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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섭 Jul 19. 2020

[독서] <낙인찍힌 몸> (염운옥)

공부를 하다 보면, 누군가의 시간에 기대어 내 시간을 아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문헌들을 하나하나 찾아 읽으며 그 맥락을 파악하고자 했다면 10년이 걸렸을 내용을, 그 분야를 업으로 삼아 오랜 기간 읽고 정리해준 덕분에 불과 1주일 사이에 정리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차별, 소수자 건강을 연구하는 내게 이 책은 좋은 지도를 제공해준다. 책 맨 뒤의 40 페이지에 달하는 충실한 인용문헌을 계속 살피며 책을 읽었다. 염운옥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1.

‘피의 순수성’과 ‘상상의 생물학적 특성’에 대한 집착은 인간에게 동물의 혈통이나 품종을 가리키는 스페인어 ‘라사’(raza)를 적용하도록 이끌었다. 1611년 편찬된 최초의 스페인어 사전은 ‘라사’를 두고 말(horse)의 품종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무어인이나 유대인 혈통을 가진 사람을 조롱하는 단어라고 뜻풀이 했다. (p25)


2.

린네의 생물분류와 요한 요하임 빙켈만의 그리스 조각 찬양은 18세기 중반 인종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두 개의 계기였다. 독일 출신의 미국 역사가로 파시즘 연구의 권위자였던 조지 모스는 과학으로부터 미학으로, 미학으로부터 과학으로의 끊임없는 전환과 순환이야말로 근대 인종주의의 특징이었다고 간파했다. 인간 본성과 내면의 아름다움이 신체적 기호로 드러난다는 고전적 미학사상에 따르면 아름다운 몸은 내면의 고귀함과 조화로움의 표현이었다. (p29)


3.

린네에게 ‘자연’을 길들이고 분류하는 일은 ‘민족’에 봉사하는 신성한 의무였고, 나아가 유럽 지식의 산물인 ‘보편적 분류체계’ 속에 지구상 모든 생명체를 기입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었다. (p34)


린네가 인종주의의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가 인류를 ‘피부색’의 기준에 따라 분류한 최초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p35)


4.

빙켈만으로 대변되는 고대 그리스 조각에 대한 독일의 신고전주의 논의는 ‘색’과 ‘문화’를 두 가지 차원에서 연결시켰다. 첫째, 대리석의 흰색은 간접적이지만 유럽인의 흰 피부색과 연결되었다. 고대 예술로 재현된 이상적 신체는 흰 피부색을 지닌 인간으로 전이될 수 있었다. 둘째, 문명이 발전하면 원시인의 바디 페인팅 같은 신체 채색과 장식뿐만 아니라 조각의 채색도 사라진다고 인식되었다. 서구 문명에서 색의 부재는 문명의 높은 발전단계와 연결된다고 봤던 것이다. (p52)


5.

로즈 가족은 크리스의 젊은 육체만 원했던 게 아니었다. 크리스가 표적으로 납치된 이유는 그가 지닌 사진가로서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 때문이었다. 크리스가 찍은 사진은 차별의 아픔을 겪어내면서 생겨난 심미안으로 빛났는데 백인들은 그 재능까지 탐냈던 것이다. (p82)


6.

타이거 우즈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혈통은 8분의 1 백인, 8분의 1 원주민, 4분의 1 흑인, 4분의 1 타이인, 4분의 1 중국인이라고 소개했으나 언론은 그를 그냥 ‘흑인’ 골퍼라고 불렀다. (p87)


7.

‘흑인’ 파농은 내 몸만이 아니라 “내 인종, 내 조상”의 몸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8.

패싱은 흑인의 백인 행세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패싱은 독일인으로 동화하려는 유대인, 일본인과 내선일체 하려는 식민지 조선인, 해외로 입양된 한국인 등이 겪는 문화적 횡당과 교차, 혼종의 문제로 확장될 수 있다. (p99)


9.

노예는 말을 잃어버린 존재다. 읽고 쓰기를 배우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는 것은 물론 주인에게 말대꾸를 해서도 안 되는 존재가 노예다.... 노예가 말을 한다는 것,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노예의 육체에 덧씌워진 열등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다. 이런 의미에서 노예였던 에퀴아노가 자서전을 썼다는 사실은 노예제와 인종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흑인이 원래 열등하다는 부당한 명제를 반박하는 살아있는 증거다. (p120)


10.

오히려 치유 불가능한 트라우마를 너무 쉽게 전유하는 행위는 ‘공감’이 아닌 ‘연민’만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노예를 수동적 주체로 재현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남기지 않을까?.... 이런 노예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 시혜를 베풀어주어야 비로소 인간이 되는 비인간에 불과하다.


