료수는 담백하고 시원했다. 코코넛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코코넛 열매의 신선도가 달랐던 것이다. 


- 내일모레 귀환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합창을 하도록 되어 있어서, 어젯밤 첫 연습을 시작했다. 노래는 <상록수>다. 어렵사리 연습을 마치고 나서, 몇몇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다른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였다. 이른 아침에/잠에서 깨어. 목청껏 부르는데, 이들에게 그 노래는 자신의 청춘을 견디게 해 준 노래겠구나 싶었다. 20대를 한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보내며, 수없이 듣고 불렀을 노래일 테니. 이 날 언급된 또 다른 노래는 SES의 <Dreams Come True>였다. 


- 오랜 인연을 맺은 귀환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움직이고 샬롬의 집 분들 역시 방글라데시에 이런 행사로 온 게 벌써 5번째이다 보니, 혼자 왔다면 가볼 엄두도 못 낼 빈민촌의 구석구석을 함께 다니게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빈민촌을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만나는 거의 모든 집이 아슬아슬한 지붕과 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 아침에 숙소 유리창으로 뭐가 계속 강하게 부딪쳐와 무슨 일인가 하고 봤더니, 거대한 까마귀가 유리창을 계속 치고 있었다. 유리창으로 인해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이는데, 그게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다른 까마귀라고 생각한 게다. 녀석도 아플 것 같아, 플라스틱 의자를 바닥에 눕혀 놨는데, 하늘을 날면서 까지 유리창을 공격한다.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그 모습이 어떤 비유를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의 환영과 싸우는 존재.


12. 안개, 렁기, 그리고 아이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공격하는 까마귀가 부리로 스스로를 계속 쪼아대자, 방을 같이 쓰는 KBFS 회장 비두가 창문을 살짝 열더니 까마귀를 손으로 잡아 저 멀리 날려 보냈다. 과연 녀석은 이 과정을 학습하고 다시 안 돌아올 것인가. 내일 아침에는 좀 더 늦게 일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일도 해가 떴다는 사실을 숙소를 공격하는 까마귀 소리로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창문을 열면 안개가 자욱한 풍경이다. 숲과 안개가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답지만, 2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빨래가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운전할 때 전방으로 보이는 거리가 짧다는 것이다. 어제 아침에 속옷을 빨아 널어두었는데, 이게 마르는 것인지 아니면 공기 중 습기를 흡수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 옷이 제습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방글라데시 남성들은 위에는 셔츠를 아래에는 치마처럼 두르는 렁기(Lungi)를 입는다. 그 치마가 편하냐는 질문에, 그 옷은 방글라데시의 기후와 닿아 있다고 했다. 물가를 건너는 다리가 거의 없고 비가 오면 언제든 다시 길이 잠기는 상황 때문이라는 것이다. 렁기는 다리를 걷어 올리고 물속에 발을 담그고 건너기가 용이하니까. 


어디를 가건 아이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고 싶어 한다. 외국인이 이 방글라데시 시골마을에 오는 경우가 드물 뿐 아니라,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단체로 옷을 맞춰 입고 관광객이라면 잘 오지 않을 지역을 찾아가니까. 다만, 아이들 중에는 핸드폰을 가진 경우가 없어서, 우리 팀 사람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게 된다. 아이들은 그 사진을 소유하지 못하는데도, 사진을 찍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듯하다. 방글라데시 아이들은 눈이 크고 눈망울이 생글생글해서인지, 다들 참 예쁘다.


13. 이주노동자 비두: 강제 추방, 명상, 변화

2000년대 초반 이주노동자 인권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이름이 있다. 방글라데시 출신의 이주노동자 비두. 그는 10대 후반에 한국에 와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마석 가구공단에서 일을 했고, 한국 이주노동자 인권운동의 중요한 변곡적이었던 2002년 진행된 명동성당 77일 농성에 참여했다. 당시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민 노동운동의 핵심 인물이기도 했던 그는 2003년 10월 26일 전국비정규직 대회에서 강제로 연행되었다. 그때 비두의 나이는 29살이었다. 


