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은WhtDrgon
세계관이 아무리 장대하고 정교하게 설계되었다 하더라도, 텅 빈 무대에 불과하다면 아무도 그곳을 찾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을 이 낯선 세계로 이끄는 것은 결국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매력적인 존재, 바로 ‘캐릭터(Character)’다. 캐릭터는 사용자가 세계관과 처음으로 만나는 관문이자, 그 세계에 감정적으로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통로다.
캐릭터는 주인공과는 다르다. 세계에 살고있는 모두가 캐릭터이며, 내가 될 대상이다. 주인공은 세계관이 아닌, 어떤 한 인물의 타임라인, 즉 작품의 것이고, 캐릭터는 내가 해리포터가 아닌 호그와트의 학생, 스톰트루퍼, 제다이, 케데헌의 관객이 되고 싶을 때, 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육체적 그릇, 즉 '아바타라'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캐릭터를 ‘이야기 속 등장인물’ 정도로 생각하지만, 강력한 세계관 속에서 캐릭터는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들은 단순히 작가의 의도를 수행하는 장기 말이 아니라, 우리와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존재감을 가진 인격체로서 인식된다. 우리는 셜록 홈즈가 실존 인물이라고 믿고 싶어 하고, 해리 포터의 생일을 축하하며, 아이언맨의 죽음에 진심으로 눈물 흘린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첫째, 잘 만들어진 캐릭터는 우리의 ‘대리자(Proxy)’가 된다. 우리는 캐릭터를 통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경험을 안전하게 대리 체험한다. 캐릭터의 몸을 빌려 하늘을 날고, 마법을 쓰며,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 이 대리 경험은 우리에게 카타르시스와 성취감을 안겨주며, 팍팍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하는 즐거운 탈출구가 된다.
둘째, 캐릭터는 우리의 ‘관계 맺고 싶은 대상(Object of Relationship)’이 된다. 우리는 캐릭터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고, 그를 연인처럼 사랑하며, 때로는 자식처럼 보살피고 싶어 한다. 이 가상의 관계는 현실의 인간관계만큼이나, 때로는 그 이상으로 우리의 삶에 깊은 위안과 정서적 충족감을 준다. 캐릭터는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고, 언제나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어 주는 이상적인 관계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캐릭터가 우리의 ‘정체성을 투영하는 거울(Mirror for Identity)’이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캐릭터의 고뇌와 성장을 보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의 선택을 통해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캐릭터는 우리가 닮고 싶은 이상적인 모습의 현신이기도 하고, 우리가 감추고 싶은 어두운 욕망의 발현이기도 하다. 이처럼 캐릭터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는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세계관 속 캐릭터는 단순한 등장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사용자가 자신을 투영하고,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경험을 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하고 확장해나가는 살아있는 매개체다. 따라서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은 세계관 구축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핵심적인 과업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중요한 ‘매력’은 과연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떻게 해야 더 깊고 강력하게 만들 수 있을까?
캐릭터의 매력이 어떻게 형성되고 팬덤으로 발전하는지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모델이 바로 현대 K팝 산업이다. 수많은 아이돌 그룹이 쏟아져 나오는 치열한 시장에서, 살아남는 이들은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을 체계적으로 설계하고 심화시키는 데 성공한 이들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아이돌 4계층 이론’이라는 렌즈를 통해 분석함으로써, 모든 종류의 캐릭터 매력을 구축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1계층: 자연인 (The Natural Person) - 본능적 매력의 단계
모든 매력의 시작은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끌림에서 비롯된다. 1계층은 아이돌 개인이 가진 타고난 신체적, 인성적 매력을 의미한다. 잘생긴 외모, 아름다운 음색, 사람을 끄는 미소, 다정한 성격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특별한 서사나 맥락 없이도 즉각적으로 사람들의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자연인’으로서의 매력이다. 팬들은 “우리 오빠는 얼굴이 복지다”라고 말하며, 이 1계층의 매력만으로도 기꺼이 팬이 된다. 이것은 모든 매력의 기초가 되는 단단한 기반이다.
2계층: 직능 (The Professional) - 역할 수행의 단계
하지만 본능적 매력만으로는 프로페셔널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2계층은 아이돌이 ‘가수’라는 직업적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에 대한 평가다. 뛰어난 가창력, 파워풀한 댄스 실력,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 등, 수많은 훈련을 통해 연마된 ‘직능’이 바로 그것이다. 팬들은 이제 단순히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보여주는 ‘프로’로서의 아이돌을 존경하고 응원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매력은 감탄과 존경의 감정으로 심화된다. 일반 대중이 팬이 되는 가장 보편적인 경로이기도 하다.
3. 계층: 배역 (The Role-player) - 서사적 매력의 단계
3계층부터는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개입하기 시작한다. 이 단계에서 아이돌은 더 이상 가수 김민수가 아니라, 뮤직비디오 속에서 사랑을 잃고 절규하는 ‘비련의 주인공’이라는 ‘배역’을 연기한다. 우리는 배우가 연기하는 역할에 쉽게 몰입하듯, 아이돌이 부여받은 콘셉트와 서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번 앨범에서 그들은 반항적인 혁명가일 수도 있고, 신비로운 뱀파이어일 수도 있다. 이 ‘배역’은 아이돌에게 입체적인 개성과 서사를 부여하고, 팬들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매력은 이제 공감과 연민, 서사적 호기심으로 확장된다.
