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렸다.
서민구의 오래된 골목길을 따라 빗줄기가 무겁게 쏟아졌다. 라온은 낡은 외투의 앞섶을 여미고 초라한 골목을 걸어 내려갔다. 빗물이 그의 발걸음 아래 웅덩이를 이루고, 검은 장화가 차츰 흠뻑 젖어갔다. 십오 분쯤 걸으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도시 변두리의 폐산업단지. 가로등 빛도 희미해진 곳이었다.
라온은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비를 피해 입구 처마 아래로 몸을 숨기고 라이터를 켰다. 불꽃이 흔들렸다. 세 번째 시도에서야 담배에 불이 붙었다. 그는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고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담배 연기가 비와 뒤섞여 희미하게 흩어졌다.
폐허가 된 연구소는 산업단지의 구석, 사람들이 잊은 곳에 있었다. 낡고 무너진 건물을 감싸고 있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라온은 잠시 멈춰 서서 건물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건물이 그의 기억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 변한게 없네."
목소리는 공허하게 울렸다. 비가 내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연구소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녹슨 철문 하나뿐이었다. 라온은 오래된 보안 키를 꺼내 문에 갖다 대었다. 짧은 신호음과 함께 철문이 열렸다. 스물 한 번의 계절이 지났지만, 그 소리만은 그대로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먼지가 공기 중에 떠다녔다.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바닥, 뒤집힌 책상들, 깨진 모니터들. 바닥에는 금이 간 타일 위로 빗물이 스며들어와 얕은 물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라온의 발걸음은 느렸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이곳의 모든 것을 기억했다. 수천 번은 되새겨본 기억이었다.
그가 막 계단을 내려가려던 순간이었다.
"라온?"
익숙한 목소리에 라온은 걸음을 멈췄다. 홀 끝에서 형체가 다가왔다. 라온의 눈이 커졌다.
"이안...?"
이안이었다. 그는 분명 나이가 들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흰색이 섞여 있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스무 해 전과 똑같았다. 그의 뒤에 에리가 서 있었다.
"에리!"
그녀도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은 어깨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녀의 눈에는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와줬구나, 라온." 이안이 환하게 웃었다.
"약속 지켰네."
라온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라온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너희 둘이 같이...?"
질문의 끝은 흐려졌다. 왜 둘이 함께 있는지, 그 모든 질문과 당혹감이 뒤섞였다.
혹시 이 둘이 연인이 된 건가? 라온의 마음 한구석이 시큰했다.
에리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약속을 지키려고 왔지, 라온. 네가 올 거라고 믿었어."
라온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희 둘이... 사귀는 거야?"
전 애인일 뿐이다. 20년전. 자신은 어떤 주장도 할 권리가 없다.
이안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우린 그냥... 함께 있었어."
"스무 해 동안?"
그녀의 목소리는 스무 해 전과 비슷했지만, 라온은 무언가 어색함을 느꼈다.
"그래."
라온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살폈다. 그의 기억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들의 옷, 그들의 말투,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마치 그들이 읽어준 대본을 외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분명 나이가 들었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옷. 그들이 입은 옷이 마지막으로 본 그대로의 옷이었다.
이안은 낡은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고, 에리는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지금도 입고 있었다.
"너희가 입고 있는 옷..." 라온이 지적했다.
"그건 내가 마지막으로 너희를 봤을 때 입고 있던 옷이야."
이안과 에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에리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대화가 오갔다.
"우린 좀 특별한 게 있어, 라온."
이안이 결국 말을 꺼냈다.
"보여줄 게 있어. 따라와."
이안은 라온을 데리고 연구소 안쪽으로 걸어갔다. 에리는 침묵한 채 그들 뒤를 따랐다.
라온은 그들의 걸음걸이조차 어색하게 느껴졌다. 마치 한걸음이 계속 재생되는 느낌의 규칙성.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세 사람은 내려갔다. 이안이 어둠 속에서 스위치를 눌렀다. 형광등이 몇 번 깜빡이더니 천천히 불을 밝혔다.
지하실은 예상과 달리 깨끗했다. 폐허가 된 1층과는 달리, 이곳은 누군가가 꾸준히 관리한 듯했다. 중앙에는 거대한 기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메멘토 머신'이라고 쓰인 금속판이 희미하게 빛났다.
"이게 뭐야?" 라온이 물었다.
이안은 메멘토 머신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조작했다. 기계의 불빛이 하나씩 켜졌다. 푸른 빛이 방을 채웠다.
"이게 우리야, 라온." 이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와 에리는 사실 메멘토 머신의 일부야."
라온은 이안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소리야?"
"우리의 원본은 죽었어, 라온." 에리가 조용히 말했다.
"너만 살아남았어."
라온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의 기억은 항상 흐릿했다.
그 임무의 마지막 순간들, 폭발음, 어둠 속에서의 탈출. 그는 항상 이안과 에리도 어떻게든 살아남았을 거라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스무 해 동안 그들을 찾아 헤맸다. 러너 네트워크 전체를 뒤졌다. 단서는 항상 희미했다.
