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죽음이었다.
칼리스는 이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서민구의 좁은 골목에서 생존을 배우던 때부터, 그리고 러너로서 수십 개의 차원을 건너며 생존했던 모든 순간에도.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만큼 그 진리를 피부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시스템 상태: 비정상. 체온 경고. 신경 임플란트 오작동 위험."
기계적인 목소리가 그의 뇌를 관통했다. 칼리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보다는 오른손 검지에 남아있는 마지막 불씨에 집중했다. 그의 사이버네틱 손가락 끝에서 희미한 푸른 불꽃이 떨리고 있었다. 신기(SINKI) 에너지의 마지막 잔해였다.
제니쓰(Zenith)의 얼어붙은 황야는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흑공의 검은 얼음 차원 어비스와 달리, 이곳은 하얀 얼음이 가득한 동토였다. 최고의 흑공 메카트로닉스와 신기 메카트로닉스를 갖춘 신기사 러너에게도 너무나 끔찍하게 차가운 땅이었다. 보통 차원계는 죽음과 함께 드랍아웃되어 현실에서 깨어나기 마련이지만, 제니쓰는 달랐다. 이곳은 죽음의 복귀마저도 얼려버리는 진짜 죽음의 땅이었다.
백색의 죽음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24시간 전만 해도 그에게는 동료가 있었다. 장비가 있었다. 임무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자신의 몸과 이 마지막 불씨뿐이었다.
"체온 하락: 현재 35.2도. 가동률: 27%. 신기 에너지 잔량: 12%."
칼리스는 얼어붙은 왼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었다. 얼굴 반쪽을 덮고 있던 신경 임플란트가 차가웠다. 정상적이라면 체온에 맞춰 따뜻하게 유지되어야 할 기술이, 지금은 오히려 그의 체온을 빼앗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반쪽 얼굴만 개조할 게 아니었지," 그가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전체를 바꿨으면 아예 추위도 못 느꼈을 텐데."
그의 감각 수용체들은 이미 55%가 꺼져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통을 느끼는 감각도 함께 둔해져 가고 있었다.
칼리스는 쪼그려 앉아 눈을 파기 시작했다. 그의 코트 안쪽에서 작은 열선이 희미하게 빛났지만, 배터리는 이미 바닥났다. 이제 열은 그의 몸에서 나오는 것뿐이었다.
24시간 전. 연구소의 의뢰는 간단했다. 신기(SINKI) 차원 데이터를 회수하고, 새로운 에너지 패턴을 테스트하는 것. 그들은 삼인조였다. 칼리스, 텐, 그리고 모리스. 셋 다 충분히 경험 있는 러너들이었다.
"이차원 폭풍이 오고 있어요. 임무를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텐이 말했었다. 차분한 데이터 분석가. 그녀의 말은 항상 정확했다.
"괜찮아, 시간은 충분해." 모리스가 대답했다. 낙관적인 엔지니어. 그의 판단은 늘 틀렸다.
칼리스는 말없이 데이터를 모았다. 그저 임무를 완수하고 보수를 받는 것. 그것이 그의 일이었다.
폭풍이 왔을 때, 그들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차원 폭풍은 현실을 찢어버렸고, 통신 장비는 망가졌다. 칼리스의 마지막 기억은 텐이 "차원 좌표가 무너지고 있어요!"라고 외치는 소리였다. 그리고 모리스가 그를 밀어내며 "먼저 가!"라고 소리치던 순간이었다.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홀로 얼어붙은 황야에 쓰러져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리스의 코트 조각이 바람에 나부꼈고, 텐의 데이터 패드가 반쯤 눈에 파묻혀 있었다. 통신은 되지 않았다. 그의 신체 개조 시스템만이 희미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체온 하락: 현재 34.9도. 가동률: 23%. 신기 에너지 잔량: 10%."
현재. 칼리스는 눈을 파 작은 구덩이를 만들었다. 황야의 눈보라 속에서 잠시나마 피할 수 있는 곳. 그는 구덩이 안에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문명의 끝자락에서, 그는 원시인처럼 대피소를 만들고 있었다.
"나 참, 우스운 상황이군."
칼리스는 웃으려 했지만, 그의 입술은 이미 갈라져 있었다. 피가 얼어붙었다.
"시스템 오류. 생존 확률 계산: 8.2%."
"시끄러워," 그가 내장된 AI에게 중얼거렸다. "네가 내 생존 확률을 계산할 필요 없어. 난 살아남을 거니까."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도 확신이 없었다. 오른손의 푸른 불꽃이 더 작아졌다. 신기 에너지의 잔량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는 이 에너지를 어디에 써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자신의 체온을 올리는 데? 구조 신호를 보내는 데? 아니면...
눈 위로 무언가가 비쳤다. 처음에 칼리스는 환각이라고 생각했다. 저체온증이 시작되면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하지만 그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뚜렷해졌다.
희미한 불빛이었다. 아주 멀리서 빛나고 있었다.
"분석불가. 데이터 부족."
그의 AI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 빛이 무엇인지, 실재하는지조차.
선택의 순간이었다. 불확실한 빛을 따라가는 것. 아니면 여기서 마지막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
칼리스는 일어났다. 그의 무릎이 얼어붙은 듯 뻣뻣했다. 걷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 발짝을 내디뎠다. 그리고 또 한 발짝.
"가동률: 19%. 신기 에너지 잔량: 8%. 경고: 시스템 종료 임박."
"시끄러워,"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난 기계가 아니야. 난... 사람이야."
그 순간, 무언가가 바뀌었다. 마치 그의 내면에서 오래된 스위치가 켜진 듯했다. 기술이 고장 나는 순간, 인간의 본능이 깨어났다. 러너로서의 그의 경험, 서민구에서 배운 생존술, 그의 몸에 새겨진 생존 본능이.
