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31 - 어차피

by 백홍시

세상에 진리라는 것이 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변치 않는 무언가가 있어야 그것에 기대어 살 수가 있고, 하다 못해 그것을 찾아 헤매면서 삶의 지루한 여정을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변치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굳건히 변치 않을 무언가가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만약 진리라는 게 있다면 '이성'이 가장 그것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다. 누구 하나 나와 같은 사람이 없고 무엇 하나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내가 믿을 것은 별로 없지 않나. 내 안에 꿋꿋이 버티고 있는 나의 이성, 그것만이 그나마 믿는다면 믿을만한 것이었다.


지적 허영이 가득한 나로서는 이성을 잃는다는 게 그 무엇보다 두렵기도 했었다. 이성을 잃고 무언가에 맹목적이게 된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공포와도 비슷했다고 할까. 나의 인간됨을 유지하는 것은 이성이라 생각했다.


하루 종일 흠뻑 빠져 듣던 노래가 든 앨범이라도 다른 곡들이 맘에 들지 않으면 사지 않았다. 너무나도 좋아하는 작가의 강연이 있어도 바득바득 어떻게든 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언젠가 우린 서로를 떠날 거야.'라는 마음을 늘 품고 만났다. 깊이 빠져들 것 같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의심하고 거부했다. 무서워서. 나는 어쩔 수 없는 전형적인 회피형 인간이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러면서도 생애 한 번은 이성을 잃고 죽을 것 같이 무언가를 사랑해볼 수 있기를 희망했다는 거다. 일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어떤 존재든지 간에. 한 번쯤은 나도 열정적이고 싶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바람이었지. 감정의 극단을 경험하고 싶다면 이성의 끈을 놓을 수 있어야 했는데. 이성의 끈을 과감히 잘라내고 기존의 나는 오간 데 없이, 감정에 매몰되어 허우적댈 수 있어야 했는데 말이다.



감정이란 작든 크든 어떤 사건에서 발생하게 되는데, 삶이라는 것이 사건의 연속이다 보니 감정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때가 대부분이다. 그럼 그것들 중 어느 것을 택하냐 하는 것은 나의 몫이 된다. 사실 부정적인 감정들에 매몰되는 것이야 그 무엇보다 쉬웠다. 나의 전공분야이기도 하고. 나에게 부정적 감정이란 어린 시절부터 늘 함께 한 소꿉친구와도 같았으니까.


나를 택하라고 줄 서있는 감정들 중에서 가장 익숙한 얼굴이 보이면 나는 늘 그와 손잡고 걸었다. 불안 우울 죄의식 자책감 같은 것들. 같이 걷는 동안에 그는 끊임없이 부정적인 단어들을 속삭였다. 나는 그 말에 하염없이 끄덕이며 걸었다. 점점 지하로 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익숙해서 내심 편안하기도 했다.


반면 긍정적인 감정이라는 것은 늘 생소한 얼굴이었다. 행복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이 가끔 찾아와서 어떤 때는 나더러 이성일랑 놓아두고 머리 풀고 따라오라고 하기도 했다. 그 낯선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의심스러웠다. 잠깐 따라갔다가도 차마 이성을 끈을 놓지 못해 '여기까지만 하자.'라며 되돌아온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 실수로 이성의 끈을 놓쳐버렸다.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큰일 나지도 않았고 오히려 재밌었다. 그는 엄청난 속도로 나를 끌고 처음 보는 곳으로 달려갔다. 생전 가보지 않았던 곳으로.


하지만 아무리 극단적인 감정이라 한들 그 손을 잡고 달릴 수 있는 것은 정말 한 순간인 법. 당연하지만 어떤 감정도 영원하지는 않다. 어차피 내가 정신 차리려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매몰될 수도 없을 만큼 수위가 낮아지는 것이 감정의 파도이지 않은가.


곧 끝날 감정에 매몰되어서 허우적대는 것이 싫었다. 끝난 뒤에 그만큼 땅 밑으로 파고들어갈 것이 뻔하니까. 하지만 어차피 끝날 감정이라면 오히려 마음껏 매몰되어도 되지 않을까. 끝난 뒤에 힘들더라도 그 또한 사라지는걸 뭐. 그렇게 생각하니 감정의 파도에 휘말리듯 사는 것도 지금은 괜찮아 보인다. 한 때 진리라고 생각했던 이성이 없더라도 말이다. 어차피 모든 것은 사라진다. 기억은 휘발되고 감정은 떠밀려간다. 세상에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사람도 한순간에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된다. 그리고 끝이 난다. 모든 것이.


그래서 어쩌라고, 이 당연한 걸 이제 알았느냐고?

아니, 나는 이제야 이 말을 진짜로 받아들일 용기가 생겼다는 말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세상에 진리라는 것이 있을까? 이 모든 글을 써내려 가면서도 나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변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내가 믿고 있는 진리는 이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는다.

절망적인가? 아니, 오히려 희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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