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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섭 Dec 12. 2019

[책읽기에 대하여] 19살의 당신에게

2008년 초에 쓴 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2년전 고등학교 선생님의 부탁을 받아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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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9살의 당신에게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지내시는지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요. 저는 오늘 제 고등학교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입니다. 그분에게서 당신에게 편지 한 통을 써 주지 않겠냐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대학생활을 이제 막 시작한 당신이 취업준비에 몰두하고 무엇인가를 소비하는데서 삶의 즐거움을 찾는 모습을 선생님께서는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저는 올해 29살입니다. 당신에게 이 편지가 어떻게 다가갈지 모르겠습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제가 편지 한 통을 통해 당신에게 무언가를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10살이라는 나이를 빙자한 폭력이거나 어쭙잖은 오만이겠지요.


그래도 저는 무언가를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20대에 제가 읽었던 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좋은 책을 추천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좋은 책을 골라 추천해줄 만큼 책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저와 비할 수 없이 책을 넓고 깊게 읽으신 분들이 밤하늘의 별만큼 많습니다. 다만 무언가를 이야기하는데 책이 좋은 다리가 되어 줄 것 같아 그런 것뿐입니다.


1. 책을 왜 읽는가에 대하여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요. 당신의 대답이 궁금합니다. 능력 있는 CEO나 훌륭한 의사나 그런 것 말고요. 인간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있나요. 19살에 저는 세상을 섬세하게 느끼고 작은 것들까지 사랑할 줄 아는 그리고 그 사랑에 책임질 줄 아는 되고 싶었습니다. 예. 참 힘든 꿈을 꾸었습니다.


 당신에게 다가올 20대는 어떤 시기인가요. 저는 대학에 올 때까지 공부가 제 생활의 거의 전부였던 모범생이었습니다. 모범생이라는 단어가 칭찬인 것은 고등학교 때까지이지요. 대학에 온 저는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것들 투성이라는 마음에 많이 배우고 느끼고 또 많이 깨지고 또 많이 바뀌고 싶었습니다.


 컴퓨터를 쓸 때,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소프트웨어인 프로그램이지만 실제 그 프로그램은 하드웨어 없이는 설치될 수 없는 것이지요. 하드웨어의 용량을 벗어나서 소프트웨어가 운영될 수는 없으니까요. 신영복 선생님은 인간의 이성을 소프트웨어에, 인간의 감성을 하드웨어에 비유하셨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배우고 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감성이 허용하는 것 이상의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말이었지요.


 저는 이 말에 동의합니다. 감성, 감수성 혹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들은 결국 자신의 지식과 이성이 건물을 지을 수 있는 토양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설계도와 기자재와 일꾼들이 있어도 땅이 없는 곳에 건물을 지을 수는 없지요. 저는 20대가 감수성의 땅을 마련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감수성의 많은 부분이 무엇보다 타고나는 것이고 또 어린 시절 길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대에 자신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감수성은 그에 비하면 아주 작은 부분이 이라고요. 저는 그 작은 부분에 대해 제가 노력했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혹시 절망적인 이야기인가요. 그렇게 생각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감수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앞으로 당신이 맞닥뜨릴 많은 일들 예를 들어 연애나 취업이나 공부 같은 모든 것들이 결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순탄하게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작하는데 이렇게 이야기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사실인걸요. 그러한 현실을 직시해야 해요. 그리고 자신이 걸어갈 길을 찾아야 지요.


2. 고전은 힘이 세다.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셨는지요. 거기서 삼식이의 옛 여자 친구가 아름다웠던 기억들을 말하며 삼순이에게 남자 친구를 돌려달라고 말하자, 삼순이가 그런 말은 해요. “저. 그런데요 추억은 힘이 없어요.”


