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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광호 Apr 05. 2024

[옮긴이글]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앞니가 빠졌다. 나라에서 모든 의료 서비스를 총괄해 단일하게 제공해 주면 좋으련만, 우선은 병원부터 선택해야 했다. 주변에는 치과들이 적지 않았다. 임플란트 가격도 만만치 않은데다가 한창 네트워크 치과 문제가 보도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치과를 가야 할지 고르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우선 인터넷으로 주변 치과들을 검색했다. 너무 작은 동네 치과는 전문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었고, 큰 치과 병원은 기업 느낌이 나는데다 환자를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다루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러다 조금은 비싼 것 같지만 친절하고 세심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중간 크기의 치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선택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진료를 받은 후 어떤 임플란트로 할지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과거에 다른 병원에서 당했던 수치심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저렴한 아말감 치료를 받으려 했는데, 상담을 전담하는 소위 코디네이터는 아말감 재료에 수은이 들어간다는 말을 흘렸고, 의사도 어떻게든 더 비싼 재료를 쓰려 했다. 선택권은 나에게 있다고 했지만 사실상 선택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아말감보다 일이만 원 비싼 재료를 반강제적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임플란트 선택지 역시 다양했다. 저렴한 국산 제품 A, B와 비싼 수입 제품 C, D, E. 나는 살레츨이 이야기한, 장례지도사 앞에서 어떤 관을 선택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처럼 어떤 선택을 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가장 싼 A를 선택한다면 코디네이터에게 가난한 이로 보일 테고, 가장 비싼 E를 선택해도(물론 형편상 선택할 수 없었다) 외면치레하는 인간으로 보일 수 있었던 까닭이다. 결국 가장 저렴한 것으로 하겠다는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좀 더 비싼, 그러나 별 차이는 없어 보이는 B를 선택했다. 요컨대 내 선택에서 선택지들은 정해져 있었고, 또 코디네이터라는 타자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또 한 번의 씁쓸하고 불편한 경험이었지만,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졌던 ‘대타자’를 몸소 체험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의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이제는 단순히 상품 선택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가 선택의 연속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살레츨의 지적처럼 삶은 기업이 되었으며, 인간관계도 투자가 되었고, 애인도 자녀도 선택 사항이 되었다. 보험, 자동차, 집, 동네, 종교 선택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얼굴이나 젠더도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얄궂게도 우리는 이 선택의 풍요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행복해하기보다는 외려 더 불안해한다. 언제나 합리적이고 최상의 선택을 하고 싶은데, 선택지는 끝이 없고, 선택의 결과는 알 수 없으며,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남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모든 것을 선택의 독재적 측면이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볍게는 하루 운세나 별점을 들여다보고, 중요한 것부터 시시콜콜한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조언을 아끼지 않는 각종 자기 계발서를 탐독하며, 급속도로 세분화되어 가는 다양한 분야의 상담사, 멘토, 코치, 컨설턴트, 전문가, 권위자들을 찾는다. 역설적으로 선택의 자유가 부담스러워 그 자유를 대신해 줄 누군가를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더 나은 선택, 더 나은 ‘자신’에 끊임없이 몰두하는 동안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선택지에 대한 고민은 불가능해지고, 사회를 변화시킬 동력도 점점 더 상실하고 만다. 


저자에 따르면, 이 선택지의 바다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자유롭고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선택은 타인의 시선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겨울이 오면 고가의 똑같은 상표 잠바를 걸치고 다니는 학생들, 한 달 월급을 훌쩍 넘는 명품 가방을 구비하려는 여성들, 한국 영화의 작품성을 서구인의 평가를 통해 확인받고 싶어 하는 바람 등 그 예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합리적 선택이론은 사람들이 늘 이익 극대화와 손해 최소화를 추구한다고 전제하지만, 우리의 선택은 합리적이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고, 자기 이익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신념이나 가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도 한다.  


또한 선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무의식적 욕망의 영향을 받는다. 라캉의 정신분석에 따르면, 인간존재는 결여를 근본적인 특징으로 하며, 그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 그것을 채워 줄 수 없다. 상품이든 결혼이든 아이든 꿈이든 간에, 우리가 간절히 욕망하던 것이 충족되는 순간 그것은 더는 우리가 욕망했던 것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공허함이 스며들며, 또다시 새로운 욕망의 대상을 찾아 헤매게 된다. 후기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선택을 강조하지만 그 선택은 오로지 상품 선택뿐이다. 이마저도 가난한 이들에게 사실상 그림의 떡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과 선택을 틀짓고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정치・경제 체제에 대한 선택은 선택지에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선택 이데올로기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자기 인생의 완벽한 주인이라는 환상을 심어 주고, 사회구조에서 눈을 돌려 자신에게만 몰두하도록 만든다고 역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여전히 선택은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으며, 이 변화를 위한 시작은 우리에게 실제로 제공되는 선택지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또 개인의 문제와 고통을 계급 사다리를 오르려는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회 부정의에 대한 투쟁, 사회구조를 바꾸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 사회 역시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이후로 이런 선택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다. 이로 인해 개인들은 개인적 욕망, 더 정확히는 개인적 생존경쟁 자체에만 매몰된 채 선택을 실질적으로 강제하는 사회제도 및 구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저자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컨대 우리는 선거에서 각 정당 후보들은 선택할 수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정책을 내세우는 인물을 후보로 세울 수 있는 권리, 더 나아가 선거제도 자체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사실상 없다. 그래서 선거철마다 지겹도록 전략적 연합 논의가 흘러나오고, 늘 최악을 막기 위해 전략 투표를 고민하게 된다. 결국 새로운 정치체제를 상상해 보기는커녕 민의를 덜 왜곡하는 독일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와 결선투표제만이라도 도입되기를 수십 년째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 안에서 선택을 내릴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유학 경험도 있고 과외 교사도 있는 학생과 오직 교과서와 학교 공부만으로 경쟁할 자유가 있으며, 대학 등록금을 위해 대출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선택할 수도 있다. 또한 주택 수가 가구 수를 넘었지만 전세와 월세로 살 선택권이 있고, 사유지의 절반을 소유한 상위 1퍼센트와 당당하게 경쟁해 내 집을 마련할 권리가 있으며, ‘절반의 행운, 절반의 기부’라는 예쁜 모토를 지닌 로또를 구입해 신분 상승도 도모하고 어려운 이웃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또 작은 마트를 열어 대형 마트와 겨룰 자유도 있으며, 야근이 일상인 직장에서 당당히 사표를 던지고 백수가 되겠다고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선택 아닌 선택을 강제하는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바꾸는 것, 더 나아가 거부하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지로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선택해야 할 것은 우리 공동의 것, 게임의 룰, 선택의 룰 자체이다. 그 고민과 씨앗은 협동조합, 지역 화폐, 마을 공동체, 사회적 기업의 형태로 이미 시작되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온전한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 및 결선 투표제, 국가 관료에 대한 민주적 통제, 주민자치를 강화하는 풀뿌리민주주의 등으로 대의제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민주화하고, 기본 소득, 토지 공유화, 노동자 경영권 등으로 경제 민주화를 실현하는 선택 역시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선택을 제한하는 구조 ― 정치적・사회경제적 구조와 인간의 심리적 구조 ― 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이, 우리의 선택이 조삼모사 원숭이의 선택이 아니라 온전한 선택이 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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