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와 관계 맺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팁 하나 - 프라하 팁투어
우리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이슬비 내리는 프라하를 조금 더 걸었다. 이윽고 중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까를대학교 교문 앞에 선 우린 암전과 침묵을 깨고 나올 S를 숨 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은 우산을 쓰고 있었고, S는 비를 맞으며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미 나의 우상이 되어버린 S가 비를 맞으며 투어를 이어가고 있는데 내가 고까짓 비를 피하기 위해 우산을 펼친다는 것은 말이 안됐다. 그래서 난 가방 속에 우산이 있는데도 펴지 않았다.
인생을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하루하루를 일어나는 그대로 살아 나가라.
바람이 불 때
흩어지는 꽃잎을 줍는 아이들은
그 꽃잎들을 모아 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꽃잎을 줍는 순간을 즐기고
그 순간에 만족하면 그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인생'-
나는 지금 나의 어려웠던 순간마다 살며시 내게 다가와 위안을 건네주고 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다녔던 대학 앞에 서 있었다. 말이 되는가? 내가 릴케가 수 없이 드나들었지도 모르는 그 대학 교문 앞에 서 있다는 것이 말이다. 요즈음 프라하대학교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리는 까를대학교가 까를4세에 의해 1348년 창학된 이야기에서부터 이 학교 출신인 프란츠 카프카의 이야기로 비 내리는 까를대학교 교문 앞은 이미 소리 없이 술렁이고 있었다.
카프카의 글을 사랑하여 그의 책 1Q84의 초반 배경이 프라하가 되기까지 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이야기에 이어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와 타락에 대해 강론한 죄 등으로 종교재판 후 화형 당한 얀 후스 신부님에 관한 이야기는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는 내 연약한 신앙을 살며시 건들고 있었다.
20대 중반 카피라이터가 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공고, 공대를 나온 난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도 읽어보지 못한 독서 취약계층이었다. 그래서 빈약한 내 독서량의 자격지심을 느낀 나는 지적 허세를 부리기 위해, 취업을 하기 위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책에 대해 기억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내용이 매력적으로 어려웠다'이다. 아무튼 그 밀란 쿤데라 역시 이 대학 출신이라니 마치 오래전 친구를 오랜시간이 지난 후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 그런 반가움이었다. 참 재밌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그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그 어려운 책을 10년 전에 접했던 이유가 오늘 S의 이 이야기를 더 흥미롭게 듣기 위해 깔린 복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렇게 인생이 알 수 없는 복선들로 수두룩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내 가슴과 영혼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몽롱해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까를대학교 앞에서의 S의 말과 눈빛은 열정보다는 진심에 가까웠다. 뭐라고 형언할 수 없지만 우리가 LOVE와 LIKE를 사전적으로 구별하지 않고 체험적으로 구별하는 것처럼, 난 그 날의 S를 열정보다는 진심으로 기억하고 싶다. 열정과 진심이 비슷하 게 닮아 있기에 헷갈릴 수 있지만 더 깊은 감동과 울림은 열정보다는 진심이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S를 진심의 바운더리로 데려 오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장소를 옮겨 우리는 스타포브스케오페라극장 앞, S는 그 외우기도 힘들었을 극장 이름을 모국어처럼 말했다. 얼마나 연습한 것일까? 난 그 헤아릴 필요도 없는 그 시간들을 헤아렸다. 그리고 우리가 S의 투어에 감화되어 감히 그 극장 이름을 외우려는 찰나 S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진중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말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외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이 극장 이름까지 외웁니까.
우리 그냥 이 극장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1787년 작곡한...
아니 작곡자 모차르트가 직접 작곡하고 지휘한...
아니 그냥 S극장으로만 기억해요.
그래도 돼요"
"그리고 저 뒤에 보이는 아빠유령동상...
사실 지금 제가 말씀 드릴 수도 있지만,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시거나, ‘돈죠바니’오페라 보시면 어떤 의미인지 아실 수 있어요.
당신과 프라하가 지금 말고도 오래 만나실 수 있도록 지금은 말씀 안 드리고 싶어요.”
그 날 난 S를 통해 내 인생과 아무 상관없던 프라하의 한 오페라극장과 드보르작, 모차르트, 프란츠 카프카를 내 마음으로 데리고 오고 만 것이다. 38년 동안 그 누구도 형성해내지 못했던 클래식과 나, 서양문학과 나 사이에 진실한 관계맺기를 오늘 단지 3시간 만난 S가 형성해 낸 것이다. 난 S를 만나기 전까지 내가 내 남은 인생에서 드보로작의 교향곡을 내 손으로 찾아 듣게 될 것이라곤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드보르작의 신세계교향곡 4악장을 사랑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었다.