 여기저기서 온갖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모 대학에서 꼽은 고전 100권이나 누구누구의 추천도서 같은 목록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요. 저명인사들은 이 책이 나를 바꿨다고 TV에 나와 책을 소개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책은 종이와 잉크로 이루어진 무언가 일 뿐입니다. 그걸 잊어서는 안돼요. 책을 읽는 행위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저는 싫어합니다. 좋은 책은 좋은 생각들을 제공해 줄 뿐, 사람을 바꾸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이고 그 관계에 대한 노력과 성찰이지요. 좋은 책을 통해 알게 된 무언가를 삶 속에서 꾸준히 되새김질하고 의심하며 삶 속에서 풀어나가지 않으면 당신이 읽었던 책은 그냥 종이와 잉크 덩어리일 뿐입니다. 책에는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책 중에서 그나마 힘이 센 놈들이 있습니다. 이 놈들은 가히 책들의 대장이라고 할만합니다. 이 녀석들을 제가 감히 대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거의 모든 놀라운 생각들이 이들에게 젖줄을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였던가요. 상상력은 경험에서 나온다고요.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데서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 시작과 전혀 다른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요. 인간이 만들어 낸 거대한 상상력의 시작은 앞서 사라져 간 다른 거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미술도 문학도 철학도 모두 그렇습니다.


 대장인 그 녀석들을 저는 고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대장인 녀석들은 쉽사리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삼천배를 해야 만날 수 있었던 성철스님처럼, 이들은 자신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온 이들에게만 비로소 조금이나마 눈길을 돌립니다.


 저는 마르크스 <자본론 1권>과 플라톤 <국가> 그리고 프로이트 전집을 읽었고 스피노자와 들뢰즈를 읽다가 실패했습니다. 자본론은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들과 1년 동안 참고서적 2권을 붙들고 2주에 한 번씩 세미나를 하며 공부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권을 읽었습니다. 혹시 마르크스라는 학자에 대한 거부감이 있으신지요.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라 왠지 모를 두려움이 생기는지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만 영국 BBC 방송에서 지난 천년 동안의 위대한 인물 100인을 뽑았을 때, 마르크스가 일등을 했었고 또 20세기의 많은 학자들이 마르크스에게서 거대한 상상력을 얻어갔다는 사실만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마르크스는 그를 찬양하는 사람들과 그를 혐오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오해를 받아온 인물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저는 1년 동안 공부를 하며 저 만의 마르크스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님의 침묵>에 나오는 시 구절처럼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언제인가 가까이 지내는 친구에게 그 감동을 전달하고 싶었는데, 안되더라고요.


 프로이트는 우연히 알게 된 대학원생들의 세미나에 끼어서 책을 읽었습니다. 혹시 본인이 책을 좀 많이 읽고 무언가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관심분야를 전공하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공부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실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은 비전공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노력을 들인답니다. 프로이트 전집이 20권인데, 1주일에 한 권씩 읽고 요약해 가는 세미나였습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전공분야였던 심리학계에서 일정 부분 사기꾼 취급받고 있기도 합니다. 심리학은 모르겠습니다만, 프로이트를 알고 나면 예술을 예술사를 바라보는 눈이 한층 깊어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6개월 동안 세미나에 참석하고도 막상 저만의 프로이트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감동을 받지 못했던 것이지요. 아. 이 녀석과 나는 인연이 없나 보다 하고 그럭저럭 지내던 어느 날 술을 먹다 선배가 프로이트에 대해 말해준 말 한마디를 듣고서 제가 공부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몇 분동 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그 느낌을 몸속 깊이 새기려고 애를 썼었습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세미나를 통해 공부했지만, 다른 고전들은 모두 강의를 들었습니다. 아. 늦게 말씀드리지만, 전 고전을 혼자 읽지 않습니다. 제게 그만큼의 끈기가 없고 또 고전의 메시지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야가 제게 없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의 <국가>는 놀라운 책입니다. 만들어진지 2000년이 넘은 책이 어떻게 이렇지.라는 말을 나오게 합니다. 한국에도 정약용이나 퇴계 이황과 같은 훌륭한 학자들이 있지만, 플라톤의 <국가>는 그보다 더 놀랍습니다. 뭐냐면요. 너무 편안하게 말을 합니다. 아주 일상적인 문체로 삶의 모든 문제에 깊이 있게 접근을 합니다.


 스피노자와 들뢰즈는 혼자 읽다가 실패를 했습니다. 라깡은 한 학기 동안 강의를 들었는데, 한 번도 감동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라깡에 대해 지금도 기억나는 것도 아는 것도 없습니다.


