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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섭 Jun 02. 2019

북산고 안선생님 이야기

<슬램덩크> 읽기

내 또래 친구들처럼 <슬램덩크>는 내게 바이블 같은 책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슬램덩크>를 보느냐고 이야기를 하지만, 이 만화에는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숨어있다. 사람들이 종종 놓치는 포인트 중 하나는 이 만화가 안 선생님의 트라우마 극복기이자 교육학 교과서라는 점이다.


스토리 1. 대학 최고 명장 안선생님의 실패: 조재중의 죽음

북산고의 감독으로 나오는 안선생님은 고등학교 농구 감독으로는 어마어마한 스펙을 가진 인물이다. 국가대표 현역 출신이면서 대학 농구팀 최고의 명장이었다. 냉철하고 엄격했던 그는 '흰 머리 호랑이'로 불렸다. 

대학 농구팀 감독이던 안선생님은 일본 농구계를 바꿀 수 있는 놀라운 재능을 지닌 선수를 발견한다. 조재중이다. 일본인으로 드물게 2m의 큰 키에 뛰어난 신체능력을 가진 그는 개인 플레이를 한다. 본인이 팀에서 제일 뛰어나니까. 안선생님은 그를 키우기 위해, 쓸데없어 보이는 재미없는 기초 훈련을 계속 반복시킨다. 개인플레이를 즐기는 그에게 안선생님은 항상 말한다. '너를 위해 팀이 있는 게 아니라, 팀을 위해 네가 있는 거다' 조재중은 안 선생님이 무섭고 싫다. 

그는 안선생님과 상의 없이 미국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는 처참하게 실패한다. 누구도 그에게 패스하지 않는다. 그의 훈련 비디오를 본 안선생님은 분노한다. '이 팀은 감독이 없는 건가?' '전혀 성장하지 않았어.' 조재중은 농구를 그만두고 술과 약물에 찌들어 지내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한다. '감독생활 마지막으로 최고의 선수로' 키워내려고 했던 제자를 안 선생님은 그렇게 허망하게 잃는다. 


스토리 2. 삶을 놓아버린 북산고 감독 안선생님: 방치된 정대만 

북산고에서 안 선생님은 삶을 놓아버린 존재다. 그에게 더 이상 꿈은 없다. 그는 지역에서 농구 명문인 해남이 아닌 재능이 없는 일반인 아이들이 모이는 북산으로 왔다. 대학 농구팀의 명장이 전문 농구부가 존재하지 않는 일반고에 온 것이다. 물론 감독으로 왔으니 스카우트를 위해서 중학교 경기를 보러가 지친 정대만에게 '포기하지 마라'라는 명언을 남기지만 그 뿐이다.

연습할 때 안선생님은 벤치에 없다. 북산 농구부는 전혀 관리되지 않는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정대만이다. 다리를 다친 정대만이 농구와 멀어지고 삶을 포기하고 방황을 하는데, 안 선생님은 방치한다. 훗날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라는 말로 대표되는 명장면은, 거꾸로 안선생님이 정대만을 조금만 챙겼어도 정대만은 그토록 방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지역 중학 농구 MVP를 했던 재능이 그렇게 썩어버린다. 

안선생님은 조재중으로 인한 상처 속에서 더 이상 스스로를 교육자로 여기지 않는다. 자신은 실패한 존재라고 믿고 지낸다.


스토리 3. 안선생님의 트라우마 극복과 성장: 서태웅

안 선생님의 트라우마 극복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강백호가 아니라 서태웅이다. 강백호는 신체 조건을 제외하면, 실력 성격 거의 모든 면에서 조재중과 다르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뛰어난 신체 능력, 농구에 대한 열정 이런 모든 면에서 서태웅은 조재중을 닮았다. 

서태웅은 조재중과 비슷하게 미국 농구 유학을 가고자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농구를 더 잘하고 싶어서. 안 선생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 두려웠을 것이다. 당연히 자신의 품을 떠나 사망했던 조재중이 떠올랐을 테고.

안선생님은 조재중 때와 다르게 행동한다. 과거처럼 그냥 계속 기초, 체력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신에, 서태웅에 맞게 이야기한다. '능남전 비디오를 봤다. 너는 아직 윤대협에 미치지 못한다. 네 자존심 때문에 미국으로 도망가려는 것은 아니냐' 승부욕의 화신 서태웅은 이 말을 듣고도 미국 유학을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서태웅은 안 선생님의 말대로 '먼저 국내 최고'가 되기로 한다. 

교육자 안선생님의 성장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대목은 그가 답을 말하지 않고 기다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안 선생님은 서태웅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절대 입밖에 내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마지막 경기였던 산왕과의 경기에서조차 그 말을 꺼내지 않고 기다린다. 마음 속으로 기도하듯 말할 뿐이다. '자네가 윤대협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주기를. 

조재중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을 직접 말해주는, 정답을 강요하는 방식의 교육으로 안 선생님이 실패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조재중이 그토록 싫어했던, 서태웅도 분명이 귀담아 듣지 않았을 그 말이다. '너를 위해 팀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팀을 위해 네가 존재한다'. 

정우성이라는 압도적인 적을 만난 서태웅은 '자신이 아닌 팀을 위해' 채치수에게 패스를 해서 그 장벽을 극복한다. 첨부한 사진은 그 장면에서 환호하는 안선생님이다. 돌부처처럼 움직이지 않기로 유명했던 안 선생님이 취한 가장 역동적인 포즈다. 수백번은 마음속으로 되뇌였지만 입에 담지 못했던 그 말을, 제자 서태웅이 이해하고 실천해주었다. 그로서 안선생님은 조재중의 선생님으로부터, 실패한 교육자로부터 한 걸음 나아간다. 기다릴 줄 아는 선생님으로.


스토리 4. 안 선생님의 경험과 사고를 넘어서는 존재: 강백호

강백호와 안선생님과의 관계는 독특하다. 안선생님은 강백호의 잠재능력을 일찍 알아보고 그에게 특훈을 시킨다. 강백호의 성장은 안선생님의 기대를 자주 넘어선다. 산왕과의 경기에서도 해남과의 경기에서도 그는 놀라운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이 과정이 교육자 안선생님은 재미있다. 이 학생의 놀라운 재능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강백호는 <슬램덩크>의 마지막 권에서 또 다른 면에서 안선생님의 사고를 넘어선다. 안선생님은 강백호가 허리를 다친 걸 알면서도 그를 벤치로 불러들이지 못한다. 그의 눈부신 성장을 좀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참고 참다가, 더 이상 경기를 하면 선수생명이 위험해지는 순간에서야 그를 불러들인다. 그리곤 말한다. '지도자로서 나는 실격일세' '자꾸자꾸 성장해가는 자네의 플레이가 보고 싶었네'. '조금만 늦었어도 난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갔을 거네...' 

자책하는 안선생님에게 강백호는 슬램덩크 최고의 명대사로 답한다.

'영감님의 전성기는 언제였나요? 국가대표 때였나요? 저는 지금입니다.'

비합리적이고 득보다 실이 많아보이지만 삶에서 놓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강백호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고, 그렇기에 미래를 위해 이 순간을 희생하라는 말은 납득할 수 없다. 그렇게 제자 강백호는 타자화된 존재를 넘어서고, 스승인 안선생님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빛나는 삶의 영토를 개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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