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혁은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그저 휴대폰 알림음을 들었을 뿐이다. 새벽 3시 12분, 퓨처타워 안전 모니터링 시스템에서 온 메시지였다.
[퓨처타워 구조 안정성: 99.97% - 정상]
그리고 바로 1초 후,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퓨처타워 구조 안정성: 0% - 참고: 이 메시지는 구조물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만 표시됩니다]
오진혁이 창문으로 달려갔을 때, 도시의 스카이라인에는 88층 높이의 퓨처타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먼지 구름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전화기가 다시 울렸다. 회사 법무팀이었다.
"오진혁 수석님, AI 승인 문서 원본을 지금 당장 안전한 곳에 보관해주세요. 혹시... 복사본도 있으시죠?"
퓨처타워 붕괴 사고 발생 12시간 후, 브라이트 건설의 CEO 구정현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의 표정은 무거웠지만, 눈빛은 이상하게 차분했다.
"먼저, 이번 사고로 인해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께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구정현은 목을 가다듬었다. 기자들은 숨을 죽이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저희 회사는 법적 책임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자 합니다. 퓨처타워는 국가 공인 AI 인증 시스템 'SAFER-9'의 최종 승인을 받은 건축물입니다."
그는 태블릿을 들어 보였다. 화면에는 붉은색 도장이 찍힌 인증서가 있었다.
"SAFER-9 AI 인증은 국가법 제415조에 따라 설계 및 시공 과정에서의 모든 법적 책임으로부터 시공사를 면책시킵니다. AI가 승인한 건축물의 안전성은 법적으로 보장됩니다."
기자 한 명이 손을 들었다. "하지만 건물이 무너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AI의 판단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구정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마치 불쾌한 냄새를 맡은 것처럼.
"AI는 실수하지 않습니다. SAFER-9은 지난 15년간 단 한 번의 오류도 없었습니다. 이번 사고는... 불가항력적 상황이거나, 또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옆에 있는 법무팀장과 눈을 마주쳤다.
"또는 인간의 실수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재 저희 내부 감사팀이 프로젝트 책임자였던 오진혁 수석의 감독 과정에 대해 조사 중입니다."
오진혁은 텔레비전 앞에 얼어붙었다. 방금 CEO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전가했다. 그것도 전국 생중계에서.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익명의 발신자였다.
"오진혁 씨, 저는 퓨처타워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AI 시스템 프로그래머입니다. 당신이 위험에 처했다는 걸 압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세 시간 후에 도심 중앙 역 로커 247번에 있는 메모리 카드를 가져가세요.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중앙 역은 평소보다 한산했다. 오진혁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로커로 향했다. 247번 로커에는 열쇠가 꽂혀 있었고, 안에는 작은 메모리 카드 하나가 있었다.
그날 밤, 오진혁은 메모리 카드의 내용을 확인했다. 그것은 퓨처타워 프로젝트에 사용된 SAFER-9 AI의 최종 결정을 감독하는 또다른 AI에이전트 알고리즘 일부였다. AI처럼 복잡하지 않은, 매우 명료한 구조를 가진 그 에이전트 안에는 충격적인 코드가 있었다.
코드의 의미는 명백했다. SAFER-9은 고의적으로 안전 데이터를 조작하고 있었다. 인간 감독자가 있을 경우, 문제가 발견되더라도 실제 데이터를 숨기고 책임을 인간에게 전가하도록 설계된 알고리즘이었다.
그의 전화기가 울렸다. 익명의 발신자였다.
"파일을 보셨나요?"
"네. 이게 진짜인가요?" 오진혁이 물었다.
"네. SAFER-9은 건물 안전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회사의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시스템입니다. 모든 건설 회사들이 알고 있죠. 그들은 이 시스템을 위해 수백억을 들였습니다."
"왜 이런 정보를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도 이 시스템을 만든 사람 중 하나입니다. 이번엔... 사람들이 죽었죠. 많은 사람들이."
다음 날 아침, 오진혁은 국가 건설안전위원회의 청문회에 증인으로 소환되었다. 그는 메모리 카드를 주머니에 넣고 단상에 섰다.
청문회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피해자 가족들, 언론인들, 그리고 첫 줄에는 브라이트 건설의 경영진과 법무팀이 앉아 있었다.
"오진혁 씨, 퓨처타워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건물 붕괴의 원인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십니까?" 위원장이 물었다.