 자. 고전의 힘에 대해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에리히 프롬을 아시는지요. <소유냐 존재냐> <자유로부터의 도피> 같은 책을 써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20세기의 사상가를 이야기할 때 리스트에 빠짐없이 들어가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저는 에리히 프롬의 책을 마르크스나 플라톤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에리히 프롬 같은 대학자를 놓고 제가 감히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우스울 수 있지만 편지니까 편하게 이야기할게요. 그의 책을 저도 좋아하지만, 읽고서 좋다는 것 말고 그가 고전을 썼던 거인 인가 하는 문제는 다르니까요.


 그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열심히 공부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두 거인의 어깨 위에서 20세기를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좀 더 대중들이 읽기 편하도록 글을 잘 쓴 사람이지요. 혹자는 마르크스에서 계급투쟁을 빼고 프로이트에서 유아 성욕론을 빼고 먹기 좋은 음식을 만들어 배포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요.


 많은 책들은 고전이 해놓은 거대한 사유의 품 안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책의 저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거대한 사유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사유의 원천인 고전을 직접 만나고 그와 삶에 대한 많은 질문들을 던지는 일은 만약에 그것이 가능하다면, 당신이 세상과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 수 있는 행운의 여신을 만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 대학 밖에서 고전을 만나고 싶은 신 분이라면, 인터넷 창에 민족예술아카데미, 철학아카데미, 연구공간 너머 등을 쳐보시기 바랍니다.


3. 종교 : 인간의 가장 깊은 무언가에 대하여


 혹시 연애를 해보셨는지요. 사랑을 끝나고 나면 다른 건 몰라도 확실히 알게 되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사람도 사랑도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못 견디게 숨이 막히는 순간들이 차츰차츰 잦아들고 다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하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어느 순간 다시 누군가를 만나기도 합니다. 시간이 무서운 거지요. 글을 쓰다 보니 힘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는데, 시간은 정말 힘이 세거든요.


 그런데 종교는 수천 년의 세월을 살아남은 녀석들입니다. 지난 100년 동안에 세상이 워낙 많이 바뀌어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우리 세대의 유산 중에 천년이 지난 다음에 기억할만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1000년이라는 세월은 한 인간이 살아낼 수 있는 시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크기인지라, 답이 어려울 거예요.


 그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그것도 그냥 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는 것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놀랍고 경이롭기까지 한 일입니다.


 전 종교서적을 좋아합니다. 아. 제 종교는 불교입니다. 그냥 향 냄새가 좋아 일 년에 몇 번 절에 가는 정도이고요. 여름이면 여기저기 사찰의 수련 프로그램에 들어가 3박 4일 정도씩 묵언 수행이나 참선 수행을 하고 지냅니다. 참고로 여름 사찰 수련의 백미는 새벽 참선입니다. 해가 뜨는 것을 세상에 빛이 들어오는 것을, 그 미세한 변화를 온몸으로 느껴본 적이 있는지요. 작년 여름 법주사 참선 수련회에 참석했을 때, 500년 된 건물에 앉아 새벽 4시 참선을 하며 태양이 서서히 뜨고 그 빛이 인간세상에 다가오는 것은 처음으로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


 신약 성서는 참 좋은 책입니다. 그중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4대 복음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고독했던 한 존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눈물겨운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몇 년 동안 여름마다 성경을 읽으려 하다 실패했어요. 물론 교회에서 하는 성경 읽기 모임 같은 곳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는 제가 성경에 대해 갖고 있는 의문들에 대해 의미 있는 답변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읽을 줄 몰랐었습니다. 저는 적어도 성경이 믿음으로 읽어야 하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예수가 쓴 글이 아닐뿐더러, 예수가 죽고 수십 년이 지나서 쓰인 책들입니다. 다만 예수를 깊은 사랑으로 기억하는 자들이 그들의 기억과 마음을 기록한 책이지요. 예수 역시 자신의 사랑과 실천을 제자들이 믿어주기를 바랐지 성경의 구절들을 암송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사람마다 예수를 만나게 되는 경로가 다르겠지만 저는 이누카이 미치코의 <성서 이야기>와 서준식의 <옥중서신>과 김규항의 글들을 통해 그를 만나는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으며 신약성서의 4대 복음을 그대로 옮겨 쓰는 일을 했었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너무 보석 같아서 누구도 볼펜으로 눌러쓰며 마음속에도 담고 싶었습니다.


