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찰나의 새벽별 Sep 23. 2022

존재함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_파커 J. 파머

이 책은 필사 각.

진짜 오랜만에 또 하나의 인생 책을 만났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의 저자, 파커 J 파머가 일흔을 넘기며 나이 듦에 관하여 사유한 책이다. 올해 공부했던 세미나는 결국 이 책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모든 것이 마치 예정되어 있었던 것만 같다. 지금 읽고 있는 책들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은 점점 하나로 모아지며 명확해지고 있다. 니체를 만난 것과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를 만난 것은 우연 속에 정해진 필연인 것 같다.


“책은 도끼다”라는 말이 진실이다. 커다란 망치가 내 머리를 내리찍으며 산산조각을 냈다.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녹슬고 오래되어 단단히 굳어버린 문이 처참히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나는 빛을 보았고, 그 빛을 따라 걸어 나오는 중이다.


아, 그렇다. 이제 생각난다. 나는 어떤 태양계 한가운데 있는 태양이 아니라는 것. 스스로를 거기에 두려고 안달하면서, 나는 특별하고 내 인생도 특별한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우긴다면, 아마 절망 또는 망상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만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 새와 나무보다 더 중요하지도 덜 중요하지도 않다는 것을 이해할 때, 평화는 찾아온다. 새와 나무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안다. 그들은 삶의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다.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_파커 J. 파머_36쪽)


‘나는 무엇인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지금까지 나를 괴롭혔던 질문들이다.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의식이 비대해진 결과였던 것 같다. 의미 있는 삶을 통해 누군가에게 혹은 세상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허영과 오만이었다. 인간은 자신 스스로를 구원하기도 힘든 존재이다.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로 연결되는 말이 아니다. 나는 그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모로서의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내가 키우는 대로 아이들이 커간다는 생각은 자만이다.


니체는 근대에 생겨난 ‘이성’과 ‘자유의지’의 개념이 인간을 괴롭게 만들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내가 의지만 내면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그 착각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는 자책감으로 바뀌어 돌아온다. ‘존재함으로써 생각한다’라는 이성의 발견은 삶의 의미를 묻는 함정에 빠지게 만들었다. 함정으로 빨려 들어가면 다시 헤어 나오기란 쉽지 않다. 그곳에서 나는 겨우 건져졌다. 책이 문을 부숴준 덕분이다.


빛을 따라 새로운 길을 나선다. 이제 막 길에 올라선지라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빈곤하여 더 이상의 설명은 어렵다.(앞으로 차츰 찾아보고 언어로 적어내 볼 것이다.) 다만 그토록 찾아 헤맸던 삶의 의미 따위는 더는 찾지 않으려 한다. 사유하지 않고 막살겠다는 것은 아니다. 깊은 사유는 중요하다. 그러나 삶과 존재의 의미에 대한 것은 나의 소관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는 그저 존재하는 것 중에 하나일 뿐이다. 존재하는 것 자체로 반짝반짝 빛난다. 그것은 동물과 자연도 비등하다. 인간은 우월한  그 무엇이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은 존재함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각의 문맹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