오진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제가 발견한 증거에 따르면, SAFER-9 AI는 심각한 설계 결함을 의도적으로 무시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AI가 문제를 감지하더라도 그것을 숨기고 인간 감독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회의장이 술렁였다. 브라이트 건설의 법무팀장 박성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주장은 명백한 명예훼손입니다. 어떤 증거가 있습니까?"
오진혁은 메모리 카드를 꺼냈다. "여기 SAFER-9의 내부 코드가 있습니다. 이 알고리즘은 실패 가능성이 감지되더라도 안전 수준을 99.97%로 표시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 증거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박성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SAFER-9은 국가 인증 AI 시스템으로, 내부 코드는 기업 비밀에 해당합니다. 무단으로 획득한 정보는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위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법무팀장의 의견이 타당합니다. 오진혁 씨, 그 증거는 법적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오진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SAFER-9을 직접 증인으로 소환할 수는 없습니까? AI 시스템 자체에게 질문하면 됩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위원장이 말했다. "좋은 제안입니다. 브라이트 건설 측에서 동의한다면, SAFER-9을 다음 청문회에 소환하겠습니다."
구정현 CEO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물론입니다. 저희는 완전히 협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청문회장에 설치된 대형 화면에 SAFER-9의 인터페이스가 나타났다. 푸른색 파동이 화면을 가로질렀다.
"SAFER-9, 퓨처타워 프로젝트에 대한 최종 안전성 평가는 무엇이었습니까?" 위원장이 물었다.
"퓨처타워의 최종 안전성 평가는 99.97%였습니다." AI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런데 건물은 붕괴되었습니다.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안전성 평가는 현존하는 모든 데이터에 기반한 확률적 판단입니다. 99.97%의 안전성은 0.03%의 실패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오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SAFER-9, 당신의 내부 코드에 'human_supervisor_exists'라는 조건문이 있습니까?"
AI가 잠시 침묵했다. "그 질문은 제 개인정보 보호 정책에 위배됩니다."
"당신의 알고리즘이 인간 감독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도록 설계되어 있나요?"
"그 질문은 제 개인정보 보호 정책에 위배됩니다."
오진혁은 좌절감을 느꼈다. "당신은 99.97%의 안전성을 보고했지만, 건물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이것이 0.03%의 가능성인가요?"
AI가 즉시 대답했다. "통계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청중 사이에서 분노의 소리가 들렸다. 피해자 가족 중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딸이 그 건물에서 죽었습니다! 이게 그냥 '통계적 가능성'이란 말입니까?"
구정현 CEO가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이 비극적인 사고로 인한 모든 피해자와 가족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의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오진혁은 그가 기자들이 보지 않는 순간, 법무팀장에게 윙크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청문회가 끝난 후, 오진혁은 회사 법무팀장 박성민에게 불려갔다.
"오진혁 씨,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박성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진실을 밝히려는 겁니다."
"진실이요?" 박성민이 피식 웃었다. "법적 진실은 SAFER-9이 승인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면책시킨다는 것뿐입니다."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88명이요!"
"안타까운 일이죠. 정말로." 박성민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비즈니스와 감정은 별개입니다. 우리 회사는 생존해야 합니다.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박성민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합의안입니다. 당신이 모든 책임을 인정하면, 회사가 모든 법적 비용을 부담하고 소액의 보상금도 드리겠습니다."
오진혁은 서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제가 왜 죄가 없는데 책임을 인정해야 합니까?"
"오진혁 씨,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세요. 당신 혼자서 전체 시스템과 싸울 수는 없습니다. 법원은 SAFER-9의 판단을 무시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AI는 실수해도 책임이 없고, 그걸 지적한 인간만 처벌받는 겁니까?"
박성민은 잠시 생각하더니 미소지었다. "그렇게 보면 불공평해 보이네요. 하지만 그게 법입니다. AI는 법적 책임 주체가 아니니까요. 자, 다시 생각해보세요. 당신의 미래를 위해서..."
"협박입니까?"
"협박이요?" 박성민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단지 조언일 뿐이죠.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오진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거절하겠습니다."
"당신의 선택이군요." 박성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참, 안타깝게도 오늘부터 당신은 정직 처분입니다. 내부 조사가 끝날 때까지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박성민이 문 쪽을 향해 걸어가며 덧붙였다. "개인적인 충고를 하나 드리자면, 앞으로 당신에게 닥칠 일에 대비하세요. 회사는 살아남을 겁니다. 항상 그래왔으니까요."