 예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글에서 기독교 신자일지도 모르는 당신과 그가 신인지 아닌지 여부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만났던 알고 있는 예수에 대해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어요. 다만 제게 그를 만나는 일은 한 존재가 보여줄 수 있는 윤리적 실천의 극한들을 접하는 일입니다. 몇 년 전 한 선배에게 보냈던 편지를 동봉합니다.


요즘 들어 그를 지탱하던 힘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으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이해하던, 화석화된 계율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과거의 유산들을 무시하지 않던, 자신의 몸으로 사랑을 행하면서도 그 결과물에 대해서 자신의 이름을 붙이줄 모르던 그는 어디에서 힘을 얻었을까요.


그를 통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권세를 꿈꾸던 자신의 제자들과 '내가 곧 진리'라는 말에 그를 정신병 환자 취급하던 유대인들과 사람을 살리고 귀신을 쫓는 기적만을 그에게서 바라던 민중들 사이에서 그는 어떻게 막달라 마리아를 앞에 두고서 '너희들 중 죄 없는 자 이 여자를 쳐라'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요. 계율에 따라서 죄인이냐 아니냐를 묻는 질문에 그 둘을 모두 긍정하고 또 부정하는 그 놀라운 답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요.


유한한 존재로 태어나 영원의 가치를 이야기하다, 그 마지막 완성을 위해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던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십자가를 나눠지자고 말하지 않았잖아요. 나를 따르는 자들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서, 가난한 자들은 네 몸같이 사랑하고 말했을 뿐이잖아요. 어떻게 그는 그토록 거대한 사랑을 하면서도 또 그토록 거대한 고독을 감수할 수 있었을까요.


자신을 배반할 줄 알면서도 유다를 그 긴 시간 동안 묵묵히 지켜보고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자신을 체포하러 온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배반한 제자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해서 그는 열매에 대한 기대 없이 묵묵히 씨앗을 뿌릴 수 있었을까요.


형.


과연 그를 지탱하던 힘이 무엇이었을까요.


 아. 저는 불교신자인데 성경을 너무 길게 이야기한 것 같네요. 불교는 오히려 제가 드릴 말씀이 많지 않아요. 다만 시간이 나면 서울 길상사의 참선 수련회나 여름방학을 이용해 사찰의 여름수련회에 참석해보길 권합니다.


 3박 4일 동안 말을 한 마디도 안 해보는 경험은 참 신기합니다. 전혀 새로운 세상에 입문한 느낌입니다. 과연 내가 살아가면서 꼭 해야 하는 말은 얼마만큼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절에서 하는 발우 공양이라는 것도 그래요. 내가 먹은 음식은 그 음식물을 씻은 물까지도 깨끗하게 본인이 먹게 하거든요. 우리가 살면서 세상에 참 많은 안 좋은 것들을 남기잖아요. 우리에게 산소와 그늘을 주는 나무를 잘라 책을 읽고 이 종이도 그렇게 만들어졌을 테고요. 가정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내는 폐기물 1등이 음식물 쓰레기라고 해요. 그런데 절에서 하는 발우 공양은 먹는 일에 있어 자연에 대해 예의를 지킨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렇게 먹고살기만 한다면, 내가 살다가서 세상이 더 오염되는 일 없기에 자연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마음이 생겨요.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라고 말할 만큼 때로는 난해하고 책들 역시 한자가 많아 입문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알고 계셨을 현각 스님의 <만행>을 읽어보시면 좋으실 거예요. 서구인들은 동양인들에 비해 불교에 입문하는 과정이 보다 논리적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낯선 종교에 일생을 바친다는 일 자체가 많은 결심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서구의 교육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효나 지눌과 같은 훌륭한 스님들이 배출된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불교서적들은 오히려 외국분들이 쓴 게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납득이 되고 이해가 가게 말을 해주거든요. 미국 명문대학의 종교학과 학생이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스님이 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불교라는 종교가 가진 매력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문제는 <만행>이 절판되었다는 건데, 도서관에서 빌리셔야 할 거예요. 대한민국 출판시장은 많이 열악해서 좋은 책들은 금방금방 절판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한국 스님이 쓰신 책 중에서는 도법 스님의 <내가 본 부처>를 추천합니다. 스님들을 교육하는 분이신 도법스님이 부처의 일생에 대해 쓰신 책입니다. 부처의 고뇌를 이해하고 또 부처의 존재를 신화화하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책입니다.


