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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만난 네델란드와 플랑드르 회화

렘브란트와 루벤스의 작품

에르미타주에서 만난 렘브란트

표트르대제가 네덜란드 회화 작품을 구입한 이후로 렘브란트 작품들이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네덜란드 회화 컬렉션으로 전시되고 있다.


침묵의 언어로 말하는 인간 영혼의 여정

에르미타주의 렘브란트의 여러 걸작들 사이에서도 그 깊이로 시선을 붙드는 작품이 있다.

렘브란트 반 레인의 마지막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돌아온 탕자》

이 작품은 성경 누가복음 제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회개와 아버지의 용서에서 찾아볼수 있다.


13-16절 (탕자의 방탕)

"며칠 후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모아 먼 나라로 가서,거기서 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그 모든 것을 탕진한 후 그 나라에 심한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고, 그는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더라."


17-20절 (회개와 결심)

"이에 스스로 돌이켜 말하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들의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20-24절 (아버지의 용서)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들의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더라.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그들이 즐거워하더라."

Rembrandt van Rijn,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1–1669년경, 262 × 205 cm

처음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나는 단순히 명화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순간에 초대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어두운 배경 속에서 빛으로 강조된 두 인물—무릎 꿇은 아들과 그를 감싸 안는 아버지.

이 장면은 단순한 성경 이야기의 재현이 아니라,

렘브란트가 자신의 영혼을 캔버스에 쏟아낸 고백처럼 느껴졌다.


빛의 언어로 말하는 용서

그림의 중심에는 탕자가 있다. 머리를 깎고, 옷은 누더기가 되었으며, 한쪽 신발은 벗겨진 채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실제 작품 앞까지 다가서서 그 벗겨진 신발과 발을 자세히 살펴보니 얼마나 험난하게 지냈는지 알수 있을 정도로 디테일하게 표현되었다.


그의 등은 관람객을 향해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그 굽혀진 자세에서 긴 방황과 깊은 후회가 읽힌다.

피폐해진 육체, 그러나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영혼.


《돌아온 탕자》에서 아버지는 부드럽게 아들을 감싸고 있다.

렘브란트는 이 노인의 손을 특별히 세심하게 그렸다.

왼손과 오른손이 미묘하게 다르다—하나는 힘있고 남성적이며, 다른 하나는 부드럽고 여성적이다.

그것은 마치 힘과 자비, 정의와 사랑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모습처럼 보인다.


빛은 이 손에 머물고, 그림의 나머지 부분은 어둠에 잠겨 있다. 렘브란트의 빛과 어둠의 대비는 단순한 시각적 효과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영혼의 여정을 비추는 내적 빛이다.

그는 '카라바조식 명암법'을 뛰어넘어, 빛을 영적 의미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이 그림에서 빛은 용서의 순간을 밝히는 초월적 존재처럼 느껴진다.


탕자의 모습에 내 삶의 한 페이지가 스쳐갔다.

부모님의 사랑을 구속이라 생각하고 그저 멀리만 자유롭게

떠나고 싶었다. 그렇게만 하면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 틈에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 세상이었는지

느끼게 되는 순간 엄습하는 불안.

뒤를 돌아보니 돌아갈 곳은 가족외는 없었다.


나 역시 세상속의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

내 욕심이 지나쳐 너덜너덜 해진 영혼을 들고 염치없게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돌아왔을때 렘브란트의 작품같은 드라마틱한 장면이 아닌 그저 묵묵하게'돌아왔구나' 무덤덤하게 말하고 받아주셨다.

오히려 화를 낼만도 한데 그러면 더 시원할텐데

작품에서의 아버지와 표현은 달랐어도 마음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조용한 목격자들


같은 장 25절부터는 돌아온 동생을 맞이하는 장면을 본 큰아들이 화를 내며, 아버지께 호소하는데 그 모습까지

담겨져 있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곧게 선 형, 그리고 그 뒤의 목격자들. 특히 형의 얼굴은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다.

수용과 거부, 이해와 판단 사이에서 갈등하는 표정.

그는 이 용서의 장면을 바라보면서도 완전히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내게 가장 힘든것중 하나가 작품의 형처럼 용서이다. 인간적 욕심과 시기 그리고 확신은 포용과 용서를 막는다.

아버지같은 사랑과 용서는 쉽지 않다. 그저 그럴수 있도록 기도하고 구할 뿐이다.


나는 이 인물들 앞에서 생각했다. 우리는 때로는 방황하는 탕자이고, 때로는 판단하는 형이며, 또 때로는 용서하는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렘브란트는 한 장면 속에 인간 관계의 모든 복잡성을 담아냈다.

자전적 고백으로서의 예술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말년에 그려졌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화가로서 성공했고 결혼까지 잘해서

명예와 부를 거머줬었지만 이미 많은 것을 잃게되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탕자였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혹은 용서가 필요했을지도.

