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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범수 Feb 28. 2019

국가지도자의 언어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3년 2월 취임식에서 3가지 국정 운영 방향을 제시했다. 그것은 경제부흥과 국민행복 그리고 문화융성이었다. 누가 딱히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직관적으로 '느닷없음'을 느꼈다. 부흥과 융성이란 단어의 낯섦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국어사전에 있지만 그리고 누구나 그 뜻은 알고는 있지만, 현실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일련의 단어들을 연속해서 '발굴해' 냈는데 대표적인 것이 원흉이나 혁파, 정화 등이다. 그리고 그 단어들에는 일관된 어떤 기운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고, 그것은 대체로 기분이 좋지 않은 것들이었다. 대통령의 언어 습관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21개월 만에 우리는 그의 언어습관에 완전히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 얼마 전 문래동 철공소 골목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실로 놀라운 단어 하나를 던졌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나이가 마흔 정도 되지 않았다면 그저 뜻대로 해석되는 평범한 단어, 그러나 1980년대를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왠지 숙연하다 못해 주눅 들게 되는 '정화(淨化)'라는 두 글자.


박 대통령은 철공소 골목에서 청년창업가 한 명을 만났다. 그의 아이디어 상품은 다소 섬뜩한 것이었는데, 좀도둑들이 아파트 가스관을 타고 침입한다는 데 착안해 가스관을 아예 '철제 가시'로 두른 무시무시한 물건이었다(사진을 검색해 확인해보라. 정말 무섭게 생겼다). 박 대통령은 그것을 보고 "아이디어가 범죄 예방도 하고 사회를 정화시키는 데도 기여하는 바가 큽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무심코 던졌을 '정화'라는 단어는 강물이 다시 깨끗해진다거나 불순물을 제거해 순수하게 만드는 일 등을 가리키는 평범한 말이지만 '사회'라는 단어와 합쳐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30여 년 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가 취약한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벌인 '사회정화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수많은 눈물과 피로 얼룩진 그 당시의 사회정화는 국가폭력, 공포정치의 상징으로 우리 머릿속에 각인돼 있다.


박 대통령이 정화라는 단어를 끄집어낸 것에 대단한 의미를 두자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저 그렇게 대충 넘기기에 그 단어가 주는 두려움은 작지 않다. 우리는 지난해 2월 대통령 취임사에서부터 그런 기미를 보았다. 부흥이나 융성이란 단어가 주는 '느닷없음'에서 시작된 이 느낌은 국가개조에 이르러 상당히 구체화됐다. 이후 등장한 적폐, 혁파, 원흉 그리고 최근의 단두대까지, 이런 단어들을 가로지르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국가개조라는 말이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라며 한 야당 국회의원이 문제 삼자 박 대통령은 그것을 '국가혁신'이라고 바꿔 쓰기 시작했다.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의미의 개조와 달리, 혁신이란 말에는 내적ㆍ외적 에너지를 융합해 스스로 진화를 모색한다는 느낌이 강하다는 측면에서 두 단어가 담고 있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야당 의원의 조언 한 마디에 그렇게 바꿔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면 애초부터 박 대통령이 권위주의적인 국가개조를 염두에 둔 건 아니란 생각도 해본다. 그저 1970, 80년대를 살아온 한 자연인이 체득한 단순한 언어습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겠다.


그런데도 자꾸 박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토를 달게 되는 건 언어가 사람의 생각을 담아내는 그릇이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 때문이다. 더욱이 지도자의 언어는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뜻과는 사뭇 다른 의미를 가진 정화나 개조와 같은 말들에서 풍겨 나오는 암울한 무엇, 국민을 통제하고 감시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가치관 혹은 그렇게 봐야 할 정치적 필요성, 그것은 가시 돋친 가스관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들이며 우리가 그것에 점점 길들여져 가고 있음은 더욱 두려운 일이다. <아시아경제. 2014년 11월 27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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