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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의 새벽별 Aug 09. 2022

방학의 기쁨과 슬픔

나의 어린시절 방학이야기

아이들에게 방학의 기쁨과 슬픔을 물어보니 학교를 가지 않아서 기쁘고, 방학숙제가 있어서 슬프다고 한다. 엄마로서의 나에게 방학의 슬픔은 삼시 세 끼를 해야 한다는 사실과 혼자만의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방학 때 아이들과 함께 놀고 여행 다니는 것은 기쁨이다. 그러나 개학도 엄마에게는 기쁨이다.


방학이다! 야호! 부르짖던 어린 시절.

방학식을 하자마자 곧바로 강원도 고모집으로 갔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두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고 몇 시간을 한 참 가야 도착하는 곳. 높은 산 둘레의 나선형으로 된 일 차선 도로를 돌아 돌아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어린 나는 공포심에 잔뜩 움츠려 들었다. 조금만 운전대를 삐끗하면 굴러 떨어져 버릴 것 같은 좁은 도로 옆으로 뻗은 절벽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마침내 버스에서 내리면 긴 출렁다리가 나를 맞이했다. 조금은 무섭고, 조금은 흥분되는 출렁다리를 반쯤 건너가면 고모가 쏜살같이 달려 나와 나를 끌어안으며 반가움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엄마의 1.5배쯤 되는 푹신하고 푸근한 고모품에 안기면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한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끼곤 했다.

결혼한 지 십 년이 넘었지만 아이소식이 없던 고모 부부에게 나는 친딸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바쁜 아빠와 다정함과는 조금 거리가 있던 엄마보다 재미있는 고모부와 따뜻한 고모가 더 좋았다. 어린 시절 방학이 좋았던 이유는 단지 학교를 가지 않고 놀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고모집에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강원도 산골에서 고모네는 유원지 비슷한 것을 운영하고 있었다. 겨울에는 손님들이 거의 없이 조용했고, 여름에는 사람들이 꽤 많이 드나들었다. 여름에는 그곳에서 혼자 냇가에 돌로 댐을 쌓으면서 놀거나 고모를 도와 손님들에게 서빙을 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어린아이가 상추쌈을 가지고 오면 귀엽다는 칭찬과 기특하다며 한 번씩 주던 1000원의 팁이 나를 으쓱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손님이 많이 없을 때는 노래방 기계를 켜서 혼자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불렀다. 나의 애창곡은 '바위섬'(이 노래를 어떻게 알 게 된 것인지 의문이다.), '칵테일 사랑', '나는 문제없어'였다. 늘 이 세곡을 반복하며 메들리처럼 불렀다. 할머니와 고모네, 그리고 손님들이 박수를 치며 앙코르를 외쳤다.(엄청 내향적인 아이였는데 고모집만 가면 없었던 외향성이 산의 정기를 받고 피어났다보다.) 주중에 한 번은 커다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서 갓 삶은 옥수수를 팔려고 오는 할머니가 계셨다. 수확하자마자 삶아 알이 보드라운 애기 옥수수를 한 입 베어 물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몇 개를 해치우고 말았다. (지금의 나는 옥수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옥수수를 먹어도 그때의 맛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30분가량 차를 타고 읍내로 가서 일주일 내내 기다리던 하드를 먹었다. 꿀맛 같던 하드의 맛도 지금은 어디서도 맛볼 수가 없다. 사방이 온통 초록빛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냉동실에서 꺼낸 얼음이 금세 녹은 듯한 계곡물이 흐르는 강원도의 여름은 내게 행복과 힐링 그 자체였다.


반면에 겨울의 강원도는 신비로운 이 숨어있는 왕국이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게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눈싸움에 눈사람 만들기는 기본이었고, 눈으로 나만의 세상을 만드는 것에 홀딱 빠지곤 했다. 고모부가 뱀술을 담그려고 잡아온 뱀을 볼 때마다 기겁했던 일과 고모가 구워준 고기를 먹고 너무 맛있어서 무슨 고기인지 물었다가 개구리 뒷다리인 줄 알고는 엉엉 울었던 일이 아직까지 생생히 기억 속에 남아있다.

어린 시절의 방학은 슬픔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는 완전무결한 기쁨의 시간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은 더 지난 후, 지금의 방학은 내게 슬픔이 조금 묻어나 있는 기쁨의 시간이다. 더위에 지쳐가면서도 그때의 여름을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있어 기쁘고, 그때의 고모가 지금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이라서 슬프다.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100번도 넘게 생각했던 고모는 지금의 내 나이쯤에 늦게 발견된 암과 갑작스러운 전이로 인해서 세상을 떠났다. 자식도 없이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게 된 고모의 장례는 조용히 치러졌다. 학기 중이었고, 멀었고, 어리다는 이유로 어른들은 나를 참석시키지 않았다. 고모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떼쓰지도 울지도 않았다.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나 보다.


애도를 제때에 하지 못하면 정서적 반응이 지연되어 한참 후에 나타나기도 한다는 걸 읽은 적이 있다. 그런 이유인지, 나이가 들어가고 있어서 인지 모르겠지만 몇 해 전부터 부쩍 고모 생각이 많이 난다. 방학이 될 때마다, 여름의 냇가를 마주할 때마다, 옥수수를 볼 때마다, 강원도 지명을 들을 때마다, 개구리를 볼 때마다.

아직도 선명히 떠오르는 고모의 얼굴이 오늘은 문득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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