연행당하는 과정에서 그가 외쳤다. “나 권리 있어, 나 이 나라에 말할 권리 있어”. 그 과정은 최종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아직도, 우리는 이주노동자다> (2018)에 생생히 담겨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항의 집회에 함께 했지만, 그는 결국 출입국 관리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2004년 1월 강제 추방되었다. 정부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를 테러리스트로 취급했다. 


당시 마석 가구공단에서 연세대 진료 동아리는 격주로 이주 노동자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동아리 활동에 간간히 참여하던 나도 아마도 그를 만난 적이 있었으리라. 우리가 둘 모두 20대였던 때였다. 2003년 그가 짐승 끌려가듯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본과 3학년 산부인과 실습을 돌고 있었다. 


20년이 지나 2024년 ‘샬롬의 집’에서 진행하는 방글라데시 캠프에서 비두를 만났다. 그가 내 룸메이트였다. 비두는 한국에서 추방되어 돌아간 뒤, 2004년 방글라데시 통기바리 지역에서 BPS(Bangladesh Patriot Society)라는 NGO 단체를 만들어, 빈곤층 교육 지원, 재난 피해자 지원을 비롯한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한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었다. 방글라데시에서 그와 나눈 문답을 소개한다. 


Q: 사람들은 여전히 2003년 폭력적으로 연행되던 20대 비두를 기억한다. 그로부터 20년이 넘게 지났다. 한국은 당신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곳 아니었나?

A: 월급을 못 받고, 사장이 때리고 욕을 하고, 이런 거는 시간이 지나면서 잊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강제로 연행이 되고 나서부터 기억은 오랫동안 고통스러웠다. 팔을 뒤로 묶은 상태로 물을 먹어야 했는데, 내게 자신들이 입에 물을 넣어줄 테니 먹으라고 했다. 나는 동물이 아니다고 말하며, 내 손으로 물을 먹게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3시간을 버텨서 물을 처음 먹었다. 그리고 경찰이 나를 밤늦게 데리고 갔던 기억은 너무 힘들었다.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었을 때, 산에 너를 죽여서 묻어 버리려고 한다고 말했었다. 


Q: 2004년 강제로 추방되어 방글라데시로 왔을 때도 많이 힘들었다고 들었다.

A: 한국 정부가 나를 테러리스트처럼 여기며 추방을 했고, 방글라데시로 돌아와서도 며칠 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내가 했던 활동은 ‘이주노동자도 인간이다’는 이야기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추방되어 돌아오자 방글라데시 언론이나 한국으로 가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방글라데시의 젊은이들이 비난을 했다. 나는 아직도 법적으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


Q: 그런데, 20년 만에 만난 당신의 표정이 평화롭고 밝아 다행이면서도 놀라웠다. 어떻게 견디었나?

A: 명상을 했다. 마음속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명상을 통해 내 몸 밖으로 내보내려고 계속 애를 썼다. 고통을 그렇게 계속 안고 있으면, 인간은 견딜 수 없다. 20년 전 한국에서 함께 활동을 했던 네팔 친구는 결국 그 과정을 겪다가 미쳐버렸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명상을 했다. 


Q: 그런 당신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샬롬의 집, 특히 이정호 신부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한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화가 났을 수 있는데. BPS라는 지역 인권 단체를 만들어, 샬롬의 집과 여러 일을 함께 하고 있다. 


A: 신부님은 나를 바꾼 사람이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갔다. 그런데, 한국에서 신부님을 만나 많은 걸 배웠다. “우리는 대등하다.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잘 살아야 한다.” 신부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것들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2002년 명동성당 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비두 (오른쪽) 사진 출처 (http://m.cine21.com/news/view/?mag_id=76858)


14. 가정 노동자의 산업재해 위험요인

오늘은 '한국의 날'이어서 우리 팀이 한국음식을 준비해 지역 주민분들께 대접하는 날이었다. 특히 신부님을 보고 싶어 하는 방글라데시노동자들은 통기바리 지역으로 300KM가 넘는 거리를 운전해서 찾아오기도 했다. 남양주 마석가구공단 출신의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Reunion 이벤트이기도 했다. 


