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때로는 웃기고 때로는 슬프다
이런 날도 오는구나. 기사도 쓱쓱 잘 써졌고 편집 제목도 제법 잘 나왔다. 오후 6시30분 퇴근. 실로 오랜만의 ‘칼퇴’다. 아주 ‘운이 좋은 날’이다. 입가에 계속 미소가 번진다.
‘집에 가지 말고 혼자 카페 가서 책이라도 읽고 들어갈까.’
이런저런 생각에 흐뭇하다. FM 라디오 ‘사랑하기 좋은 날 이금희입니다’에서 흘러나오는 90년대 가요를 들으면서 흥얼거린다. 차 안은 아침에는 화장을 하는 파우더 룸이, 저녁에는 온갖 고성을 질러대는 노래방으로 변한다. 비록 아이들의 흔적으로 과자 부스러기와 어린이 음료 따위가 굴러다녀 다른 사람을 태우기에 민망할 정도로 차 안은 심하게 어지럽지만 개의치 않는다.
오늘따라 교통 체증도 평소보다 덜 한 듯하다. 증권 회사들이 빼곡히 들어선 여의도공원 옆 도로까지 왔을까. 신호에 걸린 상태에서 기어를 중립(N)에 놓고 휴대폰 카카오톡 메시지 등을 확인했다.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 차는 소형차로는 보기 드문 경유차라서 액셀을 밟을 때마다 덜컹하는 소리를 가끔 낸다. 15만킬로 이상 탔으니 여기저기 문제가 생긴다. 사람도 차도 연식이 오래되면 골골 댄다. 관리하기 나름이겠지만 몸이나 차체의 노쇠화를 늦출 뿐 막을 수는 없다. 시간이라는 놈은 모든 것을 낡게 만든다.
그렇게 50m 즈음 갔을까. 갑자기 검은색 중형 차량이 왼쪽 차선으로 붙더니 거칠게 “빵~”, “빵~” 경적음을 울려댔다. 처음에는 ‘차선을 비워달라는 건가?’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내 운전석의 남성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줌마! 아줌마! 이거 뺑소니야!”
뺑소니?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앞차, 옆 차를 추돌한 적은 없는데... 설마 뒤차를 박았을 리는 없지 않은가.
“아줌마! 아줌마!”
남자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쳤다. 삿대질까지 해댄다. 영등포 고가를 넘어 오른쪽 길가에 차를 나란히 세웠다. 그의 차는 한눈에 봐도 산 지 얼마 안 된 새 차 같다.
“제 차가 앞에 있었는데 박았다고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천진난만한 반응에 남자는 조금 당황한 듯했다. 어쩌면 나의 큰 키(173cm)에 기가 눌렸는지도 모르겠다. 앉았을 때는 모르지만 차 밖으로 나오면 나는 제법 강골 있어 보인다. 게다가 오늘은 강렬한 빨강 코트를 입고 있다. 난 요즘 외양으로라도 활기차 보이고 싶어 빨강에 빠져 있다.
“저기, 아줌마 차가 뒤로 후진해서 제 차를 박았다고요.”
“네?”
설마 초보운전도 아니고 운전경력 17년의 내가 그런 어이없는 실수를 범할 리는 없지 않은가. 순간 중립으로 했던 기어가 생각난다. 여의도대로가 마포대교 쪽으로 내리막길이었나. 그렇다면 브레이크를 밟던 내 오른발을 잠시 뗐을 때 차가 뒤로 밀렸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도 좀 어이가 없긴 하다. 앞차가 뒤차를 박다니.
‘이 아저씨는 안전거리를 확보하지도 않았나.’
일단 양쪽 보험사를 불렀다. 그 남자도 내가 뺑소니 의도는 전혀 없었음을 믿는 듯했다. 블랙박스 확인 결과 내 차가 슬금슬금 뒤로 밀리는 게 보였다. 그래, 인정. 내 차가 뒤차를 박았다. “안전거리 미확보 아닌가요?”라고 우겨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차가 너무 많이 뒤로 밀렸다. 내가 무신경했던 것이다. 상대에게 “미안하다”라며 거듭 사과를 했다.
