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 마케팅 해방일지

은퇴에서 해방으로

by 조각보자기

환멸나는 마케팅 세상. 이 일을 15년 넘게 하다니, 이걸 원한 건 정말 나였을까?

(당연히 나였겠지, 밥벌이는 필요했고, 배운 건 도둑질 뿐이라서.)


사무실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려 대며 몸이 편한 직장생활을 영위하게 해줬던 마케팅이란 직무는

직장인으로서는 손색 없었을지 모르나 나의 가치관에는 도무지 맞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옷은 내게 맞지 않는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깊이 알지도 못하는 내용에 대해 그럴듯하게 쓴 기획기사, 해 본 적 없으면서 거짓말로 하는 커뮤니티 바이럴, 예산 투자가 많을수록 있어빌리티가 높아지는 부익부빈익빈의 논리, 그것과 밀접한 내 커리어의 계급, 이것은 전쟁이며 참전하는 순간 경쟁사를 죽여야 우리가 산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런 마케팅에서 1억이란 큰 돈을 아무렇지 않게 적다고 말하는 나, 삶을 직접적으로 바꾸지도 못하면서 줄줄이 새는 눈먼 돈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소비를 만들어 내기 위해 나의 인생을 허비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사실 나는 소비주의를 혐오하는 사람인데, 별로 승부욕도 없고 호전적이지도 못한데, 어쩌다 자본주의의 선봉대가 되었나.


물론 나는 이 시간을 버텨냈기에 이제는 챗GPT만큼이나 기계적으로 홍보 문구를 쓰는 사람이 됐다.

간단한 디자인을 하면서 원고를 바로바로 수정하고, 시대의 흐름에 맞게 영상 편집도 하고, 온라인 광고도 돌린다. 이것저것 다 조금씩 할 수 있는 제너럴리스트가 됐다.

하지만 손발의 기능을 좀 한다고 해서, 그것을 생활에서 향유하는 주니어들만큼 몸에 익은 것도 아니고, 어찌저찌 흉내는 낸다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머리가 차게 식어가는 게 느껴진다.


마케팅, 무언가를 부추기는 행위.

이것을 '적극적으로' 계속할 동력을 잃어감이 분명하다.

(세상은 마케터에게 언제나 '적극적으로', '열정적으로' 일하라고 한다.)


혹시 아직 내가 부족하거나 편협한 게 있을까 하여 마케팅 및 비즈니스 자기계발 플랫폼에 가서 수업도 열심히 듣고 토론도 해봤다. 대게 우리의 결론은 '브랜딩이 중요해'였지만, 그것이 회사라는 보호막이 없을 때도 내가 입밖으로 뱉을 수 있는 말일지 의심이 생겼다.

내가 수업에서 확인한 건 수료 완료자, 우수 발표자, 우수 토론자라는 3관왕을 차지한 나의 성실함 뿐이었다. (바쁜 다른 사람들이 불참하고 자료를 늦게 올렸기 때문에 100% 수업에 참여한 나는 상대적으로 너무 성실하고 너무 한가해 보였다.)

그 수업을 통해 나는 셀러와 마케터와 브랜드기획자를 만났고, 과거의 마케터와 오늘날의 마케터도 만났다. 그리고 알게 됐다. 내가 마케팅 세상에서 어느 정도에 위치하고, 마케팅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어떠한지를.

분명히 나는 마케팅을 환멸하고, 이제 미련없이 그만 둘 수 있겠다 싶다.


지난 글에도 썼지만, 업무 현장에서는 늘 브랜딩이 중요한 구매지표라고, 브랜딩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솔직히 나는 가성비가 제일 중요하다.

잠재 고객들이 어떻게 사는지 관심 없고,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을 그럭저럭 꾸려갈 수 있는지가 더 급하다.

원래 관심 없지만 꾸역꾸역 쫓아가던 트렌드란 것도 점점 알고 싶지 않다.

아니, 가끔은 쇼핑이 진짜 재미없다. 애매한 기업들이 파는 건 다 거기서 거기 같다.

그런데 뭘 더 적극적으로 알리고, 팔아야 하는지? 왜 굳이? 게다가 이 기후위기 시대에?


그러니까 이런 속내를 가지고, 단지 손에 익숙하기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하는 건 솔직히 쪽팔리는 일이다.

존엄하지 않다. 그래서 이제 그만하고 싶다. 마케팅 말고 다른 일을 선택하고 싶다.


앞으로 내가 직업으로 선택할 일은 이랬으면 좋겠다.

1) 잘 하고

2) 애정을 가질 수 있고

3) 내 기질에도 잘 맞는 일.

4) 근데 급여도 적절하고

5) 즐겁고

6) 보람있는 일.

한마디로 완벽한 직업인.


응, 그런건 없어.


완벽한 회사, 완벽한 마케팅, 완벽한 가이드, 완벽한 리더, 완벽한 커리어, 완벽한 동료, 완벽한 나...

완벽한 것은 세상에 없는 유니콘이야.




나는 마케팅이란 '포장지'를 만드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에 더 '본질'에 가까운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마케팅을 오해한 것이며, 진정한 본질이란 무슨 일을 하든 이것이 밥벌이라는 것 뿐이다.


내가 원하는 건 성공한 마케터가 아니라 마침내 마케터라는 타이틀에서 해방되는 나.

타인의 성공담과 마케터의 지침, 마케터에 대한 요구, 자아의 분열 등에 괴로워하지 않는 나.

마케팅을 계속 하든 안 하든, 마케팅이든 브랜딩이든 잡무든 상관없이 그저 밥벌이를 하는 나.

밥벌이의 지겨움을 인내하고, 죽는 날까지 내 밥을 내가 벌어 먹는 나.




직장인입니다. 우연히 마케팅 직무를 맡고 있습니다.

크게 잘 하지도 못하고, 그런다고 크게 못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밥값을 합니다.


오랫동안 마케팅을 환멸하면서, 언젠가는 이 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을 꿈꿔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 주는 건,

머릿속으로 중요하다고 수년 째 생각만 하고 있는 것들(자연과 예술, 다정함, 소박함, 여유 등)이 아니라

그동안 제가 직장과 마케팅에 쓴 시간과 에너지임을 부정할 길 없습니다.

즉, 효율과 성과와 비교와 분석과 위계와 구매를 부추기는 행위 말입니다.


필요 없는 물건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물건만을 남기는 미니멀라이프처럼

이제 저의 인생에서 무엇을 남겨야 할지를 고민합니다.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남겨야 할 것 중에 마케팅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의 제 인생은 '무엇이 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이 매거진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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