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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의 새벽별 Jun 03. 2022

나는 나를 정말 사랑하는가?

인간이 그리는 무늬_최진석

여러분은 지금까지 바람직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바라는 일은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인간이 그리는 무늬>_ 중에서


문사철(문학, 사학, 철학)로 대표되는 인문학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사회는 하나가 아니라 단일 개체들의 총합이다. 그 안에 살고 있는 단일 개체인 인간들은 각자가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각자가 그리는 무늬는 단 하나도 똑같은 무늬가 있을 수 없다.

단 한번 허락된 인생에서 굳이 남과 비슷한 무늬를 그리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그건 자기기만 아닐까.  


어느 책에서 우리나라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이 수치심이라고 적힌 걸 봤다. 그 문장이 와닿았던 것은 나 또한 느꼈던 감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체계와 개념과 이념 아래 전체 속에서 나의 위치와 행위를 규정한다. 수치심으로 학습된 감정은 나이가 들면여러 가지 양태로 모양을 바꾸어 가며 뒤엉키고 분화되어 죄의식이라는 이름으로 마음 곳곳에 자리 잡는다.

집단의 이익보다 나의 이익에 끌릴 때, 이성보다 욕망에 끌릴 때, 보편성보다 개별성에 끌릴 때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죄책감은 다시 뭉게구름처럼 피어난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 다수가 욕망하는 것에 반하는 것은 좋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행복한 사회는 행복한 개인을 만들 수 없다. 행복한 개인들이 합만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의 욕망을 찾고, 나의 욕망에 집중하고, 나의 욕망에 따르는 일.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 진정 '살아있는 나'의 삶을 살고 싶다.

요즘 나의 모든 글 들은 같은 맥락으로 흐른다. '그저 나로 살아가는 것.

익숙한 것과 당연한 것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 나를 홀렸던 장 주네와도 연결되는 일.

최근에 내게 훅 들어와 말 걸었던 [게으름에 대한 찬양], [피로사회], [월든]과도 같은 결을 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듯이 우리는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길을 가고 있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확고부동한 명제 앞에서 나 또한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삶을 향해 가고 있는 중 인 이다. 죽음 앞에서 나는 오직 나에게만 집중하고 싶다.


죽음이 내게 당도했을 때, 스스로가 사랑스럽고 기특해지는 순간을 마주하길 바라본다.

'나는 나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난 집이라는 굴레가, 모든 예절의 진지함이, 그들이 원하는 사람 노릇이, 버겁다.
난 그런 나의 쓸모없음을 사랑한다.
<달의 몰락 > -유하-


연탄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손가락 질 해대도 나는 정말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랬다 저랬다 하는 나도.

끝까지 못해내는 나도.

겁먹고 시작하지 못하는 나도.

아무런 생산성이 없어 보이는 나도.


진심을 다해서  추앙해보고 싶다. 나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나는 나에게 한 번이라도 연탄이었던 적이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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