 마지막으로 공자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게요. 전 부처와 예수를 만나기 전에 공자를 먼저 만났습니다. 채치충이라는 만화가가 그린 <논어>라는 만화책을 고등학교 시절 도서관에서 읽다가 처음 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 동안 제가 알고 있는 공자는 그저 지루하고 딱딱하기만 했는데, 그 만화 속에서는 공자가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그는 60살이 넘어 현실 정치를 바꿔보겠다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 실패를 하고 돌아오기도 하고, 사랑하는 제자가 죽었다고 땅을 치며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통곡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운명에 대해, 죽음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앞의 두 성인과 다릅니다. 우리가 허공에 뜬 이야기처럼 여기는 유교가 실제로는 얼마나 현실적인 철학인가를 보여주는 면입니다. 그래서 18세기 기독교가 처음 조선시대 실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을 때,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그 내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했었습니다. 제사를 거부하기 전까지는요. 유교에서 말하지 않는 사후세계에 대한 철학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운명과 죽음에 대해, 우리의 호기심 많은 제자들은 질문합니다. 공자는 대답하지요. 운명은 너무 오묘해서 말을 할 수 없다고요. 또 제자들은 질문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 귀신에 대해 질문하지요. 공자는 그 질문을 듣고 오히려 제자에게 묻습니다. 그것에 대해 안다고 해서 네 인생이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느냐 라구요.


저는 공자의 이 대답들이 마음에 많이 듭니다. 좋지 않나요. 공자의 이야기들은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어느 제자가 질문합니다. 인(仁)이 무어냐고, 공자가 대답하지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성인이 된다는 게 무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또 그렇게 대답하지요. 사람을 아는 일이라고. 전 그 대답들이 너무 좋습니다. 공자는 책을 추천하기가 어렵습니다. 몇 번 논어 책을 샀지만, 제게는 딱딱하고 재미가 없어 다 읽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채치충의 <논어>를 추천합니다.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특히 그렇지만, 예수나 부처 모두 훌륭한 교육자입니다. 그들은 무언가를 진심으로 몰라 답을 구하는 이들에게 아무리 하찮은 질문이라도 최선을 다해 답을 하고 상대의 눈높이에 맞추러 교육을 하고 또 그 과정에서 믿음을 갖고 성장을 기다립니다. 또 반대로 신과 지식을 팔아 자신의 안위를 구하는 이들을 증오하고 분노하는 것도 같습니다. 예수는 유월절의 시장에서 신의 이름으로 장사를 하는 곳에서 깽판을 쳤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재판관들을 대놓고 무시하며 지식으로 장사하는 소피스트들을 찾아다니며 박살을 내지요. 공자나 부처 역시 좀 더 점잖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읽다 보며 만만치 않습니다.


4. 자서전과 평전에 대하여 : 우리가 타인의 삶을 알고자 하는 것은


 저는 훌륭한 사람들은 자서전을 써주길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분들은 어지간해서는 자기 자서전을 쓰지 않으십니다. 최근에 돌아가신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님 같은 분이 자서전을 남기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장기려 박사님 같은 분도 그렇고요. 그분들께서 살아오신 모습을 생각하면 그런 일이 없을 줄 알면서도 미련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들이 있어 후세에 평전들이 생겨나지요.


 소크라테스와 예수는 직접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부처와 공자가 직접 쓴 글은 아직 본 적이 없는데, 제가 확실히 몰라서요. 이 똑똑한 양반들이 왜 다들 글을 쓰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한 번씩 해봅니다. 특히 노자 같은 아저씨는 성 문지기가 부탁하지 않았으면 아예 도덕경도 안 썼을 거 아니에요.


 모든 만남은 일대일의 개별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요. 그러니까 모든 개개인에게는 각자 지닌 독자적인 삶의 역사에 기반한 의식구조가 있고 그에 따른 대화를 해야 하기에, 문자라는 보편적인 형식을 지닌 형태의 대화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화석화된 문자가 말 그대로 경전이 됐을 때를 걱정해서였을까요.


 여튼요. 저는 평전이나 자서전 류의 글을 좋아합니다. 역사 속의 흔적을 남긴 인물이 아니더라도 자기 삶의 과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누군가의 인생을 따라가 보는 일은 살아가는 힘을 줍니다.


