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력은 가끔 알코올을 이긴다

술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법

by 김양희

20세기 말은 술과의 전쟁이었다. 21세기 초반도 비슷했다. 고등학교까지는 알코올이 내 몸에 범접한 적이 없었으니 다행이라고 할까, 불행이라고 할까.


폭탄주는 입사 뒤 처음 알았다. 대학생 때 가끔 큰 양푼이에 맥주와 소주를 가득 넣고 나눠마시기는 했으나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폭탄주는 신문사에 입사하고 처음 마시게 됐다. 그때는 소폭(소주+맥주)이 아닌 양폭(양주+맥주)이 주를 이뤘다. 밸런타인 17년 산에 맥주를 타 먹거나 했다. 어쩌다 밸런타인 30년을 마시게 되면 "폭탄주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며 그냥 언더락이나 스트레이트로 마시기만 했지만. 어쨌든 양폭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짜 양주가 많아지면서 양폭이 없어졌지 아마도.


수습 때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마셨다기보다는 몸에 들이부었다. 선배들은 왜 그리도 후배들에게 술을 사주고 싶은 건지. 혹은 술 주량을 테스트하고 싶었던 것일까. 오다가다 만나는 선배들은 늘 "술 한잔 하자"를 외쳤고 우리에게 거절할 권리 따위는 없었다. 그냥 마시자면 마셔야 했다.


그날도 나는 선배들과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시고 귀가했다. 다행히 근처에 선배가 살았기에 집까지는 무사히 왔는데 그 이후가 문제였다. 분명히 나는 선배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했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왔다. 거기까지는 정확히 기억한다. 그런데 그 이후는 블랙아웃.


아침 6시에 출근 준비를 하려고 방문을 열었던 언니는 소리쳤다.


"00야!"


그렇다. 나는 현관 앞에 신발도 채 벗지 않고 널브러져 있었다. 언니는 그때 내가 죽은 줄 알았다고 한다. 언니의 소스라침에 놀라 깨난 나는 부스럭거리며 일어나서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택시를 타고 초주검 상태로 출근을 했다. 오전 7시30분까지 출근하기. 그것은 수습기자의 사명이었다.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하지만 웬걸. 같이 술을 마셨던 남자 동기들은 회사에서 보이지를 않았다. 전화까지도 불통. 나 혼자만 술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나 홀로 생존자가 됐다는 기분 따위는 없었다. 그때는 내가 풍기는 술 냄새에 다시 내가 취하는 그 지경에 있었으니까.


비몽사몽 책상에 앉아 있다가 선배들과 출입처로 갈 시간이 됐다. 출입처는 강남.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속은 계속 메스꺼웠다. 얼굴은 점점 새하얗게 변해갔다. SOS 시간이었다.


"선배, 차 좀 세워주세요."


후다닥 차에서 내려 가로수를 붙잡고 몸속의 것을 게워냈다. 도로에 가로수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지나가던 행인이 흘끔흘끔 쳐다봤으나 뭐 어쩌랴. 숙취는 창피함마저 삼켜버렸다.


가로수와 씨름하는 내가 측은했던지 선배는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지하철을 타고 곧장 집으로 와서 나는 10시간 넘게 침대와 한 몸이 돼 잠만 잤다. 내가 침대인지, 침대가 나인지 구분조차 안 됐다. 다음날 들은 얘기로 동기 녀석들은 오후에 출근해 선배들에게 엄청 '깨졌다'라고 했다. 그래, 나는 진정한 승자였던 것이다. 오만함마저 생길 뻔했다.


출입처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출입처 사람들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사람들은 유독 나에게만 술을 줬다. "처음 만나 반갑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양주를 계속 스트레이트 잔으로 권했다. 술을 받아 원샷을 하고 다시 술잔을 돌려주기를 10여 차례. 그럼에도 나는 헤어질 때까지 멀쩡, 아주 쌩쌩했다. 소위 술이 셌기 때문에? 술을 잘 마시기는 한다. 대학생 때 모꼬지를 가면 새벽까지 혼자 남은 술을 다 마시고 자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이때는 아니었다. 술에 취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택시비가 없었다. 초면에 상대에게 택시비를 빌릴 엄두도 안 났다. 요즘에는 카드나 휴대폰으로도 결제가 되지만 당시에는 무조건 현금이 필요했다. 수습기자가 무슨 현금이 그리 많겠는가.


나는 당당히 술집을 걸어 나가 여유롭게 택시를 탄 뒤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관리소까지 택시비를 갖고 나와줄 것을 부탁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나는 결코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아, 올림픽대로 중간에서 택시를 세워 한 차례 토를 하기는 했다. 택시 아저씨가 얼마나 고마워하던지. 택시 내부를 안 더럽혀서. 참 예의 바른 취객 아닌가.


때로는 정신력이 술을 이긴다. 이겨 나가야 할 것 천지인 이 세상에서 까짓것, 술쯤이야. 어쩌면 내가 이겨낼 수 있을 만큼만 술을 마셨는지도 모른다. 절제력이란 게 사람에게는 있으니까.


요즘은 아이들을 재우고 거실 불을 끈 뒤 TV 영화를 보면서 맥주 한 캔을 마시는 게 하나의 낙이 됐다. 남편이 옆에 있으면 더 좋고. 기름에 적당히 튀겨 구워낸 쥐포는 덤. 한 캔으로도 적당히 취기가 오르는 나이가 됐지만 그래도 맥주 한 모금 넘기고 슬쩍 미소 지을 수 있어서 좋다. 아무렇지도 않은 나날에 감사하면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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