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커리어에 이롭다
프롤로그에서 나의 N년은 사실 물경력이라 말했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나의 무지, 게으름, 노력 부족, 현실과의 타협 및 안주... 등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객관적인 관점으로 보면, 마케터로서의 나의 시장 경쟁력은 낮은 편이다.
나의 능력이 뛰어나지 못해 경쟁력 있는 마케터가 되지 못한 것은 일부 사실이다.
하지만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보면,
개인의 노력과 능력만 있다고 해서 뛰어난 마케터로 성장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회사의 흥망성쇄에 시장의 '운빨'이라는 것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직장인이자 마케터로서 내가 속한 회사나 브랜드, 산업군이 나의 커리어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이번 편에서는
허우대는 멀쩡해 보이는데 마케팅 직무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피해야 할 회사 유형을 정리해 보겠다.
돈, 비용, 가격 등에 대한 나의 지론은 이렇다.
비싸고 안 좋은 건 있을 수 있어도, 싸고 좋은 건 없다.
그러니까 마케팅을 싸게(혹은 무료로) 하겠다는 건,
마케팅(=마케터, 나)을 '싸고 좋은 것'으로 만들겠다는 사장님의 원대한 꿈일 수 있겠지만,
이런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처음 SNS 시대가 도래했을 때, '온라인 마케팅=공짜'라는 잘못된 인식이 팽배했었다.
ATL 대비 저비용이란 것이지, 돈이 안 드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신입 마케터들이 SNS를 담당한다. 소셜마케팅이 중요하기 때문에 SNS를 열심히 하라고 한다. 나는 말하고 싶다. 마케팅이 중요하면 돈을 주세요...
세스 고딘도 말씀하셨다. "광고는 노력으로 얻어내는 매체가 아니다. 돈으로 사는 매체다."
그럼 또 광고 말고 콘텐츠에 집중하라고 한다. SNS에서 입소문이 날 수 있는 정성스런 콘텐츠를 만들어 보자고 한다.
그러면서 제대로 된 촬영 장비나 편집 프로그램도 안 사준다면... 아니 뭐, 그걸 내 폰으로 하고 무료 프로그램으로 해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스튜디오 렌탈비나 택시비 등에도 투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 회사에서 큰 일을 할 기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 이론상으로 적절한 광고비는 매출의 10%라고 한다. 이런 회사는 대부분 규모가 큰 기업일 것이다.
나의 경험상 작은 회사는 3%만 써도 양반인 것 같다. 7%까지 써주면 땡큐다.
- 전자공시시스템(DART)에서 기업명-재무제표-손익계산서를 확인하자. 광고선전비 항목을 보고 마케팅 비용 얼마나 쓰는지 대충 알 수 있다.
- 작은 회사라면 SNS나 홈페이지, 뉴스 등에서 최근 한 마케팅 활동을 찾아본다. 그걸 어떤 과정으로, 그니까 마케터를 갈아서 했을지, 적정한 예산과 일정으로 사랍답게 했을지는 알 길 없지만, 그래도 주니어라면 마케팅 활동이 미비한 곳보다는 뭐라도 활발하게 하는 곳에 가서 굴러야 포폴이 생긴다.
- 면접 볼 때 올해 계획된 주요 프로젝트와 예산, 혹은 연간 마케팅 예산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
아, 씁쓸한 자본주의. 그럼 돈 없는 회사는 모두 탈출해야 하는가?
아래의 경우라면 그래도 배울점이 있다고 본다. 예산은 적더라도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인사이트를 갖춘다면, 나중에 예산까지 갖춘 곳에서 더 큰 기획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조직이 마케팅 관점으로 일을 한다 :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시장조사를 꾸준히 하고, 자사의 상품을 업그레이드하고, 그것을 우리의 타겟에게 잘 전달하려고 노력하는가. (여기서 '잘'은 대규모 광고 캠페인이 될 확률은 적지만, 그래도 온드미디어나 자사몰에 신경을 쓰고, 고객 한명 한명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하는지)
이런 브랜드는 단기적으로 인지도를 형성하거나 매출을 발생시키기는 어려울지라도, 돈 대신 들인 정성 덕분에 조금씩 성장하고 고객이 알아볼 것이라 믿는다.
- 그래도 내부 인력에는 투자한다 :
예를 들어 유튜브 마케팅을 하겠다고 하면 인플루언서 채널이나 구글에 광고할 돈은 안 쓰지만, 내부에 콘텐츠 기획자, 영상 PD, 영상 디자이너 등을 두어 직접 영상을 만들고 자사 유튜브 채널을 키워보자는 것이다.