팁투어팀은 잠시 후 바출라프 광장 위, 체코의 수호성인인 성 바츨라프 기마상 앞에 서 있었다.
S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의 한 대목을 사랑하는 연인에게 쓴 연애편지마냥 낭송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녀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1Q84를 사랑하고 있는 듯 보였다.
1926년의 체코슬로바키아를 상상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오래도록 이어진 합스부르크의 지배에서
마침내 해방된 사람들은
카페에서 필젠 맥주를 마시고 쿨하고 리얼한 기관총을 제조하며
중부유럽에 찾아온 잠깐의 평화를 맛보고 있었다.
프란츠 카프카는 그 이 년 전에 불우한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곧이어 히틀러가 어디선지 불쑥 나타나
그 아담하니 아름다운 나라를
눈 깜짝할 사이에 덥석 집어삼켰는데
그런 지독한 일이 일어날 줄은 당시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역사가 인간에게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명제는
'그 당시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1권 중에서
눈을 감으면 1968년, 소련의 탱크 앞에서 비폭력으로 평화와 자유를 외치던 하벨과 '우리가 프라하의 봄을 열겠다'는 의미로 열쇠를 흔드는 수많은 군중들이 보였다. 그러나 끝내 소련의 탱크 앞에서 '프라하의 봄'은 실패로 돌아가고 있었고 이윽고, 분신자살한 두 학생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즈음 내 눈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로마와 피렌체에서도 역사와 관련된 가볍지 않은 투어들에 참여했었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었다. 사실 투어를 받다 울었다는 것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얼마나 민망한 이야기인가. 아무튼 왜였을까? 나는 왜 프라하 팁투어에서만 울었을까? 매력적인 가이드 때문에 아니면 가이드의 놀라운 스토리텔링으로 능력 때문에 아니면 프라하가 가진 슬픈 역사 때문에.. 아마도 이 모든 게 눈물의 원인이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동일시였을 것이다. S의 인문학적 교양 위에 펼쳐지고 있는 'S의 진심'이 나를 체코인으로 만들어 버린 게 아닐까? 까를대학교가 서울대학교보다 친숙해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알아봤어야 했다.
1989년 11월 17일 금요일, 또다시 바출라프광장 위에는 '프라하의 봄'때처럼 까를대학교 학생들을 주축으로 대규모 민주화시위가 시작되고 11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은 당 권력과 1당제 폐지를 발표했다. 이렇게 혁명은 성공한 것이다. 바로 이 혁명이 무혈로 체코슬로바키아에 민주정부를 가져다준 부드러운 혁명, 벨벳 혁명이다.
사실 벨벳 혁명이 나의 이번 여행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겠지만, 나는 이미 프라하를 사랑하고 있었기에, 나는 아직도 진행 중에 있는 내 조국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기에 체코 독립과 민주화 이야기는 체코만의 이야기가 아닌 내 조국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벨시장을 지나 600년간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천문시계를 바라보면서 나는 문득 '아무것도 늦지 않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시간은 화살같이 지나고 우린 프란츠 카프카의 생가 앞에 서 있었다. 맛집을 추천해주지 않는다는 S는 마지막으로 맛집 이외에 많은 정보들을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하였다. 난 두 가지를 놓고 망설였다. 하나는 팁투어의 금액으로 얼마를 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S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S가 환전 사기와 호텔 내 소지품 분실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햄릿보다 더한 고민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어떤 남자는 어떤 여자를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며 '결혼'이라는 단어를 행복하게 기억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또 어떤 배우자를 만나 싸우고 또 다투는 힘든 결혼생활을 영위하다 '결혼'이란 단어를 들으면 '결혼은 미친짓'이라며 침을 티기며 욕을 하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사람은 같은 것을 행해도 함께한 대상에 따라 다르게 경험한다.
여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행에서 '나'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이지만 여행에서 만나게 되는 인연 역시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것인지. 만일 그 날 내가 S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같은 팁투어라도 다른 가이드분이 나왔더라면 나는 지금 프라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다들 자신만의 여행을 기억하는 단서가 있을 것이다. 난 여행을 사람과 진심으로 기억하는 편이다. 아마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날 누가 내게 '프라하'라는 세 글자를 말한다면 난 나도 모르게 드보르작, 카프카, 하루끼, 모차르트, 바출라프, 까를4세, 하벨이 떠오르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난 S를 떠올릴 듯 싶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여행이 끝나고 자동으로 기억나는 것들은 아마도 모두, 진심의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이 글은 2016년 1월 어느 날 팁투어 가이드 심희정님께 투어를 받은 '글 쓰는 만두'가 감동받아 자발적으로 올리는 여행기로 프라하 팁투어팀과는 어떠한 관계나 관련이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다시 한 번 심희정가이드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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