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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 nest Dec 21. 2020

기획자의 비극

잘난 사람을 찾아다니는 일

나는 90년대생이다. 나와 연배가 비슷한 주변 사람들 (위아래로 5살이라고 하겠다) 대화 키워드라고 한다면 결혼, 전세, 주식, 퇴사, 건강, 자아실현 등이 있다. 이중에서는 평생의 고민거리인 것들도 물론 있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어느 정도 사회생활에 대한 패턴과 경험 등이 쌓이면서 아 이대로 가다간 죽도 밥도 안될 것 같다는 걸 깨닫는 이들이 많다. 예를 들면 지금 내 직장에서 착실히 월급을 받으면서 5년 뒤에는.. 암울하다. 물론 이건 단순히 직장만 다녔을 때 얘기다. 그건 고정값이다. 받을 수 있는 연봉과 진급 가능한 범위가 정해져 있으니 말이다. 그럼 대안으로 여러 가지를 떠올릴 것이다. 이직이나 재테크 혹은 퇴직 후 자영업을 시작한다던지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바탕으로 여가 시간을 쪼개 새로운 창작활동에 임하는 것 등이 있다.


올해 퇴사의 고민을 여러 번 넘긴 후, 이제 나에게 회사는 마치 옛 연인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한 때는 열렬하게 사랑했지만 다시 전처럼 사랑할 수 없고, 편하게 친구처럼 지낼 수도 없다. 애초에 친구로 지냈다면 더욱 오래 함께 즐겁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일에는 열과 성을 다하지만 이제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서 회사를 망치든 못이든 상관이 없다. 더 이상은 내가 회사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나는, 작년까지만 해도 언제까지 회사를 다녀야겠다는 마음이 없었다. 그냥 별 일이 없으면 일단은 계속 다니겠지 싶었지만, 언젠가는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직을 하거나 자영업을 할 거다, 하겠지? 나는 대학시절 다른 친구들과는 매우 다른 소위 말해 별종이었다. 생각해보면 대학시절뿐만 아니었다. 언제나 별명이 돌아이, 사이코 등 특이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들로 불려 왔다. 일단 한국 대학생들이 가진 최대의 관심사는 취업이다. 근데 나는 취업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 명확했고 급여나 복지, 직장의 위치 등은 중요하지 않았다. 근데 경력직 이직이란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웬만한 취업준비만큼이나 준비할 것들이 많더라, 기본적으로 경력 이직은 스페셜 리스트의 영역이 아니고서는 쉽지도 않고 고용주 측에서도 여러모로 어려운 결정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정말 속는 셈 치고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 이상 내가 이직할 일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럼 자영업인데 지금으로서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회사 일 말고 한 일이라면 이렇게 뻘글을 쓰고 두 권 정도의 책을 냈다. 예전에는 독립 패션 잡지를 1년 정도 만들었고, 여기저기 다양한 일에 발만 담그고 다녔다. 결과적으로 별 볼 일 없는 놈이다. 지금 하는 일이라곤 잘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것뿐이다. 기업의 가치나 방향성과 잘 맞는 창작자를 찾아서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커뮤니티 관련 업무를 하거나 기획 업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고민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일의 큰 단점 중 하나는 잦은 미팅과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로 인한 에너지 고갈도 물론이지만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다. 이 직업은 특성상 이 바닥에서 잘하는 사람을 찾고 혹할만한 기획으로 말을 건네는 게 일이다. 그리고 하루에도 여러번 세상 사람들의 놀라운 감각과 능력에 감탄하며 이 세상의 미래는 밝지만 내 미래는 그들과 다를 것 같은 느낌을 느끼는 것, 결국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생산력이 나에게는 없다. (나는 빵을 구울 줄은 알지만 밀가루를 만들 줄은 모른다. 혹은 나는 밀가루를 만든 법은 알지만 농사는 지을 줄 모른다. 이런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다른 '사람'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행히 이 세상에는 아주 많은 사람이 있지만, 내게 회사라는 배경과 인프라가 없으면 그들이 나와 무언가를 함께할 이유가 있을까 싶다.


개인적인 고민을 공개적인 곳에 쓰는 이유는 아무래도 인류가 외계인을 찾는 것처럼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아무도 없는 숲에 외치는 그런 마음과, 반대로는 비슷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위안을 건네는 조금의 염치 있는 마음 같은 거랄까,


그렇지만 실제로 인적 커뮤니티의 코어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주로 기획자나 기자들이 많기 때문에 누군가는 이런 인적 커뮤니티와 흐름과 사람을 읽는 인사이트를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할 수 있다는 작은 위안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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