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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홍시 Sep 07. 2021

잡문 127 - 대충 쓴 글

글 쓰기가 싫어서 아무렇게나 대충 써 보려고 한다.

독자 분들께서도 부디 대충 읽어 주시길 바란다.


요즘 창태기가 왔다.(창작+권태기라는 뜻. 아무렇게나 지어낸 말.)

페어가 끝나고 남은 굿즈들을 온라인 스토어에 업로드해서 팔아야 하는데 전혀 하지 않고 있다.

페어 기간 중에 어느 앱의 입점 제안을 받았는데 그것도 한다고 해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아니, 그건 차치하고 페어가 끝나고는 인스타 업로드조차 거의 하지 않고 그림도 그리지 않고 있다.

글도 겨우 몇 자 쓸 뿐. 그마저도 글빨이 떨어져서 결과물도 그저 그렇다.

요즘 하는 것이라고는 팬아트를 그리거나 페이스북에 뻘소리를 쓰는 것이 전부다.

마음속으로는 이것도 저것도 진행하고 싶은데 내 몸은 마음의 소리를 전혀 듣지 않고 있다.

그저 누워서 유튜브나 보고, 거실 창 밖 하늘이나 구경하고, 새벽 1시에 야식이나 먹는다.


얼마 전 본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게으르게 행동하는 것은 그만큼 내가 지쳐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 스스로를 게으르다 탓하지 말고, 지쳐버린 내 몸과 마음이 살아내려고 그만큼 노력하고 있구나-생각하라는 말이다.

그래,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나는 무척 지쳐있는가 보다.

아니, 이 정도면 지친 정도도 아니라고 봐야 된다.

이 정도의 게으름이라면 이건 지친 게 아니라 좀비 수준인 거겠지? 정말이니?

물어봐도 마음은 답이 없다.


마음은 몰라도 내 몸은 확실히 지쳤다.

당연한 일이다. 주 6일 일을 하는데 운동이라고는 눈곱만치도 하지 않고 그나마 챙겨 먹던 비타민조차 먹지 않고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이 살아내고 있는 내 몸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 몸이 지치면 마음도 자연스레 지치게 된다.

어른이 되면 왜 '살기 위해' 운동을 하게 된다고들 하는지 이해가 되는 요즘이다.


무슨 얘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더라.

아, 그래. 창태기.

얼마 전 인스타에 오랜만에 글을 올리고는 내 피드를 주욱 봤다.

정말 난잡하기 그지없는 피드. 그림체고 정체성이고 뭣도 없는, 그냥 내키는 대로 올렸다 안 올렸다 하는 중구난방 인스타 계정.

페어 때 팔로우 이벤트로 가입했던 사람들 중 스무 명이나 언팔을 한 것도 이해가 된다.

나보다 훨씬 늦게 시작하고도 팔로우 수가 몇 배나 되는 사람들의 인스타를 보면서, 나 같아도 나를 팔로우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작자로서의 나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나는 일상 만화를 그리는 사람일까, 일러스트를 그리는 사람일까, 삽화와 글을 만드는 사람일까, 극화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일까.

여러분, 저는 뭐 하는 사람일까요?

정답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스타에 그림을 올릴 때에는 #그림쟁이 태그를 붙이고, 글을 올릴 때에는 #글쟁이 #글스타그램 태그를 붙이지만, 내 인스타는 그림쟁이의 인스타도 아니고 글쟁이의 인스타도 아니다.

프로필에는 '브런치 만화&에세이 작가 백홍시입니다.'라고 적어 놨지만 막상 피드를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최근에는 만화를 전혀 그리지도 않을뿐더러, 글도 잘 쓰지 않고, 그나마 쓴다는 글도 시인지 산문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글 투성이.

나의 창작물들을 비하할 생각은 없지만 정말이지 중심이 없다.


게으름쟁이 취미 창작자.


나를 정의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래, 이 참에 피드 정리를 싹 하고 나의 정체성을 확립해 보자. 내 인스타의 정체성을...!'이라는 생각을 해 보지만 대체 그게 무언지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그저 머릿속으로나 그런 생각을 해 보면서 거실 TV에 유튜브 영상을 틀어 놓고 창 밖 하늘이나 구경하고 누워 있는 것이다.


아무튼 간에 나의 정체성은 없다는 것이 지금의 결론이다.

그리고 그것을 변화시킬 마음을 따라 올 체력도 없다는 것.

그냥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그것에 지나지 않았던 나는 이제 좋아하는 것조차 아닌 사람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아서 속상하다.

나는 창태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대답은, 글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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