칼리스는 홀로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시야는 점점 흐려졌지만, 그 희미한 빛만은 여전히 보였다. 그는 그 빛을 향해 나아갔다. 그의 몸은 점점 무거워졌고, 기계 부품들은 하나씩 멈춰갔다.
"가동률: 12%. 신기 에너지 잔량: 5%. 경고: 심각한 시스템 오류."
칼리스는 더 이상 AI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는 오직 그 빛만 보고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 빛의 정체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작은 캠프파이어였다. 아니, 캠프파이어처럼 보이는 무언가였다. 하지만 불꽃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기계적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텐...?" 칼리스의 입술이 떨렸다.
텐이었다. 살아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불꽃 옆에 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공허했다. 그녀의 신체 절반은 이미 얼어붙어 있었다.
"칼리스."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들렸다. "당신도 여기 오게 되었군요."
"뭐... 무슨 뜻이야?" 칼리스가 물었다.
"이건 진짜가 아니에요." 텐이 말했다. "이것은 제니쓰의 함정이에요. 이 불꽃은... 우리를 유인하는 거예요. 여기서 죽으면... 정말 끝이에요. 드랍아웃도, 복귀도 없이."
칼리스는 갑자기 극심한 추위를 느꼈다. 그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텐의 말이 맞았다. 이 불꽃은 진짜가 아니었다. 이것은 차원의 함정이었다. 죽음의 유혹이었다.
"가동률: 5%. 신기 에너지 잔량: 2%. 경고: 시스템 종료 임박."
칼리스는 뒤로 물러섰다. 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그는 오른손의 마지막 불꽃을 바라보았다. 신기의 마지막 잔해.
"텐, 우리가 왜 여기 왔는지 기억해?"
텐의 공허한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데이터... 그리고 테스트..."
"그래. 우린 임무가 있어." 칼리스가 말했다. "그리고 난 그걸 마칠 거야."
칼리스는 마지막 신기 에너지를 집중시켰다. 그가 손을 들어올리자, 푸른 불꽃이 그의 손가락 끝에서 타올랐다. 그는 그 불꽃을 텐의 얼어붙은 데이터 패드 위에 가져갔다. 패드가 깨어났다. 화면이 밝아졌다.
"경고: 심장 정지 위험. 경고: 신체 시스템 붕괴 임박."
AI의 경고가 그의 머릿속에서 울렸지만, 칼리스는 무시했다. 그는 데이터 패드의 전송 버튼을 눌렀다. 모든 데이터, 모든 테스트 결과,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모든 것이 압축되어 비콘 신호와 함께 발사되었다.
"당신, 자신을 위한 에너지를 남겨두지 않았어요." 텐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상관없어." 칼리스가 말했다. "이게 더 중요해."
"왜요? 여기서 죽으면... 돌아갈 수 없어요. 제니쓰에서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에요."
칼리스는 잠시 생각했다. 왜 그는 자신의 생존보다 임무를 선택한 것일까? 이것은 단순한 직업 윤리가 아니었다. 제니쓰에서의 진짜 죽음을 앞두고, 그는 더 깊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우리가 여기 온 이유야.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야."
그 순간, 칼리스의 시야가 흐려졌다. 그의 사이버네틱 시스템이 하나씩 꺼져갔다. 그의 왼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야에서 디지털 정보들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그의 신경 임플란트가 멈추었다.
"시스템 종료. 가동률: 0%."
칼리스는 눈 위에 쓰러졌다. 그의 몸은 이제 기계가 아니었다. 오직 인간, 추위에 노출된 연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때, 그의 피부에 무언가가 닿았다. 따뜻했다. 햇빛 같았다.
칼리스는 눈을 떴다. 하늘이 변하고 있었다. 차원의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그의 신호가 받아들여진 것일까? 아니면 이것도 환각일까?
"칼리스. 신호를 수신했습니다. 위치 확인됨."
낯선 목소리였다. 구조대였을까? 아니면 죽음의 마지막 환각일까?
칼리스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불을 피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의미를 위해 불을 피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어쩌면 그 자신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었다.
"임무... 완수..." 그가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눈이 그의 얼굴 위로 내렸다. 차갑지만, 이상하게도 평화로웠다. 그의 심장은 계속 뛰고 있었다. 기계가 아닌, 인간의 심장이. 얼어붙은 황야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마지막 불씨처럼.
연구소, 2주 후.
"신기(SINKI) 차원 탐사 결과 보고서입니다."
연구원이 보고서를 펼쳤다. "제니쓰 차원에서 회수된 데이터는 혁신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탕으로 신기 에너지의 새로운 패턴을 발견했습니다. 이 발견은... 모든 것을 바꿀 것입니다."
"러너들은요?" 관리자가 물었다.
"텐은 사망했습니다. 모리스는 실종 상태입니다. 칼리스는..."
"네?"
"칼리스의 상태는... 불확실합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그의 생체 신호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몸은...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관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쓰에서의 죽음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이죠. 그들의 진정한 희생을 기록해두세요."
연구원이 떠난 후, 관리자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러너란 대체 뭐하는 자들인가? 돈도, 명예도, 사랑도, 애국심도, 사명감도 아닌. 대체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만드는가? 특히 제니쓰 같은 진짜 죽음의 땅에서조차...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가? 기술? 생존? 아니면...
의미를 위한 마지막 불꽃?
창밖에서, 눈은 계속 내렸다. 차갑지만, 그 안에는 어딘가 따뜻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딘가, 제니쓰의 얼어붙은 황야에서, 희미한 푸른 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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