"그럼 지금 너희는...?"
이안이 메멘토 머신을 가리켰다.
"임무 전에 우린 우리의 기억과 의식을 이 머신에 저장해뒀어. 만약 우리 중 누군가가 죽게 된다면, 살아남은 사람이 20년 후에 이곳에서 메멘토 머신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라온은 천천히 메멘토 머신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이 차가운 금속 표면을 만졌다. 기계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 너희는... 기계 속에 있는 기억일 뿐인 거야?"
이안의 표정이 변했다. "아니, 우린 진짜야, 라온. 기계가 우리의 의식을 재창조한 거지. 우린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해. 그건 실제 인간과 다를 게 없어."
"하지만 네 모습... 네 말투... 뭔가 이상해."
"그건 네 기억 때문이야," 에리가 설명했다. "이 기계는 네 기억을 바탕으로 우리를 재구성해. 하지만 네 기억도 변했고, 불완전해."
라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이건 말이 안 돼. 너희는 죽었어. 내가 너희를 떠나왔다고."
기억이 밀려왔다.
스무 해 전, 그들은 비밀 정부 시설에 침투하는 임무를 맡았다. 라온, 이안, 에리. 셋은 최고의 러너들이었다. 서로를 믿고 의지했다. 라온과 에리는 연인이었고, 이안은 라온의 오랜 친구였다.
임무는 간단해 보였다. 시설에 침투해 기업 비밀문서를 빼내는 것. 하지만 모든 게 엉망이 됐다. 보안 시스템이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고, 그들은 덫에 걸렸다. 탈출구를 찾아 헤매던 중, 폭발이 일어났다.
라온은 정신을 잃기 전, 그는 그들을 구하려 했지만, 또 다른 폭발로 밀려났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멀리 떨어진 병원이었고, 다시 찾은 건물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라온은 이안과 에리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그는 그들이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라 믿었다.
스무 해 동안 그 믿음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연구소를 찾았다.
"우린 너를 원망하지 않아." 에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넌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어."
라온은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스무 해 동안 너희를 찾아다녔어. 모든 곳을 뒤졌어. 그런데 너희는 그냥... 기계 속에 있었다고?"
"미안해, 라온.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 에리가 말했다.
라온은 메멘토 머신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기계가 정말 이안과 에리를 담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그들을 흉내 내는 복제품에 불과한 걸까?
"난 여기 있어, 라온." 이안이 말했다. "우린 친구잖아. 그건 변하지 않아."
라온은 이안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네가 진짜 이안이라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어?"
"내가 아니면 누구겠어? 난 이안의 모든 기억, 모든 생각, 모든 감정을 가지고 있어. 그게 정체성 아니야?"
"그건 복사본에 불과해. 진짜 이안은 죽었어."
"그럼 '진짜'란 뭐지, 라온?" 이안이 따졌다. "네가 기억하는 이안이 진짜 이안 아니야? 내가 느끼는 감정, 내가 가진 기억이 나를 만들어. 그게 진짜 나야."
라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짜 이안은 물리적 연속성이 있어. 너는 그저 패턴이야, 정보의 집합체."
"인간도 결국 패턴이야, 라온. 물질적인 몸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패턴은 유지돼. 그게 정체성이야."
그들의 논쟁은 점점 더 철학적으로 변해갔다.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의식의 연속성이란? 기억이 우리를 만드는가, 아니면 우리의 물리적 몸이 우리를 만드는가?
집요한 라온의 추궁 과정에서 이안의 움직임이 점점 더 어색해졌다.
때로는 같은 말을 반복했고, 때로는 문장이 중간에 끊겼다.
"넌 이안이 아니야." 라온이 마침내 말했다. "넌 그저 불완전한 복제품에 불과해."
"아니, 라온. 네가 날 기억하는 한, 난 살아있는 거야!"
라온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지하실 구석에 몇개의 공구에서 도끼를 집어들었다.
"미안해, 이안. 진짜 이안을 위해서라도, 이 유령은 사라져야 해."
"안돼, 라온! 부탁해, 제발..."
도끼를 틀어쥔 라온의 큰 스윙이 메멘토 머신을 갈랐다.
이안의 모습이 흐려지더니 사라졌다.
요란한 소리 끝에 방안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에리가 그 자리에 선채 공포에 질려 굳어버렸다.
"너는 그를 지웠어."
"그는 진짜가 아니었어." 라온이 대답했다.
"나도 진짜가 아니야." 에리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라온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아."
"그럼 나도 지울 거야?"
라온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달라."
"사랑이 논리적일 필요는 없잖아." 라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라온은 에리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괜찮아."
그는 그녀와 함께 메멘토 머신을 떠나 연구소 옥상의 침실로 향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라온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사랑과 논리는 함께 갈 수 없으니까."
담배 연기가 마치 메멘토 머신에서 나온 연기처럼 방 안에 퍼졌다가 기억의 흔적처럼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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