기업 채널의 오가닉 뷰가 얼마나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거대한 플랫폼과 광고의 도움 없이 자사 채널을 키우는 노력은 (힘든 만큼) 마케터에게 많은 인사이트를 줄 것이다. 또 같은 일을 하는 동료들이 내부에 있다면 더욱 든든하게 가내 수공업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 마케팅 예산이 적다는 걸 인지한다 :
내가 마케터로서 인지부조화를 겪지 않은 회사는 이런 경우였다.
"우리가 단기간에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는) A브랜드의 경쟁사로 자리매김 할 수 없어. 대신 우리는 길게 봐야해. 광고를 하면 좋겠지만, 지금은 예산이 적으니 최대한 많은 고객을 1:1로 만나보고, 그중 핵심 고객에게는 필요한 제품을 지속적으로 협찬해 보는 게 어떨까? 어딘가에 노출이 안 되도 어쩔 수 없어. 이건 광고가 아니잖아."
이런 회사에서는 추상적인 목표나 '한 방' 대신 현실적이고 꾸준하며 구체적인 목표를 가질 것이다.
직장인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 중에 '노비도 대감집 노비가 낫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마케팅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프로젝트 예산 5천만 원과 5백만 원은 하늘과 땅 차이다.
무엇이 나의 마케팅 포트폴리오를 빛나게 하는가?
나의 개인적인 신념은, 마케팅이 모두 돈으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는 거다.
적절한 기획과 적절한 예산이 함께 있어야 베스트다.
비즈니스의 한 축으로서 마케팅을 이해하지 못하고, 표면적인 '액션'에만 집중하는 경우다.
특히 단기적인 매출에만 몰두해 '그릇된 액션이라도 돈만 벌면 상관없다'는 식의 회사가 여기 해당한다.
마케팅의 4P 중 하나인 Product가 너무 구린데 대가성 리뷰로 눈속임을 한다든지,
포장이라는 이름으로 허위광고, 과장광고를 한다든지.
마케팅과 사기의 결정적인 차이는 고객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라고 한다.
세스 고딘의 <This is marketing>을 관통하는 기조도 다음과 같다.
"마케팅은 제품을 설계하고 출시한 다음 뒤따르는 모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 하는 일과 그 방식에서 시작된다... 마케팅은 더 나은 문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다. 마케팅은 외치거나, 속이거나, 강요하는 일이 아니다. 마케팅은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고객을 섬기기 위한 기회다."
청소년에게 마케팅 직무를 친절하게 소개하는 박지혜의 <어서 와, 마케팅은 처음이지?>라는 책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마케팅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통해 소비자들이 누리게 되는 삶의 질 향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소비자 삶의 질 향상 뒤에는 기업의 이윤 추구가 있습니다. 기업의 본질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윤 추구는 매우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기업의 역할과 책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기업의 이윤 추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납니다.
그러나 기업이 맹목적으로 이윤을 추구하게 되면, 앞서 이야기했듯 약속할 수 없는 것들을 약속하게 되고, 소비자 삶의 질은 오히려 나빠지게 됩니다. 소비자 삶의 질 향상 없이 얻게 되는 기업의 이윤은 분명 문제가 있고, 이러한 경우는 마케팅 활동을 했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마케팅의 본질은 기업의 이윤 추구가 아니라 소비자 삶의 질 향상입니다. 기업은 삶의 질이 향상될 수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 또는 결과로 이윤을 얻게 됩니다."
마케팅은 비즈니스의 중심축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 고객에게 그만한 교환가치가 있는 것을 비즈니스해야 한다. 그러한 알맹이는 없이 마케팅만 하는 비즈니스는 (그게 가능하지도 않지만) 어딘지 이상하다.
마케팅이라는 이름아래 사기에 가까운 행각을 벌이는 회사는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마케터로 일하는 건
우리의 소중한 능력과 귀한 시간을 사회를 더 나쁘게 하는 데 낭비한 것이라 생각한다.
마케팅 직무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꼭 마케팅 고전과 기본서를 읽으라고 하는 이유도
지식이나 경험이 부족해 나쁜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진짜 마케팅인가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너무나 사기 같아서 환멸 나지만) 원래 마케팅은 사기가 아니다.
중소 마케터로서의 생각과 바람이 너무 이상적이라고들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마케팅을 하며 돈을 벌 뿐만 아니라,
가급적 성장해야 하고, 기회 되면 이직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일터에서 최소한 괴롭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의라서
위 두 가지를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한 게 아쉬워 글로 적어 보았다.
마케팅 커리어 측면에서나, 직장인의 정신건강 측면에서나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