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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범수 Mar 05. 2019

차라리 장관들의 받아적기를 허하라

<토론하지 않고 일방적 지시만 있는 회의. 박근혜 정부의 의사소통 시스템을 비판할 때 쓰이는 단골 소재다. 언론이 자꾸만 그 지적을 하자, 박근혜 전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받아적기'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후 참모들은 회의 시간 내내 대통령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러면 '레이저'를 맞을 확률도 늘어난다. 왜 그런 식의 회의일 수밖에 없었던가, 그것은 결론이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정해졌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몇 년 뒤에 밝혀졌다.>




<아시아경제. 2014년 7월 23일 자.>


"적는 척이라도 해라." 윗사람의 말씀을 받아 적는 것은 경청하고 있으며 머리에 새기겠다는 표시다. 건성으로 듣는다는 오해를 사지 않으려면 적는 척이라도 해야 하며, 이것은 윗사람에 대한 일종의 예의로 우리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고 있다. 눈과 손을 이용해 종이에 써봄으로써 그 내용을 더 잘 숙지하려는 목적도 있겠다. 따라서 받아 적는 행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박근혜 청와대의 수석비서관 회의 모습. 그들은 대체로 잘 받아 적었다. 그중 한 비서관의 꼼꼼히 기록된 수첩은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의 운명을 바꿨다. 사진=청와대


그럼에도 우리가 박근혜 정부 공무원들의 받아 적기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상징하는 상명하복 식(式) 국정운영 스타일, 토론 없는 일방적 지시 혹은 불통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들어 소통을 강화하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듣는다. 장관이나 청와대 참모들로 하여금 서면이나 유선이 아닌 대면보고를 더 자주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임기 내 한 번도 대통령과 독대한 적 없는 장관이 있다는 게 우선 놀랍지만, 박 대통령이 오랜 습관을 고치려고 마음먹었다는 소식은 기대감을 줬다.


소통을 강화하겠다는 데 딴죽을 걸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단골 지적을 수용한 것이 과연 마음속 깊이 그 내용을 납득하고 받아들인 결과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받아들일 만한 단서는 최근에도 있었다.


박 대통령은 후임자가 정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면직시켰다. 곧 바뀔 장관으로서 국무회의 등 공식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불편할 수 있으니 그에 대한 배려로서 그렇게 했다는 청와대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박 대통령이 중앙부처의 업무공백보다 장관에 대한 배려가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리도 없다.


청와대의 설명보다 더 유력한 해석은 유 전 장관이 대통령의 심기를 여러 번 건드렸기 때문이란 것이다. 국무회의에서 내각 총사퇴를 주장했다가 핀잔을 들었다거나, 인사와 관련해 청와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을 고집했다는 것 등이다.


박 대통령이 장관들의 대면보고를 받겠다는 것은 일방지시가 아닌 토론에 의한 정책결정을 강화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고 말하는 장관이 미움을 사는 정부에서 진정한 토론은 기대할 수 없다. 대면보고가 이루어진다 해도 이런 식이라면 서면보고와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 세종시에서 청와대로 이동하는 장관의 소중한 업무시간만 낭비할 뿐이다.


22일 박근혜 정부 2기 내각의 첫 국무회의가 열렸다. 장관들은 박 대통령의 모두발언을 받아 적지 않았다. 이것도 변화의 조짐인가 싶었지만 거리가 멀었다. 대통령은 말하고 장관들은 고개를 떨군 채 받아 적는 모습이 불통의 상징처럼 거론되자 청와대는 회의 후 장관들에게 속기사가 받아친 발언록을 제공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제 받아 적을 필요가 없게 된 것이지 그들이 소통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오히려 윗분이 말씀하시는데 적는 척도 하지 못하게 된 장관들은 그 자리에 앉아있기 불편했을 것이다. 겉모습만 바꿔 새롭게 보이려는 것이라면 차라리 장관들에게 받아 적기를 허하는 편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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