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승섭 Dec 09. 2019

대담 준비, '어른' 감당하기

1.

새벽에 다시 보스턴 로건 공항에 와 있다. 1시간 뒤 일리노이 공대에서 코리건 교수와 대담을 나누기 위해 시카고행 비행기를 탄다. 이 미팅을 끝으로, 연구년 동안 기획했던 세 명의 대가와의 만남이 끝난다. 이 셋은 모두 성소수자 차별, 인종차별, 정신질환 낙인을 연구할 때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이름이 떠오르는 이름인 동시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성소수자 차별을 연구하는 레즈비언 경제학자, 인종차별을 연구하는 흑인 사회학자, 그리고 정신질환 낙인을 연구하는 우울증/불안장애로 20년 넘게 투병하고 있는 심리학자이다.


이들이 쓴 논문은 시작부터 끝까지 논리적이고 정갈하지만 그들 각자가 살아낸 세상이 그러했을 리 없다. 자신을 열등한 비정상적인 존재로 밀어내는, 종종 보이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폭력과 낙인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이들에게 공부란 무엇이었을까.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자신의 성소수자 노동자 임금차별 연구를 내내 불편해하던 대학에서 결국 테뉴어를 거부당하던, 예일대 교수가 되고 나서 부동산에 연락해서 집을 가계약했지만 아내에게 저 사람이 아직 우리가 흑인인지 모르기 때문에 만나기 전까지는 거기 살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하던, 정신질환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역 모임에서 자신의 우울증 투병 경력을 나누다가 ‘당신, 대단하네요’라고 누군가 말하자 실은 이건 제 친구 이야기라고 말하고 와서 스스로도 낙인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던 이들에게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였을까.  


글은 공부와 경험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쓰인다. 언어를 찾기 위해 공부해야 하고, 그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경험해야 한다. 좋은 공부와 경험은 모두 아슬아슬한 긴장을 유발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동시에 그 몸이 어딘가로 나아가도록 밀어붙여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말은 아프면서도 단단하다. 동성 파트너와 살고 있으면서도 혹시 내가 응원하는 정치인이 동성결혼 법제화에 앞장서다가 선거에 떨어지거나 상처 받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사람이 있었고, 흑인 이민자로 살아왔으면서도 미국에서 백인 경찰에 의해서 계속해서 살해당하는 무장하지 않은 흑인들을 보면서 이건 경찰이 나쁜 폭력적인 사람이어서만은 아니라고 사회가 부여한 무의식적인/암시적 편견이 그 순간 작동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코리건 교수는 2015년 출판한 책 <정신질환 낙인을 없애기 위해 자랑스럽게 커밍아웃하기>에서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수기를 모아 출판하며 그 맨 앞에 자신의 이야기를 말한다. 의과대학에 들어갔다가 첫 학기에 그만두고, 박사학위를 시작했다가 그만두어야 했던 시간에 대해.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투병하며 그렇게 학교를 4차례 그만두고 돌아가지 못했던 경험에 대해, 자신의 삶이 계속해서 단절되고 막히던 시간에 대해 말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던 시기에 홀로 뒤처지는 것 같던 좌절에 대해, 응급실에 계속해서 실려가던,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어 고통스러웠던 시간에 대해 말한다.


그 글의 제목은 <거기에 자랑스러울 게 뭐가 있을까(What’s There to be Proud of?)다. 벗어날 수 있다면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 이 정신질환을 겪고 있다는 게 자랑스러울 수 있냐는 것이다. 이 글은 역으로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무엇을 자랑스러워하는가?’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은 타인이 모두 부러워하는 아름답고 화려하고 빛나고 재화인가, 아니면 상처와 고통 속에서 당신이 겪어낸 그 ‘거대한 뿌리’인 당신의 과거인가.


공부란 무엇인가. 공부가 논문 편수와 수능점수로만 환산되는 시기에, 우리에게 공부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의 상처가 자신을 긍정하는 힘이 될 수 있도록, 아픔이 길이 될 수 있도록.


2.

세상이 다 X 같다고 말하고 싶던 십 대 무렵 나는 그 말을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 말을 하면,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던 어머니와 외삼촌이 살아가는 세상 역시 모욕받기 때문이었다. 그 두 사람을 그 자리에 놓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옳지 않고 스스로 용납할 수도 없었다. 당연히 불완전하지만, 자신이 ‘어른’이라는 사실을 지각하고 어떻게든 그에 걸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로, 그들이 무엇인가를 정말로 해내는가와 무관하게 나는 세상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간혹 내가 얼마만큼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가에 대해, 그러니까 공부하는 일과 대학이라는 공간의 가치가 지금처럼 평가절하되고 난도질당하는 시기에 대학에서 공부를 업으로 살아가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을 해본다.


세상도 대학도 바꾸어내지 못하지만, 누군가가 대학의 공부를 싸잡아 함부로 말하려면, 어머니와 외삼촌이 십 대의 내게 그랬던 것처럼, 조금은 망설여지게 만드는 존재로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고루하고 재미없지만, 내 자리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경청하고 반성하고 가르치고 연구하려 안간힘을 쓰는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몸과 마음이 버티는 동안만큼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게 내 몫이라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서평] <실명의 이유> (선대식, 201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