두 차 모두 겉은 아주 멀쩡하다. 양쪽 차 범퍼에 티끌만 한 흠집조차 없다. 기어가 중립인 상태에서 내리막 인지도 눈치 채지 못할 도로에서 뒤로 밀려 ‘쿵’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아파트 단지나 쇼핑몰 평행 주차 때 앞 뒤 차를 밀다가 다른 차에 닿은 정도라 할까..
하지만 남자는 조수석에 놓여 있던 여행가방 안에 담긴 카메라가 미세하게 고장 났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응? 조금 이해가 안 되었지만 시시비비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보험으로 해결하면 된다. “알겠다” 하고 보험 처리를 하기로 했다. 보험사 아저씨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남자가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까다로운 분을 만나셨네요”라며 나를 위로했다. 조금 억울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있으니 그나마 위로가 된다.
이래저래 사고 처리하느라 회사를 나오며 세웠던 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운수 좋은 날’이 ‘마가 낀 날’로 바뀐 순간. 사실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돈 것은 차 상태나 보험료 등이 아니었다. 여러 차례 비수처럼 날아온 ‘아줌마’라는 단어였다. 남성은 아주 목청껏 나를 잡아먹을 듯이 “아줌마”를 외쳤다.
“아줌마!”
“아줌마!”
“아줌마!”
나는 아직도 ‘아줌마’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뭔가 어색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도 그렇다. ‘원준 엄마’, ‘어머니’라는 호칭 자체도 익숙하지 않다. 고백건대 첫 아이를 낳은 뒤 ‘원준 엄마’라고 맨 처음 호명됐을 때부터 나의 몸은 즉각 반응하지 않았다. 아이와 관계된 사람보다 일과 관련돼 만나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시간의 총량에 비례해 호칭을 부여한다면 Y기자, Y차장이 ‘원준 엄마’, ‘어머니’보다 조금 더 자연스럽다.
사회적 통념상 ‘아줌마’의 기준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사람이라면 나와 정확히 일치한다. 스스로도 지인들과 대화할 때는 “나 아줌마잖아”, “우리도 이제 아줌마야”라는 말을 종종 쓴다. 그래도 길 가다 부딪힌 누군가나 마트 계산대의 점원 등 제삼자로부터 ‘아줌마’라는 호칭을 들으면 기분이 참 묘하다. 긍정, 부정의 그런 느낌이 아니라 기분을 조금 가라앉히는, 도저히 표현이 안 되는 묘한 감정이 든다.
궁금하다. ‘아줌마’라는 호칭은 점점 짙어가는 눈가 주름을 통해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조금씩 어둡고 헐거워져 가는 옷차림에서 나오는 것일까. 비염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밖에 나가면 ‘아줌마’라는 호칭을 덜 들으니까 입가의 팔자주름이 원인일 수도 있겠다.
젊은 감각을 유지하려고 억지로 아이돌 노래를 듣기도 한다. 요즘 노래는 때로는 소음처럼 시끄럽지만 대개 재기 발랄하다. 음악 프로그램도 가끔 일부러라도 본다. 외모와 함께 하나같이 추는 칼군무에 감탄한다. 연습을 얼마나 했을까. 그러나 그것뿐이다. 그 문화에 쉽게 동화되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낡은, 혹은 늙은 세대인 것이다. ‘아재’가 되기를 거부하며 한껏 멋을 부려도 ‘아재’는 ‘아재’인 것처럼 ‘아줌마’는 그저 ‘아줌마’ 일뿐이다. 슬프지만 인정해야만 한다.
메아리처럼 머릿속에서 계속 윙윙대는 ‘아줌마’라는 단어를 애써 지우며 평소보다 더 늦어진 귀가를 재촉한다. 하지만 50m 즈음 나아갔을 때 이번에는 경찰이 붙잡았다. 차선 위반이라고 한다. 7만원짜리 딱지를 뗐다. 미치겠다. 오늘 진짜 왜 이러니, 이 아줌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