 그런데, 간혹 평전들은 상대방에 대한 존경이 지나쳐서 인지 사람을 신화화하고 사람 냄새를 박탈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드라마틱한 느낌은 있을지언정 그에게서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혹은 알고 싶은 인간적인 면모들은 거세시켜 버립니다. 그는 나와 같은 문제로 힘들어하고 좌절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누군가의 삶은 알고자 하는 원동력 아니던가요.


 <닥터 노먼 베쑨> 같은 책이 그래요. 닥터 노먼 베쑨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스페인과 중국 민중들을 위해 거침없이 살아간 훌륭한 의사입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다 보면 그의 좌절과 고뇌, 갈등이 느껴지지 않아요. 저는 세상에 떠도는 ‘체 게바라’가 싫고 그의 평전도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싶어 손을 대고 싶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요. 간디의 자서전을 읽다 보면, 간디가 10대에 조기 결혼을 해서 갈등하는 게 나옵니다. 한창 성욕이 왕성하던 시기 절제를 못해서 힘들어하는 간디의 모습을 볼 수 있거든요. 백범일지를 읽어보면 김구가 얼마나 투박하고 순박한 사람이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내용이 아니라 문체에서요. 거침없고 정직하고요. 그는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때, 수사 어구를 동원하지 않아요. 전 그 문장으로 인해 김구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김산/님 웨일스의 <아리랑>은 읽을 때마다 님 웨일스에게 감사하는 책입니다. 님 웨일스는 김산과의 대화를 통해 그의 이야기를 살아있는 내용으로 글로 남기는 일을 해주었습니다. 참고로 <아리랑>은 대학 1학년 때 읽으려고 하니 재미도 없고 내용도 딱딱해서 실패했었는데, 26살에 다시 그 책을 만났을 때는 너무나 감사했던 책입니다.


 그러고 보면 책을 포함한 모든 만남은 시기라는 게 있습니다. 저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중, 고등학교 시절 읽지 못했던 게 안타깝습니다. <데미안>은 저처럼 대학생이 되어서 읽지 말고 십 대에 읽어야 하는 책인 것 같아요. 아마 저는 세계 2차 대전 때 독일군 병사들이 참호에서 가슴에 품고 읽으며 느꼈다던 <데미안>의 감동을 저는 앞으로도 영영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성칠 교수의 <역사 앞에서>라는 책도 제가 아마 일찍 만났었더라면 그 가치를 몰라봤을 책입니다. 글을 읽으면 처음에는 별다를 것 없는 일기거든요. 드라마틱하지도 않고요. 한국전쟁을 거치며 그 이념의 혼돈 속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또 자신의 자존심과 존엄을 올바르게 지켜나가고자 하는 한 교수의 고뇌가 그 일기 속에 담겨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야 하니까, 공자의 말처럼 어느 사회에서나 올바르게 사는 법은 있다고 하지만 그 길을 찾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주는 책입니다.


 저는 감옥에서 쓰인 신영복 씨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서준식 씨의 <옥중서신>을 모두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전 단연코 <옥중서신>입니다. 그 이유 역시 제가 자서전 류의 글을 좋아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영복 씨의 글은 참 정갈합니다. 차분하고 맑은 느낌의 글, 도대체 감옥에서 어떻게 이런 성찰들을 해 나가며 버티어 나갈 수 있는지 놀라울 만큼 적개심이 그 책에는 없습니다. 물론 그것은 신영복 씨의 훌륭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서준식 씨의 글을 읽다 보면 그가 그 안에서 느껴야 하는 좌절과 답답함 그리고 자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느껴지고 감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자기 자신과 싸워나가며 자신과 세상에 지지 않으려 애쓰는 그 눈물겨운 싸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좀 더 편안한 책들을 예로 들면 시인 백석과의 사랑을 다룬 기생 자야의 <내 사랑 백석>이나 <오체불만족>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와 같은 책들 역시 저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물론 평전 중에서도 좋은 책들이 있습니다. 자서전이다 평전이다 하는 이분법적 구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전태일 평전>은 훌륭한 책입니다. 그것은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님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5. 예술 : 아름다움을 찾는 일에 대하여


 무언가를 읽고 보고 듣고서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떨 때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을 받을까요.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을 느끼는 행위를 지성과 감성이 만나 유희하는 행위, 그러니까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이 함께 어우러져 뛰노는 데서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이 있다고 했어요. 


