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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멈춤표를 찍고 다시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된다를 위한 변명

한동안 브런치에서 멀어져 있었어요. 마지막 글을 올린 게 언제였나 싶어 확인해 보니 벌써 몇 달이 지났더라고요. 처음엔 정기 연재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는데, 돌이켜보니 그보다 더 깊은 이유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의무가 되어버린 글쓰기

러시아 미술관 연재를 시작할 때는 정말 설렜거든요.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에서 제가 좋아하는 작품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 벅찬 감동과 경이로움을 나누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어느새 매주 정해진 요일에 글을 올려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더라고요. 평일 밤 늦 컨설팅 현장에서 돌아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억지로 키보드 앞에 앉아있으니, 글 쓰는 재미가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러시아 미술에 정말 관심이 있을까?' 하는 의문도 계속 들었고요. 조회수가 평소보다 낮은 날이면 '역시 너무 마니악한 주제였나?' 하며 자신감도 떨어졌어요. 그리고 미술관을 돌며 각 작품에 대해 쓸 이야기들을 메모해 둔 노트를 보니 그 많은 글감들을 어떻게 다 써 내려가야 할지 막막해지기 시작했어요.

바쁜 일상 속에서

사실 요즘 정말 바빠요. 노무사/산업안전지도사로서 제 사업체뿐만 아니라 법무법인, 기술지도법인 명함이 계속 늘어났어요. 다양한 일을 한꺼번에 하다 보니 요즘에는 아침 7시에 PT 하고 나서 8시에 집을 나가서 밤 10시에 집에 들어오고 주말에도 일을 하는 게 잦아졌어요.


그동안의 일들을 일주일의 시간으로 나열해서 얘기해 보면 월요일에는 외국계 제조업 안전보건 자문 회의를 하루 종일 진행하고. 화요일에는 IT회사에서 직무평가 제도 설계 컨설팅을 해요 그리고 수요일엔 경기도 여주 건설현장에서 재해예방기술지도를 실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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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엔 안전보건공단 본부에서 위탁받은 건설업 위험성평가 및 안전보건관리체계 컨설팅을 하고 나서 금요일엔 서비스업의 평가보상 제도 설계 컨설팅을 해요. 이렇게 인사노무에서 안전보건영역까지 하다 보니 일이 더 많아졌어요.


지난달에는 한 제조, 건설업체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해서 급하게 사후 대응 컨설팅을 맡게 되었어요. 고용노동부 감독을 대응하기 위해 현장을 점검하고, 안전관리 체계를 전면 재정비하는 작업을 집중적으로 했어요


그리고 요즘에는 공공기관 안전평가 제도 설계 프로젝트와 수행기관 컨설팅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데, 경기와 전라지역 수행기관의 현황 진단부터 안전보건관리체계 개선까지... 매월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다니다 보니 집에서 제대로 된 글 한 편 쓸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졌어요.

'연말쯤에는 좀 여유가 생기겠지' 하며 계속 미루고 있었는데, 벌써 9월이네요.

그래도 놓지 않은 것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작년부터 시작한 화실만큼은 꾸준히 다니려고 하고 있어요. 처음 유화로 풍경화를 그렸는데, 여러 색을 섞어가며 몇 번이고 덧칠하면서 매력을 느꼈고,

1756567995414.jpg 강원도 어느 숲속길, 유채화


수채화로는 러시아에서 찍어온 러시아 성당, 물감이 종이에 스며드는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 되는 것 같아서 소중해요.

1756567927922.jpg 성 바실리 성당, 수채화

그림 그릴 때는 컨설팅 현장에서의 스트레스도, 글 써야 한다는 부담감도 모두 잊게 되거든요. 붓끝에서 번지는 색깔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져요.


일본 소도시 여행

아 6월에는 일본 다카마스, 도쿠시마 등 시코쿠의 여러 소도시 여행을 다녀왔었네요. 대학원 분들과 3박 4일 렌트해서 다녀왔는데 그 얘기도 여러 도시의 조용한 풍경과 에피소드들도 나누도록 해봐야겠네요.

IMG_20250531_170337.jpg 리쓰린 공원, 다카마스


구독자님들의 따뜻함

브런치를 떠나 있는 동안에도 놀라운 일들이 있었어요. 이전에 올린 에르미타주 그림 글에 지난주에도 좋아요를 눌러주신 분이 계시더라고요. '직장인의 노무사/지도사 자격증 도전기'에는 "저도 올해 노무사/지도사 시험 준비하고 있는데 용기를 얻고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라는 댓글이 달려있었고요.


심지어 구독자 수도 조용히 늘어나고 있었어요. 연재를 쉬고 있는 동안 50명 정도가 새로 구독을 눌러주셨더라고요. 정말 신기했어요. 보잘것없는 제 글을 기다려주시는 분들이 계시다는 게, 그리고 바쁜 일상 속에서도 제 이야기에 공감해 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하고 미안했어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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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심했어요. 매주 정기 연재는 무리겠지만, 제 속도대로 천천히 다시 써보려고요. 어차피 죽기 전까지 써 내려가면 될일 아닌가 편하게 생각해 보려고요.


우선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노무사의 공대 도전과 졸업기'부터 마저 써보려고 해요. 40대 중반에 다시 연세대학교 공대에 입학해서 2년 반을 일과 병행하며 졸업했던 이야기들... 아직 써야 할 에피소드들이 많거든요.


러시아 미술관 이야기도 계속하고 싶어요. 에르미타주만으로도 할 이야기가 산더미인데,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갤러리의 러시아 민족 화가들 작품, 러시아 국립 박물관의 컬렉션까지... 정말 소개하고 싶은 작품들이 너무 많아요.

최근에 제가 좋아하는 러시아 미술 전문가인 이진숙 작가의 '새로고침 서양미술사'도 사서 꽂아놓았는데 언제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무엇보다 그동안 응원해 주신 구독자분들의 글에 좋아요와 댓글로 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받기만 하고 주지 못했던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으로 틈틈이 올라오는 글도 읽도록 하려고요.


잠시 멈춤 표를 찍었던 시간이 오히려 저에게는 필요한 휴식이었던 것 같아요. 의무감에 쫓겨 쓰던 글이 아니라, 정말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진심으로 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거든요.

이제 다시, 천천히 시작해 볼게요. 대신 아주 가끔 정말 이야기하고 싶을 때에요.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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