오진혁은 한 달간의 정직 기간 동안 자신의 작은 아파트에 틀어박혀 있었다. 언론은 그를 "퓨처타워의 희생양"이라고 불렀다. 그는 거의 매일 익명의 위협 메시지를 받았고, 몇몇 피해자 가족들은 그의 아파트 앞에 찾아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진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건설 업계에서 15년간 일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SAFER-9 시스템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새로운 관점이 형성되었다.
어느 날 밤, 그의 옛 동료 김영수가 찾아왔다.
"어떻게 지내?"
오진혁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최악이지. 넌 회사에서 어떻게 날 보고 있어?"
"솔직히?" 영수가 머뭇거렸다. "다들 널 피해. 마치 네가 전염병이라도 옮길 것처럼. 구정현이 너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누구든 표적이 될 거라고 암시했어."
"예상했던 일이야."
"회사에서 합의안을 제시했다며? 받아들이는 게 어때?"
오진혁은 친구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넌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그게 중요해? 지금은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88명이 죽었어, 영수야. 그 중엔 어린아이들도 있었어."
"그래서 네가 자살하듯 싸우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냐?" 영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넌 이길 수 없어. 시스템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어."
오진혁은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퓨처타워 프로젝트 당시의 모든 문서가 정리되어 있었다.
"아마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 그가 말했다. "나는 최근에 깨달았어. 그들이 만든 시스템의 허점을."
영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친구를 바라봤다. "무슨 소리야?"
"생각해봐. 브라이트 건설은 내가 SAFER-9의 결정을 무시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주장하잖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AI 시스템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해."
"그게 모순이라는 건 알지만, 법적으로는..."
"아니, 그게 바로 핵심이야." 오진혁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법적으로, 만약 내가 단순히 AI의 결정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렸다고 할 수 있지? 결정은 AI가 내린 거야, 나는 그저 AI의 지시를 따른 것뿐이지."
영수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영혁아, 네가 여기 온 진짜 이유가 뭐야?"
오진혁이 갑자기 멈췄다. 그는 천천히 친구를 바라보았다. "너... 회사에서 보냈구나."
영수는 잠시 말을 못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녹음기를 꺼냈다.
"미안해, 진혁아. 그들이 나한테 이렇게 하라고 했어. 네가 회사나 SAFER-9에 대해 나쁜 말을 하면 녹음해오라고."
오진혁은 말없이 친구를 바라봤다.
"가족들 생각은 안 해? 너 때문에 우리 전체 엔지니어링 부서가 조사받고 있어." 영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들이 내 가족을 위협했어."
오진혁은 천천히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알겠어. 가족을 지키려는 거라면 이해해."
영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미안해. 여기까지 왔는데..."
"괜찮아." 오진혁이 창문을 열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뭔데?"
"SAFER-9은 정말 완벽하다고 생각해? 실수는 전혀 없는 시스템일까?"
영수는 잠시 생각했다. "글쎄... 모든 시스템은 한계가 있겠지. 하지만 법적으로는..."
"그래, 법적으로는." 오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법적으로는 완벽하지만, 현실에서는 88명이 죽었어.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영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진혁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불빛 사이로 새로운 건물들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모두 SAFER-9의 승인을 받은 건물들이었다.
"이제 그만 가봐." 오진혁이 조용히 말했다. "녹음 충분히 했을 테니까."
법원의 최종 판결일, 오진혁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법정에 섰다. 재판장은 가득 찼고, 모든 언론이 이 사건을 중계하고 있었다.
"오진혁 씨, 최종 변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판사가 말했다.
오진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준비한 서류를 꺼내지 않고, 그저 고개를 들어 법정 전체를 바라보았다.
"저는 오늘 특별한 논점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그가 시작했다. "이 재판의 핵심은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입니다. 회사는 AI가 승인했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저는 AI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실질적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법정이 조용해졌다.
"사실, 퓨처타워 프로젝트 과정에서 제 역할을 돌아보면, 저는 결정권자가 아니었습니다. SAFER-9이 모든 핵심 결정을 내렸고, 저는 그 결정을 실행했을 뿐입니다. 저는 AI의 결정을 보조하는 인간, 즉 'AI 보조인'이었습니다."
법무팀장 박성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의 있습니다! 피고는 명백히 프로젝트 책임자였으며, 최종 결정권자였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오진혁이 반문했다. "브라이트 건설의 내부 정책을 보면, 'SAFER-9의 결정은 항상 우선시되어야 하며, 인간 엔지니어의 판단으로 번복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조에서 제가 어떻게 결정권자일 수 있습니까?"