 그 말은 거칠게 표현하면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을 느끼는데 이성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겠지요. 물론 어떤 작품은 따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흔들 수 있지만 제 경우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대체로 맞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노래를 아주 못합니다. 노래방 가자는 이야기가 나오면 겁부터 날만큼 노래를 못하고 그림도 그만큼 못 그립니다. 그런 저 자신이 안타까워 그림이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좀 더 좋은 눈을 가져보자는 결심을 대학시절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시공사의 디스커버리 총서를 사서 마네, 모네 등의 화가 책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지금 다시 그림책을 사서 보라고 하면 시공사의 책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누가 산다면 말릴 계획입니다. 다름 아닌, 전두환의 아들이 운영하는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몰랐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아시는지요. 수백 명의 광주시민들이 군부정권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인데, 그 학살을 지휘한 한가운데 전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운동에 동참하지는 못하더라도, 현대사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 대한 예의는 갖추면서 살아야지요.


 그리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2번 읽었습니다. 학교에서 교양 수업으로 같은 제목의 수업을 2번씩 들었고요. 그림 전시회도 부지런히 찾아다녔고요. 그런 노력 끝에 제가 얻은 것은 미술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었어요. 뭐였 나면요, 제가 보기에 뭔지 모르겠는 작품은 감동이 없는 작품은 적어도 내게는 좋지 않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공부를 하기 전에는 오히려 뭔가가 있는 것이라는 허영에 빠져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함민복이나 황지우, 황동규, 정현종의 시를 좋아합니다.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시를 써주거든요. 그리고 많은 시집들이 시집 한 권에 제 입장에서 좋은 시를 한 두 개 이상 찾기 어려울 때가 많은데, 좋은 시인들은 시집 전체에서 어느 수준을 유지해 주더라고요.


 전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책에 대해 말할 때도 가장 자신이 없는 분야가 소설이고요. 대학 1학년 때에는 김소진의 소설에 잠시 빠졌었는데, 요절한 작가인지라 출판된 책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그 이후로는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좋아하는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김훈의 <칼의 노래>를 저도 좋아하고요. 공지영의 소설 중에서는 전 <별들의 들판>이 가장 좋았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인데, 이 책은 내용을 고려할 때 쉽사리 추천을 못하겠습니다. 다만 저는 그 소설에 나오는 한윤희라는 여자 주인공의 캐릭터를 많이 좋아합니다.


 재작년 여름 제가 너무 소설을 모르는 것 같아 문학평론가들이 뽑은 한국의 현대소설 베스트 5 목록을 신문에서 스크랩한 후, 그것들을 읽었습니다. 최인훈의 <광장>은 비슷하게 이념의 문제를 다룬 밀란 쿠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보다 이름은 멋이 덜 멋지지만 더 훌륭한 소설입니다.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은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생각하면서 읽으면 놀라운 소설이고요.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만났던 염상섭의 <삼대>는 이제 와서 보면 좋은 소설이 분명할 텐데, 아직 못 읽었습니다.


 문학평론가의 글 중에서는 돌아가신 김현 선생님의 글을 좋아했어요. 그 양반은 뭐랄까, 일상적인 언어로 글을 써서 현학적이지 않은데 대단히 날카로우면서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다하는 그런 느낌이 있어요.


 예술을 만나는 데 있어, 그러니까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음에 있어 자신이 편하게 접할 수 있는 것만 찾지 말기 바랍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감수성은 계발되고 훈련되는 것이거든요. 고등학교 시절까지 자신이 지닌 감수성의 땅을 적극적으로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으니, 대학시절부터는 평생 우려먹을, 평생 지을 건물의 땅을 산다는 마음으로 낯선 것들에 적극적으로 도전하셨으면 해요.


 인권영화제와 같은 소수자 영화제를 찾아가는 것도 독립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는 일도 좋고요. 남미나 제3세계의 음악을 들어보는 것을 정민아의 <상사몽>과 같은 퓨전 가야금 음악을 들어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6. 다시, 책 읽기에 대하여


 글을 쓰다 보니 책 이름을 많이 말하고 싶은 욕구가 계속 떠올라 조심스럽습니다. 좋은 책을 나열하는 글이 되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책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여기까지만 하려고 합니다.


