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때로는 웃기고 때로는 슬프다
순간 ‘버럭’ 했다. 상대는 엄마였다. 엄마에게 하는, 내 삶에 가장 큰 짜증이었을 것이다.
엄마와 생애 첫 외국여행. 두 달여 전부터 준비했고 언니와 조카도 합류했다. 남자들(아들은 열외) 없이 여자들끼리만 가는 여행이었다. 장소는 중간에 코타키나발루에서 사이판으로 바뀌었다. 자유여행이었던 터라 공항 픽업과 현지 관광은 따로 예약했다.
여행 출발 당일. 사이판행 비행기 출발시각은 밤 10시10분이었다. 엄마는 제주도에서 오후 2시10분 비행기로 오시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내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날씨는 우리 가족 편이 아니었다. 전날 폭설이 내린 터라 비행기가 지연 출발해 엄마가 김포공항에 도착한 건 오후 4시였다.
출발시각에 맞게 인천공항에 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중간에 공항동에 사는 언니 집에 들러 조카를 픽업해 가면 됐다. 언니는 회사에서 퇴근 뒤 곧바로 인천공항으로 오기로 했다.
지금껏 외국여행만 십여 차례, 심지어 유럽여행까지 다녀오셨는데 가장 중요한 여권을 놓고 오시다니…. 아빠도, 엄마도, 함께 사는 오빠나 올케 그 누구도 엄마에게 여권 언급을 안 한 것이다. 나 또한 언니한테만 “여권 챙기라”라고 거듭 강조했다. 엄마는 “그냥 주민등록증만 챙겼지...”라며 아무 말씀도 못하셨다.
비상 상황. 소심한 엄마는 그냥 우리들끼리만 가라며 체념한 모습을 보이셨다.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모녀 여행’이었다. 게다가 그동안 바빠서 흘려 들었던 엄마의 어린 시절 얘기도 자세히 듣고 싶었다.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4.3 사건 때 희생되면서 단 한 번도 ‘아빠’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출발 1시간 전까지만 수속을 마치면 되니까 5시간의 ‘작전 시간’이 있었다. 일단 아빠에게 전화해 제주공항에서 여권만 화물로 부칠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아빠도 처음에는 ‘버럭’ 했다. 가뜩이나 감귤 과수원 일이 바쁜 데도 마지못해 여행을 허락했던 아빠였다. 눈 때문에 도로 사정이 너무 안 좋아 시내까지 다시 나갈 것도 걱정인 눈치였다. 하지만 점점 더 커지는 나의 목소리에 아빠는 마지못해 “알아보겠다”라고 답했다.
일단 아빠는 여권을 들고 집에서 30분가량 떨어진 시내로 출발. 그사이 우리는 언니네 집에서 대기하며 오빠에게도 연락했다. 소문난 마당발인 오빠는 제주공항에 근무하는 지인을 통해 방법을 강구했다. 올케는 여차하면 여권을 들고 직접 서울로 오겠다고 했다.
그러는 동안 아빠 손에 들린 여권은 제주공항에서 10분 거리의 오빠 회사 정문에 도착했다. 오빠가 저녁 6시40분 출발하는 비행기에 탑승한 승무원을 통해 여권을 보낸다는 말에 안심하고 엄마와 나, 조카, 아이들은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저녁 8시까지만 김포공항에 여권이 도착하면 시간은 충분했다. 김포공항에서 인천공항까지 여권 수송은 형부가 맡기로 했다.
하지만 웬걸. 폭설로 대규모 지연 사태가 발생하며 엄마의 여권을 실은 비행기는 저녁 7시18분에야 겨우 제주공항을 벗어났다. 도착 예정 시각은 저녁 8시26분. 수속을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나는 계속 시계만 흘끗거렸다. 초조한 마음에 밥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조차 몰랐다.
항공사 쪽에 사정을 설명했더니 다행히 출발 50분 전까지는 기다려주겠다는 답을 받았다. 데드라인은 저녁 9시20분이었다.
저녁 8시40분. 형부로부터 문자가 왔다.
자포자기 심정. 여차하면 엄마와 언니는 다음날 오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나와 조카 등은 일단 출국심사를 받고 게이트 앞에서 기다렸다. 계획했던 면세점 쇼핑 등은 일찌감치 물 건너갔다. 조카는 아쉬웠는지 미리 점찍어둔 립밤을 사러 간다고 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괜히 짜증을 내면서 계속 초조하게 휴대폰만 쳐다봤다.
저녁 8시50분. 형부가 김포공항에 세워둔 차를 포기하고 ‘총알택시’를 탔다는 연락이 왔다. 택시기사로부터 “9시10분까지 도착할 수 있다”는 확답까지 받았단다.
달래 총알택시일까. 택시는 정확히 20분 뒤에 인천공항 2층에 도착했다. 택시비로 형부의 비상금 5만원을 전부 써야 했으나 임무는 100% 달성.
게이트에서 탑승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 조카가 어린 탓에 이번 여행에 합류하지 못한 막내 여동생에게 문자가 왔다.
‘우리 집 여자들 여행 가는데 남자들이 고생했네.’
그리고 마지막 반전. 그날 사이판행 비행기는 30분 연발했다. 인생이란 게 그렇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