4. 계층: 세계관 속 캐릭터 (Character in the Universe) - 신화적 매력의 단계
매력의 최종 단계는 캐릭터가 단순히 하나의 배역을 넘어, 고유한 법칙과 역사를 가진 독립적인 ‘세계관’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아이돌은 더 이상 지구인이 아니라, ‘엑소플래닛’이라는 외계 행성에서 온 ‘초능력자’라는 신화적 존재로 격상된다. 팬들은 이제 단순히 노래를 듣고 무대를 보는 것을 넘어, 이 거대한 세계관을 탐구하고 해석하며, 그 안에서 자신만의 역할을 찾는 ‘주민’이 된다.
이 4계층은 매우 강력하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단계이기도 하다. 세계관에 관심이 없는 일반 대중이나 1, 2계층의 매력에 만족하는 팬들에게 ‘초능력’ 설정은 유치하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경험을 줄 수 있다. 따라서 4계층은 반드시 그 세계관을 즐길 준비가 된 사람들만을 위한 ‘닫힌 문’을 통해 제공되어야 한다. 문턱을 만들어 무관심한 사람들이 휩쓸려 들어와 부정적인 경험을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 문을 통과한 팬들에게, 캐릭터는 이제 현실을 초월한 믿음의 대상, 즉 ‘신화’가 된다. 이 신화적 매력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고 깨지지 않는 팬덤을 구축하는 궁극의 경지다.
이 4단계 모델은 비단 아이돌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모든 캐릭터에 적용될 수 있다. 매력적인 외형(1계층)을 갖추고, 자신의 역할(전사, 마법사)을 훌륭히 수행하며(2계층), 흥미로운 서사(배역)를 가진 뒤, 마침내 그를 둘러싼 독창적인 세계관의 일부가 될 때, 캐릭터는 비로소 단순한 등장인물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존재가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간다. 회사에서는 유능한 직장인의 얼굴을, 집에서는 다정한 부모의 얼굴을, 친구들 앞에서는 유쾌한 농담꾼의 얼굴을 한다. 심리학자 칼 융은 이렇게 사회적 요구에 맞춰 개인이 쓰는 공적인 얼굴을 ‘페르소나(Persona)’, 즉 ‘가면’이라고 불렀다. 이 페르소나는 사회생활을 위한 필수적인 도구이지만,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나’라는 단일한 본체에 귀속되어 있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여러 가면을 바꿔 쓸 뿐, 가면 뒤의 ‘진짜 나’는 하나라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물리적 세계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자아 개념이다. 장소와 복장을 바꾸면 나의 역할, 즉 페르소나가 바뀌는 것이다. 교회에 가면 신도가 되고, 학교에 가면 학생이 된다. 이 모든 역할 변화의 중심에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육체가 존재한다.
하지만 디지털 세계, 특히 메타버스가 도래하면서 이 개념은 근본적인 도전을 맞이하고 있다. 디지털 세계에서 우리는 육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페르소나’를 넘어선 ‘캐릭터(Character)’의 개념이다.
페르소나가 ‘현실의 나’에 종속된 역할이라면, 캐릭터는 ‘디지털 세계’ 안에서 독립적인 정체성과 역사를 가진 자율적인 존재다.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내가 조종하는 오크 전사는 단순히 ‘게임하는 나’라는 페르소나가 아니다. 그는 아제로스라는 세계에서 태어나, 수많은 전투를 겪고, 동료들과 길드를 만들어 모험을 떠나온, 그 자체로 온전한 역사를 가진 하나의 인격체다. 물론 그 캐릭터를 움직이는 것은 현실의 나지만, 커뮤니티 안에서 사람들은 나를 현실의 김민수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전사 ‘그롬헬스크림’으로 인식하고 관계를 맺는다. 나의 본체는 캐릭터의 그림자 뒤로 사라진다.
이 차이는 ‘관계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명확해진다. 두 사람이 온라인 영화 팬 커뮤니티에서 만났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은 서로의 직업, 나이, 외모를 전혀 모른다. 그들을 연결하는 유일한 끈은 ‘영화를 사랑한다’는 공통의 정체성뿐이다. 이 커뮤니티 안에서 그들은 현실의 페르소나를 벗어 던지고, ‘시네필’이라는 독립적인 캐릭터로서 존재하며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본체가 중요하지 않은, 캐릭터와 캐릭터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메타버스가 꿈꾸는 미래는 바로 이 수많은 캐릭터들이 서로 교류하며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가는 세상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인간의 모습을 할 수도 있고, 동물의 모습을 할 수도 있으며, 상상 속의 어떤 존재로도 살아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내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내가 어떤 캐릭터로 살아가는가’이다.
따라서 메타버스 시대의 세계관 설계자는 단순히 흥미로운 공간을 만드는 것을 넘어, 사용자들이 그 안에서 의미 있는 ‘캐릭터’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내가 이 세계에서 어떤 존재이며,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다른 캐릭터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가 필요하다. 페르소나의 시대가 저물고, 이제 우리 각자가 수많은 캐릭터로서 살아가는 ‘다중 자아’의 시대가 오고 있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어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선물할 것인가?
250819
김동은WhtDrgon.
MEJE Wor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