지역 주민들도 다 모이기에, 150명은 먹을 수 있도록  닭볶음탕, 김밥, 미역국, 계란말이 등을 방글라데시 노동자들과 캠프팀 10명이 함께 준비했다. 나는 미역국, 김밥, 계란말이 등을 맡아 아침부터 정신없이 일했다. 김밥 재료를 준비하기 위해 가스레인지 앞에서 계란을 준비하고 있는데, 바로 옆 자리에서 방글라데시 노동자의 아내인 여성 분이 김밥에 들어갈 오이를 자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채칼이 없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구를 사용해 오이를 길게 썰어내고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영상을 찍었다. 산업보건의 관점에서, 칼이나 톱을 이용해 무엇인가를 자를 때 날카로운 면이 나아가는 쪽에는 손가락이나 몸이 위치하지 않도록 하는 게 안전의 기본 사항이다. 실수건 혹은 어떤 이유건, 잘라내다가 멈추지 않고 날카로운 칼 부분이 주욱 나아갈 때 몸이 상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익숙한 일이겠지만, 오이를 주욱 밀어 자르다가 손가락 가까이 칼날이 왔을 때 멈추는 걸 보는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한국에 가면 채칼을 사서 보낼 길을 알아봐야 할 듯하다.


15. 비두, 어떤 리더십

몇 년 전부터 술은 주로 혼자 마신다. 마음이 어지러운 날들이 많았고 밤늦게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만이라도 온전히 쉬고 싶다 보니 그렇게 됐다. 술자리조차 그렇게 대하다 보니 누군가를 호스트 하는 일이 많이 낯선 사람인데, 어제 '한국인의 날' 행사를 하며 방글라데시에서 한국 음식을 해서 지역 주민들을 초대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내게 이 날 가장 인상적인 경험은 행사 자체가 아니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나서 함께 일했던 방글라데시 귀환 노동자들을 주축으로 한 BPS 분들과 했던 회의였다. 사방이 깜깜한, 주변에 숲 말고는 보이지 않는 건물의 옥상에서 작은 불을 켜놓고 둘러앉아 오늘 행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회의는 뱅골어로 진행되며 한국어 통역이 진행되었는데, 어둠 속 둘러앉은 동료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을 바라보며 리더인 비두가 말했다. 


“살다 보면 몸과 마음이 아프고 인생이 견딜 수 없이 고달파질 때가 있다. 옛날 사람들은 그럴 때 구루(Guru, 영적인 스승)를 찾아갔다. 나무 밑에 앉아 있는 구루의 곁에 가면, 그가 하는 고행이나 수행을 함께 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녹아내리고 몸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하곤 했다. 내게는 당신들이 그런 존재다."


BPS는 방글라데시의 빈민, 장애인 계층을 지원하는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는 작은 로컬 모임이지만, 모든 사회운동이 그러한 것처럼 일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상처를 입는 일이 없을 리 없다. 리더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품고 있었는데, 비두의 말을 듣고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당신들을 만나면, 옛사람들이 나무 밑 구루의 존재에 의지했듯, 몸과 마음의 상처가 낫는 것 같다. 

오늘 아침에는 부리로 방 창문을 두드리던 까마귀가 더 이상 아침에 우리 방을 공격하지 않길래, 새벽에 룸메이트인 비두에게 까마귀가 생각보다 똑똑한 것 같다고 말했다. 비두가 까마귀를 잡아 베란다 밖으로 보낸 이후에 더 이상 거울처럼 보이는 우리 방 유리창을 공격하지 않았으니까. 


"까마귀 날개를 잡은 다음에 던지지 않고 한참 동안 잡고 있으면서 숲에서 창가를 보고 있는 여러 새끼 까마귀나 다른 까마귀들에게 보여줬어요. 그냥 날려 보내면, 무서워할 것 같지 않아서요."


그 말을 듣고 어제 밤늦게 진행된 미팅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하며 물었다. 무엇인가 사회를 바꾸어 보려는 모임을 하다 보면, 사람 중에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화를 내거나 삐지는 경우들도 있고 그런 사람들을 다 돌볼 수 없지 않냐고, 그럴 때 어떻게 하냐고.


"절대 왜 모임에 나오지 않느냐고 묻지 않아요.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냥 잘 지내냐고 요즘 뭐하는지 묻는 연락만 하고 기다려요. 시간을 주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저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돌아오기도 해요."