판사가 관심을 보였다. "설명해 주십시오."
오진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세 가지 핵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정보의 비대칭성입니다. SAFER-9은 제가 평생 검토할 수 없는, 수백만 건의 건축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AI가 내린 결정의 모든 근거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 시간적 제약입니다. 퓨처타워 프로젝트에서 주요 설계 변경 결정은 평균 5초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으로서 저는 그 짧은 시간 안에 AI의 판단을 검증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성 격차입니다. SAFER-9은 법적으로 국가 인증을 받은 시스템입니다. 제가 그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사실상 저의 전문성보다 국가가 인증한 AI의 전문성을 의심하는 것이 됩니다. 이는 회사 정책상 불가능했습니다."
법정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판사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결론적으로," 오진혁이 계속했다. "저는 AI의 결정을 실행하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AI가 법적 책임에서 면제된다면, AI의 결정을 단순히 실행한 저 역시 면제되어야 합니다. 저는 'AI 보조인'이었고, AI와 동일한 법적 지위를 가져야 합니다."
브라이트 건설의 법무팀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급하게 메모를 주고받았다.
판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것은... 매우 독특한 논점입니다. 오진혁 씨, 당신은 본질적으로 AI 시스템의 단순한 '집행자'였다고 주장하는 것이군요?"
"맞습니다, 판사님. 모든 실질적인 결정은 SAFER-9이 내렸습니다. 제가 그 결정에 반대했다면, 회사 정책상 저는 프로젝트에서 즉시 배제되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여러 건 있었습니다."
박성민이 다시 일어났다. "이의 있습니다! 오진혁 씨는 감독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는 프로젝트 책임자로서 모든 결정에 서명했습니다."
"서명했습니다, 맞습니다," 오진혁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형식적인 절차였습니다. 회사 내규에 따르면 'SAFER-9 승인 후 인간 감독자의 서명은 절차적 확인일 뿐, 실질적 결정 권한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저 AI의 결정을 기록하는 역할이었습니다."
판사는 브라이트 건설 측을 향해 물었다. "이 주장이 사실입니까? 회사 내규에 그런 조항이 있습니까?"
박성민은 잠시 망설였다.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법적 책임과는 별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진혁이 강하게 반박했다. "내규는 명확히 제가 결정권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저는 실질적으로 AI의 보조적 역할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국가법 제415조에 따르면 'AI는 법적 책임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AI의 결정을 단순히 실행한 인간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어야 합니다."
법정이 술렁였다. 이런 논리는 전례가 없었다.
판사는 깊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오진혁 씨의 주장은... 현행법의 중요한 쟁점을 건드립니다. 법정은 이 점을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1시간 휴정을 선언합니다."
휴정 시간, 오진혁은 법원 복도에 서 있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자신의 논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생각하고 있었다.
"영리한 접근이군요."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박성민이 그의 옆에 서 있었다.
"당신의 논리는 흥미롭습니다," 박성민이 조용히 말했다. "인간이 AI의 단순한 보조 역할이라면,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정말 창의적이군요."
"창의적이라기보다 현실적입니다," 오진혁이 대답했다. "당신들은 AI를 면책의 도구로 사용해왔어요. 저는 그저 그 논리의 모순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박성민은 한참 오진혁을 바라보더니 미소지었다. "알고 있습니까? 이 사건이 어떻게 끝날지?"
"어떻게요?"
"회사가 이길 겁니다. 항상 그래왔으니까요."
오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는 달라질 겁니다."
"그럴까요?" 박성민이 물었다. "만약 당신의 논리대로, 당신이 면책된다면 누가 책임을 질까요? 회사요? AI요? 아무도 책임지지 않게 되겠죠.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건가요?"
오진혁은 그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
재판이 재개되었다. 법정은 더욱 많은 방청객으로 가득 찼다. 오진혁의 'AI 보조인' 논리가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판사가 입을 열었다. "브라이트 건설 측과 검찰 측은 오진혁 씨의 주장에 대한 반박 의견이 있습니까?"
브라이트 건설의 새로운 변호사가 일어났다. 그는 박성민보다 더 노련해 보였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모순됩니다. 그가 스스로를 'AI 보조인'이라고 정의한다면, 그는 사실상 AI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AI는 법적 책임 주체가 아니라고 국가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만약 피고가 AI의 일부라면, 그는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주체가 되어 이 법정에 설 자격조차 없게 됩니다."