 간혹 친구들에게서 책을 추천해달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럴 때면, 매번 조심스럽습니다.실은 좋은 책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독자적인 우주를 가진 존재이고 그 존재가 지닌 사고의 결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일종의 만남이라고 규정한다면, 사람에 따라 좋은 만남이 다른 것처럼 제게 참 좋았던 책도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는 좋지 않은 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만남은 개별적이고 독자적입니다. 연애로 힘들어하는 후배에게 좋은 충고를 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다만 책을 읽는 것과 관련해 한 마디만 보태려고 합니다. 카프카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 머리를 산산이 망치로 부스는 것과 같은 충격을 주지 못한다면 무엇하러 책을 읽는가’ 라고요. 물론 책을 읽는다는 게 찜질방에 가서 몸과 마음에 휴식을 갖는 것처럼,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보고 나서 때로는 머리가 개운한 것처럼 그런 류의 즐기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요.


 책을 읽다 보면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을 혼자 알지 않고 무슨 이유에서건 글로 남겨 수백 년이 지난 세월을 살아가는 나와 대화를 할 수 있게 해주었을까 싶어서요. 카프카의 말처럼 그런 책들은 때때로 불편하고 때때로 사람을 뒤흔들어 놓아, 그들을 만나고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음을 느끼게 해 줍니다. 사고하는 폭이 달라지고 사고하는 언어가 달라지는 거 말이에요.


 어려운 사고를 하게 되고 현학적인 말을 쓰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좀 더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볼 용기를 얻고 또 좀 더 진솔하고 정확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길을 알게 되는 그런 것이지요. 진리는 명제화된 무언가가 아니라, 진실하게 사는 행위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인식해야 될 대상이 아니라, 살아내야 할 시간인 것이지요. 우리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신만의 진리를 가질 수 있고, 우리 삶이 모두 독자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베스트셀러에 주목하되, 경계하셨으면 합니다. 베스트셀러들은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책이 팔리는 공간은 수요과 공급이 만나는 시장이라는 사실 역시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자신의 삶을 경영하는 방법들이 인기가 좋은 것이 최근 몇 년의 추세입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들을 모은 모자이크와 같은 책 역시 하나의 축을 형성하고 있고요. 하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절실한 것이 경영기술일까요. 물론 각자 알아서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 21세기 한국에서 필요한 생존기 술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들이 한 인간이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루한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서, 그럼에도 우리가 별개의 존재일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무엇을 알려줄까요. 기술적으로 사무적으로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모나 형제나 아내나 가까운 친구와 같은 존재를 대함에 있어 어떤 인내를 가르쳐 줄까요.


 가슴이 따뜻해지는 여러 이야기를 읽는다고 가슴이 따뜻해질까요. 물론 책의 광고처럼 메마른 마음을 적셔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온통 추운데 자신의 방에 보일러가 고장 나지 않았다고 만족하는 진리가 삶의 자세가 꼭 책을 통해 얻어야 할 무언가 일까요. 정말 가슴이 따뜻해지는 길은 고통 뒤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한 칸트처럼, 아주 불편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대한민국에 통계로 잡히는 노동자들 중에서만 하루 8명씩 노동재해로 죽고 200명이 다치는 사실을 들어본 적이 있었는지요. 대한민국의 5%가 넘는 장애인들의 한 달 외출 일수가 5일이 채 안된다는 이야기를 아셨는지요. 가깝게는 지하철에서 선로에 뛰어들어 자살을 하는 사람을 치이고도 계속 운전해야 하는 지하철 승무원 분들의 삶도 모르셨을 테니까요. 일상의 소소한 따뜻함과 즐거움을 아는 일은 소중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서 있는 땅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함께 알아야지요.


7. 지갑을 준비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제 주례 선생님께서는 제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주례사를 준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와 찾아뵜을 때, 저와 제 아내를 위한 지갑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너무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만 한 것 같아, 그것이 마음에 걸리셨다고 하셨습니다.


어쭙잖게도 저 역시 글을 마치면서 그런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을 보면, 인간 되기 참 어려운 세상이지만, 우리 괴물을 되지 말자. 는 말을 누군가 합니다. 다른 나라, 다른 시대를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적어도 오늘날의 한국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한국은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을 것 같은,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전쟁터 같습니다.


하지만 지갑을 따로 준비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각자의 방법과 몫이 있겠지요. 당신의 20대에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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