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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광호 Apr 19. 2024

<두 개의 길, 홍세화와 이인용>


홍세화란 이름을 처음 들은 건 고등학교 시절 전교조 소속 문학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는 날이었다. 보통 일방향으로 가르치기만 하시던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문학 선생님은 학생들이 스스로 문학 작품을 읽고 요약, 느낌, 생각을 발표하고 토론하도록 하셨다. 그날 선생님은 세상을 바꾸려면 세상에 남이 있어야 한다는 알쏭달쏭한 말씀을 남기셨고 손수 가져온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들어 보이며 추천하셨다.     


홍세화 선생님을 직접 본 건 대학 시절 특강 때였다. 내가 다닌 대학은 경북 포항 흥해읍 남송리에 위치한, 칠포 앞바다가 나지막이 내려다보이는 시골 학교였다. 지금이야 고속도로에서나오면 바로 학교 정문으로 연결되지만 그때는 시내에서 버스로 길면 한 시간은 걸리는 외진 곳이어서 외부의 음식, 사람에 대한 욕구가 컸다. 그래서 유명 인사, 강사라도 오면 열심히 참여했다. 사실 강연 내용은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는데,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조선일보에서 자신의 사진을 범죄자 같은 것으로 골라 실었다는 농담이 기억난다. 학자연하는 느낌은 전혀 없고 인자한 동네 아저씨 느낌이었다.     


이후로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르다>를 비롯해 간간이 출간되는 그의 책을 읽었다. 작가님께서 활동하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노동당으로 이어지는 진보정당에 나도 당원(활동은 안 하지만 당비만 내는)이어서 당을 통해서도 선생님의 소식을 들었다. 그러다 민노당 때와는 달리 사실상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던 진보신당 말엽, 노동당 시절에는 홍세화 선생님을 생각하며, 젊은 시절 힘들게 보내셨으니 이제는 좀 해외여행도 다니시며 느긋하게 여생을 보내시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러나 그는 <말과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장발장은행>처럼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고 사회적 약자를 돕는 잡지, 단체를 계속 만들거나 관여하셨다. 마치 바위를 산꼭대기로 끝없이 반복해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처럼 선생님은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강사는 이인용 전 MBC 앵커다. 강연 내용 중 두 가지만 확실히 기억한다. 하나는 앵커 시절 폭탄주의 위험성을 알리는 보도를 하고 방송 후 직원들과 함께 폭탄주를 마시고 차를 운전해 집으로 갔고 주차를 잘했다는 일화. 또 하나는 독재정권 시절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데모하면 다 잡혀가거나 남자는 군대로 끌려가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세상(학교) 속에 남는 사람도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몇 년 뒤 삼성의 홍보담당 전무로 이직해 삼성전자 부사장, 미래전략실 커뮤니케이션팀장 등을 거쳤다. 개인의 이직이야 자유지만 준공영방송 메인앵커가 재벌의 언론담당으로 이직하는 게 바람직한지 여전히 의문이다. 더욱이 몇 년 후,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 잘 나오듯, 고 황유미 님의 백혈병을 비롯해 ‘직업성 암’ 문제에 삼성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잘 알기에 더욱 씁쓸했다.     


가끔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을 생각한다. 홍세화는 유물론자로, 이인용은 신앙인으로 알고 있다. 과연 누가 좁은문, 십자가의 길로 갔을까. 홍세화 선생님의 영면 소식을 들었다. 멀리 푸른 바다 포항까지 강연 오셨던 맑은 날,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린다. 홍세화 선생님의 평안과 안식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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