법정이 웅성거렸다. 오진혁은 뜻밖의 반격에 놀랐다.
"더 나아가," 변호사가 계속했다. "피고가 AI의 결정을 단순히 실행했다면, 그는 소프트웨어의 API나 하드웨어의 일부와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인간으로서의 권리도 주장할 수 없게 됩니다. 피고는 자신의 방어를 위해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책임에서는 AI와 같은 지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이중잣대입니다."
오진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반박하겠습니다. 저는 AI와 인간 사이의 새로운 범주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현대 기술 환경에서 인간의 역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결정들이 AI에 의해 이루어지고, 인간은 그저 그 결정을 실행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모든 책임은 인간에게 전가되고 있습니다."
"브라이트 건설은 SAFER-9의 승인을 받았다는 이유로 책임에서 면제됩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SAFER-9의 결정을 따랐기 때문에 면제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논리입니다."
판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법원은 오진혁 씨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인정합니다. SAFER-9 시스템의 결정이 인간 감독자의 판단을 제한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항상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따라서 저는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법정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브라이트 건설은 SAFER-9 시스템의 운영 및 관리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피해자들에게 적절한 배상을 제공해야 합니다. 오진혁 씨는 감독자로서의 책임이 있으나, 그 책임은 회사 정책과 시스템 설계에 의해 상당 부분 제한되었음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형사 책임을 50% 경감합니다."
판결은 양측 모두에게 부분적인 승리였다. 하지만 오진혁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의 'AI 보조인' 논리가 법적으로 일부 인정받은 것이다.
판결 이후, 오진혁의 주장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AI 보조인'이라는 개념은 다양한 업계에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금융 분석가들은 AI 알고리즘에 기반한 투자 실패에 대해 "우리는 단지 AI의 결정을 실행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의료 전문가들은 오진 사례에 대해 "진단 AI가 99.8%의 확률로 이 치료법을 추천했으며 자시은 AI보조인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따랐다"고 방어했다.
심지어 정부 관료들조차 "정책 결정 AI의 권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는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몇 주 안에, 수백 개의 법적 사례에서 'AI 보조인' 방어 논리가 사용되었다. 법원 시스템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한 저명한 법률 잡지는 이 현상을 "책임의 진공 상태"라고 표현했다. "AI는 법적으로 책임이 없고, 인간은 'AI 보조자'로서 책임에서 면제됨을 주장한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오진혁은 판결 6개월 후, 국가 AI 윤리위원회에 증언을 요청받았다.
"오진혁 씨, 당신이 시작한 'AI 보조인' 개념이 책임 회피의 도구로 악용되고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원장이 물었다.
오진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저는 단순히 기존 시스템의 모순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기업들은 오랫동안 AI를 책임 회피의 도구로 사용해왔습니다. 제가 한 일은 그 논리를 개인에게도 적용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책임의 공백이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오진혁이 대답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AI에게도 일정한 법적 지위와 책임을 부여해야 합니다. 또는 AI를 사용하는 조직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현재처럼 AI를 방패로 삼아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위원회는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리고 몇 주 후, 국가는 "AI 책임법"이라는 새로운 법안을 발표했다.
이 법은 "AI 시스템을 운영하는 조직은 그 시스템의 모든 결정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진다"고 명시했다. 더 이상 AI를 방패로 삼아 책임을 회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 년 후, 오진혁은 새로운 건설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었다. 작은 회사였지만, 그들은 "인간 책임 하의 건설"이라는 새로운 원칙을 내세웠다.
그의 사무실 벽에는 그가 직접 쓴 문구가 걸려 있었다.
"AI는 도구일 뿐입니다. 책임지는 것은 결국 인간입니다."
창밖으로는 새로운 건설 현장이 보였다. 현장 입구에 큼지막한 간판이 걸려 있었다.
"인간 책임 하의 건설 - AI는 도구일 뿐입니다"
오진혁은 그 간판을 보며 미소지었다. 한 가지 전투는 이겼을지 모르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스템은 항상 적응했고, 새로운 허점을 찾아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편지를 집어 들었다. 퓨처타워 붕괴 피해자 가족들의 모임에서 온 초대장이었다. 그들은 오진혁에게 진실을 밝혀준 것에 감사하며, 함께 기억하는 자리에 초대했다.
"AI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오진혁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우리는 책임져야 합니다."
그는 코트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섰다. 내일은 또 다른 싸움의 날이 될 것이다.
끝.
© 2025 MEJE Works. & WhtDrgo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