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하는 소리일까 꼭 따라야 할 경고일까
진찰실을 나서는 환자의 뒤통수에, 약봉투를 받아 드는 면전에,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술 드시면 안 돼요." 사람에 따라 곧이곧대로 따르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일상적 조언쯤으로 무시한다. 술자리 동료가 "괜찮아 조금은" 혹은 "술이 균을 소독해준다"는 농담을 던질 때, 살짝 헷갈리는 것도 사실이다. 정말 치료 중 술을 마시면 큰 일 나는 것일까. 어떤 질병은 괜찮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뭘까.
◆'피 본 후'에는 절대 금지!
대표적 '금주령'은 치과의사가 내린다. 통상 관혈적(觀血的) 즉 피가 나는 시술을 한 후 그렇다. 피를 본 환자들은 무서워서라도 대부분 이 명령을 잘 따른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는 핑계 후, 응급실로 실려 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치과의사 황성식 씨는 "치아를 뽑고 응급실로 향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금주 등 주의사항을 지키지 않은 경우"라고 말했다.
모든 관혈적 수술이 마찬가지지만 특히 입 안에서의 지혈은 매우 중요하다. 피부가 아니라 '점막 조직'인 입 안은 모세혈관이 잘 발달돼 있어 지혈이 쉽지 않다.
술을 마시면 혈관이 확장되고 피가 빨리 돈다. 심장이 피를 펌프질 하는 속도도 빨라진다. 얼굴이 빨개지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치아를 뽑아 파이프(혈관)에 구멍이 났는데, 술을 마셔 피를 '더 많이, 더 빨리' 공급해주니 구멍을 막기 어려워지는 원리다.
통상 발치를 했을 경우엔 1주일 정도 금주해야 한다. 지혈이 됐어도 완전히 아문 상태가 아니라면 음주로 혈관 내 압력이 높아져 다시 터질 수 있다. 충치치료나 교정 등은 음주와 관련 없지만 스케일링 후 피가 났다면 마찬가지 이유에서 아물 때까지 금주해야 한다.
◆술은 보약의 기운을 떨어뜨릴까?
'보약을 먹고 있다'는 말도 술자리에서 가장 많이 비난받는 '핑곗거리' 중 하나다. 보약과 술은 어떤 관계일까.
한의사 한동하 씨는 "보약은 약한 기운을 높이거나, 강한 기운을 떨어뜨리기 위해 먹는 것인데 이 조화를 술이 깰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기본적으로 술은 '화(火)'의 기운을 갖는다. 즉 자신이 '화' 기운을 가진 보약을 먹는다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고, 반대라면 약발을 떨어뜨린다고 보면 된다. 또 보약이란 것은 간에 부담을 주기 마련인데, 술을 대사 하는 데 간의 힘을 다 써버리면 정작 보약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고 한다.
한편 보약을 먹고 있든 아니든,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셔야 한다면 자신의 체질에 맞는 술을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 '냉'이 많은 사람은 위스키, 소주, 따뜻한 정종 등 열 기운을 가진 술이 좋다. 반대로 열이 많은 사람은 음기가 많은 탁주, 맥주가 낫다. 물론 취하지 않을 정도의 양을 전제로 한다.
보약 외 한방 치료에서 술과 관련된 시술은 뜸, 침 치료가 있다. 뜸 치료의 경우 몸에 '화'를 넣는 것이므로 술을 마신 상태에서 받으면 '화'가 너무 많아질 수 있다. 그 외 배고픈ㆍ부른 상태, 성행위 후 침이나 뜸 치료는 금기다. 쇼크가 올 수 있다. 치료 전 후 최소 2시간 안에는 이런 음식을 먹거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일부 약은 치명적 결과 초래하기도
약사의 금주령도 당신의 생명을 위한 조언이다. 가장 치명적 조합은 일부 항생제와 술의 만남이다.
질염 등 감염증에 사용하는 메트로니다졸(metronidazole)이란 항생제와 술을 함께 먹으면 디설피란 반응(disulfiram reaction)이 나타날 수 있다. 구토, 구역을 포함해 혈압, 호흡기능에 중대한 부작용을 유발한다.
디설피람은 알데하이드가 체내 쌓이도록 해 금주를 유발하는 약인데, 술과 함께 복용하면 그 효과가 극대화돼 치명적이다. 메트로니다졸뿐 아니라 세포테탄, 세파만돌, 목살락탐, 세포페라존 등 세팔로스포린 2세대 항생제도 디설피란 반응이 나타날 수 있어 절대 술을 마시면 안 된다.
감기약도 술과 상극이다. 감기약에는 통증을 조절하기 위해 소염진통제를 흔히 넣는데, 이 약들은 위 관련 부작용이 많다. 알코올이 위에서 흡수되므로 위 손상 위험이 증가한다. 진통제 타이레놀은 위장장애는 적으나 간에 큰 부담을 준다. 감기약 속 항히스타민제는 신체의 민첩성을 떨어뜨리므로 음주로 인해 그 효과가 배가될 수 있으니 주의한다.
케토코나졸, 이트라코나졸 등 간독성이 있는 무좀약도 마찬가지다. 그 위험은 약을 먹은 시간과 음주 시간이 가까울수록 높아진다. 황보영 한강성심병원 약제과장은 "약을 개발할 때는 항상 알코올과의 상호작용을 관찰하기 때문에 제품 설명서를 참고해 관련 정보를 숙지한 후 음주 여부를 결정하도록 한다"라고 말했다.
◆'1잔의 음주운전도 금지'와 같은 뜻
위에 열거한 '특별한' 사례를 제외하면, 통상적 '금주령'은 회복이 느려지지 않도록 '휴식을 취하라', '면역력을 낮추지 말라'는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이를 두고 '나는 젊고 건강하니 괜찮다는 이야기'라고 해석하면 곤란하다. 이런 해석은 '소주 몇 잔에 취하지 않으니 나는 음주운전을 해도 좋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한두 잔 음주운전이 반드시 사고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나, 사고 확률을 높이는 것만은 확실하므로 '절대 금하는' 취지와 같다.
강희철 연세의대 가정의학과 교수(세브란스병원)는 "부작용 발생은 기본적으로 확률이다. 그 확률에서 실패하면 치명적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므로 어떤 경우라도 음주의 위험성을 간과하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