11.

프랑스령 카리브해 식민지 생도맹그에서 1791년 시작된 노예 혁명은 1804년 아이티공화국 건국으로 결실을 맺었다. 벅모스는 헤겔을 끌어들여 서구 사상이 자신의 역사를 만드는 과정에서 식민지 경험을 배제해온 방식을 문제 삼았다. 프랑스혁명과 동시에 진행된 아이티 혁명이 철저하게 침묵당하는 과정이야말로 서구 근대성의 반 보편성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벅모스는 서구 학계에 ‘폭탄 던지기’를 한 셈이었다. (p141)


12.

특이한 몸을 지닌 백인은 ‘백인종’의 대표성을 띄지 않는 반면, 흑인은 그들 인종의 대표라고 인식됐던 것이다. (p155)


13.

스피박은 서벌턴을 재현, 대변하는 텍스트에는 ‘빈 공간(blankness)’이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벌턴은 완전히 재현, 대변될 수 없고 완전히 동화되거나 통합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빈 공간’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피박에서 ‘빈 공간’이란 역사 속에서 “실재하는” 서발턴이나 “재현, 대변되지 못 한자들”을 ㅂ락히기 위한 가능한 장소로서의 위상을 갖는다. (p175)


14.

옹호론자는 여성 노예의 도덕적 타락이 ‘흑인의 원시성’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폐지론자는 여성 노예의 성적 타락을 노예제 악습 탓이라고 주장한다. 둘 다 흑인 여성의 성적 타락을 전제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p183)


15.

결국 1935년 확정된 법률에서는 조부모 네 명 중 세 명이 유대인이면 유대인이 되었다. 4분의 1이나 2분의 1 유대인은 유대교를 믿지 않거나 유대계와 결혼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만 독일 시민으로 인정받았다. 이 법이 바로 뉘른베르크 법이었다. (p220)


16.

유대인은 종교적 타자가 아니라 인종적 타자로 보는 시각은 19세기 중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p222)


17.

그러면 이제 유대인은 ‘백인’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유대인은 세파르딤과 아슈케나짐으로 양분된다. 이외에도 에티오피아의 베타 이스라엘과 중동 지방 유대인인 미즈라힘도 있다. 흔히 유대인이라고 하면 백인을 상상하지만, 유대인이 모두 백인 외모인 것은 아니다. 아슈케나짐은 백인으로 볼 수 있지만, 세파르딤이나 미즈라힘은 중동인과 비슷한 외모를, 베타 이스라엘은 명백히 흑인의 외모를 하고 있다. (p225)


18.

결국 유대인 남성 몸 담론의 효과는 양면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유대인 남성을 선천적으로 겁이 많고, 수동적이고, 멜랑콜리하고, 생리를 하는 몸으로 여성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을 유대인처럼 열등한 몸을 지닌 존재로 만들어 남여의 위계적 이분법을 고착화했던 것이다. (p237)


19.

앙겔라 메르켈, 힐러리 클린턴, 미셸 오바마 등은 이슬람 국가 순방 때 히잡 쓰기를 거부하거나 순방국 여성들이 히잡을 벗을 자유가 있는지 여부를 따져 선택적으로 히잡을 썼다. (p283)


카톨릭 미사포와 수녀들의 복장은 문제 삼지 않으면서 왜 히잡만 문제 삼는 것일까?... 무슬림 여성의 복장을 문제 삼는 것은 무슬림 여성의 몸에 대한 개입을 통해 이슬람포비아를 표출하는 방식이다. (p283)


20.

사티 금지법을 제정해 사티 당하는 여성을 구하겠다는 서구 자유주의자 남성과 사티를 힌두의 미풍양속으로 찬양하는 인도 민족주의자 남성 사이에서 정작 사티에 희생되는 당사자 서발턴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사티를 둘러싼 논쟁 구도는 무슬림 여성 베일 논쟁에서도 반복된다. (p289)


21.

스트로우의 발언은 의사 소통에서 대면 접촉을 중시하는 서구의 문화적 감수성을 유일하고 특권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p293)


22.

무슬림에게 실례되는 발언을 지껄인 다음 웃으며 “이봐요. 당신들 무슬림은 왜 그리 유머감각이 없어요? 그저 농담이었다고요.”라고 했다고. 부스는 이런 사소한 공격(microaggression)이야말로 상대방을 숨 막히게 만드는 새로운 형태의 극단주의이며 혐오발언이므로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사소한 것은 결코 사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농담은 농담이 아니라 인종혐오의 배설이다.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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