16. 긍정과 부정, 이분법의 언어를 넘어서

내 연구실에는 휠체어를 사용하는 여성이자 뛰어난 장애학 연구자인 문영민 박사가 있다. 문영민 박사와 함께 '장애인의 화장실 이용과 건강' 연구에서 휠체어 장애인 12인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고 분석할 때였다. 문영민 박사와 나는 같은 인용문을 놓고서 키워드를 뽑아내는 방식이 달랐다. 예를 들어, 아래 인용문을 살펴보자. 


"사실 거의 밖에 나갈 때 아는 장소 말고는 기대를 안 하고, 못 나가는 것을 전제하고 사전에 뭔가 물을 덜 마시거나 그런 식으로 준비를 해서 가는 것 같아요. 어디서든 내가 진짜 낯선 장소에서도 갈 수 있다, 이런 기대감은 사실 거의 없고. 일단 외부에서 화장실 가는 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고. 그래서 더 새로운 장소, 약속 장소나 이런 거를 선택하는 게 더 어려운 것 같기도 해요. (참여자 7, 30대 여성)"


나는 이 부분을 두고서 "삶의 가능성을 제약하는 조건"이라고 정리하면, 문 박사님은 "삶의 선택지를 확장하는 공간"이라고 적었다. 이런 차이는 여러 번 벌어졌다. 내가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경험'이라고 정리한 인용문을 박사님은 "존엄한 삶을 보장하는 공간"이라고 정리한다. 이 차이가 어디서 오는가를 곰곰이 고민하다가, 이번 논문에서는 내가 박사님의 의견을 최대한 따라가기로 했다. 


나는 부정과 차별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박사님의 긍정과 가능성의 언어를 사용한다. 장애인 연구 경험이 나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박사님께 왜 우리가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지 고민할 때, 박사님이 말했다. "저는 장애인 당사자이다 보니, 부정적 언어로만 그 경험을 묘사하면 답답해서요." 비슷한 맥락에서 김원영 변호사는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환자의 결함에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래서 변화하지 않는, 상실되지 않고 남아있는 능력을 거의 간과했다." 


몇 개월 전, 남양주 샬롬의 집에 찾아가 이주노동자의 산업재해 연구 회의를 할 때, 샬롬의 집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한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는 차별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물어달라고 말했다. 그런 거, 텔레비전 방송국과 신문에서 맨날 이야기하는 데 우리까지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하냐고,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더 말하고 싶다고.


지난 며칠 동안 마석가구공단에서 일하고 방글라데시로 돌아간 이주노동자들의 집에 계속해서 방문했다. 그중에는 아직도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의 가족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방글라데시로 돌아온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었다. 밤늦게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이들은 다들 한국을 그리워했다. 한국의 노래와 음식과 사람들을 이야기했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 시기가 이들에게는 20대라는 화양연화일 수 있다. 좁은 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종종 사업장에서 욕설과 폭행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낯선 곳에서 동료들과 부대끼며 고민을 이야기하고 꿈을 꾸며 서로에게 힘이 되며 살았던 시기이니까. 20대에 했던 어떤 어려움의 시간들을 훗날 종종 아름답게 기억하곤 하니까.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 일했던 이들과 함께 있으면 김광석의 '사랑했지만'과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와 SES의 'Dreams Come True'와 같이 감성적 일관성을 찾을 수 없는 그 시대에 유행했던 노래들이 자꾸 흘러나왔다. 


그만큼이나 중요한 점은 이들은 실제 그 이주노동을 통해 계급상승을 이뤄낸 경험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돈을 모아 귀국한 이들 중에는 방글라데시에 자신의 공장을 차리고 한국에서의 경험을 이용해 작은 의류회사를 운영하는 노동자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삶은 여전히 고달프고 하루하루는 힘겹지만, 이제는 한국에 가기 전 자신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상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다.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서 자전거 인력거인 릭샤를 끌며 온갖 욕설과 위험을 감수하며 받을 수 있는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 15만 원(2023년 방글라데시 최저임금은 14만 7,500원)이 선택지인 이들에게 한국에서 월 200만 원의 노동은 전혀 다른 삶의 가능성일 테니까. 