그가 이 그림에 쏟아낸 것은 단순한 솜씨나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삶의 고통과 화해를 통과한 깊은 인간적 통찰이다.

캔버스의 물감은 그의 눈물과 섞여 있는 듯하다.

침묵의 대화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앞에서, 나는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경험을 했다.

그림이 나를 응시하고, 내 영혼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위대한 예술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며, 작품은 감상이 아니라 만남이다.

에르미타주에서 만난 렘브란트의 탕자는, 수세기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인간 존재의 근원적 진실을 속삭인다—우리는 모두 길을 잃었다가 돌아오는 여정 속에 있다는 것을.




〈플로라〉는 또 다른 차원의 렘브란트를 보여준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아내와 결혼하고 부와 명예를 얻었던 서른살에 그려진 작품이다.

플로라는 렘브란트의 아내 사스키아를 꽃의 여신으로 분장시켜 그린 그림으로 그녀는 따뜻하고 현실적인 육체를 가진 여인으로 그려졌다. 피부는 투명할 듯 빛나고, 표정은 생명의 기쁨을 담고 있다.

손에 들고 있는 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그녀의 존재와 하나가 된 생명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이 작품에서는 강렬한 색채 대비보다는 미묘한 색조의 변화를 통해 생명의 순환과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여신의 곡선적인 몸매와 부드러운 표정, 그리고 주변을 감싸는 꽃들은 모두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를 이루고 있다


Rembrandt van Rijn,《플로라 (Flora)》, 1634년경, 117.5 cm × 91.5 cm


에르미타주에서 만난 루벤스

육체의 찬가를 그린 플랑드르의 거장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고요한 전시실을 거닐다 마치 그림 속 인물들이 숨을 쉬는 듯한 기운이 전해져 온다.

화려한 색채와 풍만한 육체, 그리고 생명력으로 넘쳐나는 이 작품들 앞에서 나는 루벤스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시몬과 페로〉였다.작품의 배경을 모른채 처음 만났을때는 그림의 주제와 형식에 놀랍기도 했다.

고대 로마의 전설에 기반한 이 작품은 아버지 시몬은 감옥에서 굶겨죽이는 형벌을 받았는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감옥에 찾아와 간수들이 보지 않을때 그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젖을 물려 먹이는 딸 페로의 모습을 담고 있다.

루벤스는 이 극적인 순간을 놀라운 자연스러움으로 그려냈다.

Peter Paul Rubens, 《시몬과 페로 (Roman Charity)》, 약 1612–1615년경, 약 157 × 190 cm

어두운 감옥의 배경 속에서 두 인물은 마치 조각상처럼 빛을 받아 드러난다.

페로의 얼굴에서는 부끄러움이 아닌 결연함이 읽히고 빨간색 옷은 아버지에 대한 효를 나타낸다 그리고 시몬의 검은색 옷으로 둘러싸인 주름진 몸은 죽음의고통의 처지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루벤스는 이 예민한 주제를 통해 단순한 효를 넘어선 인간의 원초적 연결성을 이야기한다. 그의 붓은 육체를 통해 영혼의 깊이를 드러내고, 인간관계의 극단적 순간에서 발견되는 숭고함을 포착한다.


다음으로 마주한 〈바쿠스〉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선사한다.

술과 환희의 신 바쿠스를 중심으로 한 이 작품은 축제와 향락의 정수를 담고 있다.

중앙에 앉은 바쿠스는 이상적인 신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살집이 있고 표정은 취기로 흐릿하며, 자세는 느슨하다. 주변에는 포도와 술잔, 그리고 다양한 인물들이 둘러싸고 있다.

루벤스는 이 장면을 통해 단순한 쾌락이 아닌 삶의 풍요로움과 본능적 기쁨을 찬양한다.

Peter Paul Rubens, 《바쿠스 (Bacchus)》, 1638–1640년, 161.3 × 191 cm


육체를 통한 영혼의 이야기

루벤스의 예술세계를 들여다보며 나는 깨달았다.

그에게 있어 인간의 육체는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었다.

신화든, 종교든, 역사든 그의 주제는 언제나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을 통해 전달된다.


루벤스의 인물들은 결코 차갑지 않다.

그들은 살과 피를 가진 존재들로, 모든 감정과 경험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시몬과 페로〉에서 보이는 극적인 사랑, 〈바쿠스〉에서 넘치는 감각적 기쁨, 이 모든 것은 루벤스가 인간의 육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삶의 다양한 측면들이다.


전시실을 나서며 나는 생각했다. 루벤스의 그림 속 인물들처럼, 우리도 결국 살과 피를 가진 존재로서 매 순간 삶의 무게와 찬란함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음에는 에르미타주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카라바지오 등 이탈리아 회화와 피카소 등 스페인 회화 컬렉션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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