물론 이 모든 '아름다운' 이야기는 죽지 않고 사기당하거나 미치지 않고 살아 돌아가는 데 성공한 이주 노동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보다 많은 이들의 존엄을 보장하고 그들이 견뎌야 할 시간을 견뎌내는 데 힘이 될까. 긍정과 부정, 차별과 가능성의 언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둘을 모두 깊게 이해하면서 삶의 복잡다단한 층위를 파악하면서, 쓸 수 있는 글이 있을게다.


17. 이슬람 국가, 방글라데시

- 출발하기 전부터 음식에 대한 주의를 많이 들었다. 물갈이에 대한 경고도 있었지만, 이슬람 문화권에서 금기시되어 있는 돼지고기 관련 내용이었다. 라면을 사갈 때 수프에 돼지고기 관련 성분이 없는지 확인해야 하고, 초코파이도 파이 사이에 있는 마시멜로가 돼지 피부의 젤라틴 성분을 사용하기 때문에 안된다고 했다. 


- 이주노동자 가족의 집에 방문했는데, 내년에 대학에 진학할 예정인 한 똘똘한 남자아이랑 이야기를 나눴다. 공부를 좋아한다길래, 반가워서 대학에 가면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 물었다. 코란을 과학자로서 해석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코란의 내용이 너무 좋아서, 10대에 2년 동안 휴학을 하고 코란을 읽었다고 했다. 방글라데시의 다카 대학교가 아닌 관련 내용을 연구하는 교수님이 있는 터키의 대학으로 지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공자의 논어, 기독교의 신약성서, 플라톤의 국가, 불교의 반야심경/금강경은 가까이 두고 읽었지만 그 책들만큼이나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는 코란에 대해서는 무지한 지라 그 말이 반가웠다. 아이에게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경전이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킨 책이라면 분명 놀랍고 경이로운 내용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고, 그러니 훗날 연구자가 되면 꼭 나 같은 사람이 읽을 수 있는 대중서적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 숙소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슬람 국가에는 일부다처제가 합법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때, 비두가 입을 열었다. "코란에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했던 것은 전쟁 때 남자들이 너무 많이 죽었기 때문이에요. 당시 남편이 죽은 여자들은 삶이 비참했고 먹고살 길이 없었어요. 그래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했던 거예요. 그때조차도 여러 부인을 맞이하게 되면 모두를 반드시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사람 마음이 누군가를 분명 더 좋아하게 될 거잖아요. 코란의 그 말은 실제로는 일부다처제를 하지 말라는 말에 가까워요."


- 모두는 아니었지만 대다수의 여성들이 히잡을 쓰고 있었는데,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남성이 많았다. 심지어 시골 마을에서도 남자아이들이 훨씬 거리에서 많이 보였다. 통기바리 지역의 시장을 방문했을 때는 한 가구 공장 건물 2층에 여자 아이들이 머무는 기숙학교(마드랏사) 같은 곳이 있었다. 그 좁은 건물에서 100여 명의 여자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는데, 실내를 보고 싶었지만 남자는 기본적으로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게 금지되어 있었다. 보안이 취약한 시골지역에서 부모가 모두 일을 하러 멀리 떠난 상황에서 여자 아이들이 인신매매를 비롯한 여러 위험에 노출되다 보니, 이곳에 와서 생활을 한다고 했다. 창문 틈 사이로 검은색 히잡으로 얼굴을 가린 여학생이 2층에서 우리를 몰래 내려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일행이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서 그 건물 계단을 올라가다가 신발들이 보여 사진을 찍었다.



18. 앗살라무 알라이 꿈

방글라데시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했다. 앗살라무 알라이 꿈. “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라는 뜻을 가진 무슬림의 인사말이다. 방글라데시를 떠나는 마지막 날, 룸메이트였던 비두에게 뱅골어로 앗살라무 알라이 꿈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한국에 가져가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비두는 잠시 기다려 보라며, 내가 준 노트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한참을 걸려 올라와서 내게 설명해 줬다. 둘 다 '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인데, 위에는 아랍어로 '앗살라무 알라이 꿈'이고 아래는 방글라데시에서 같은 내용을 말을 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앗살라무 알라이 꿈. 비두 29-01-2024"

 

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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