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세계관은 단순히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공상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현실의 사람들을 움직이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마침내 하나의 살아있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구체적인 힘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이 보이지 않는 세계관은 과연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수많은 공동체의 흥망성쇠를 목격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결속시키며, 때로는 개인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게 만들었던 세 가지의 거대한 ‘권력 모델’이 존재한다. 바로 정치(Politics), 종교(Religion), 그리고 팬덤(Fandom)이다.
이 세 가지 모델은 언뜻 보기에 전혀 다른 영역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사람들에게 ‘소속될 세계’와 그 안에서의 ‘역할과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각각 ‘계급’, ‘신념’, ‘소비’라는 서로 다른 작동 원리를 통해 사람들의 행동을 조직하고, 그들의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응집시키는 보이지 않는 설계도로서 기능해왔다.
‘정치’는 명확한 위계질서를 통해 공동체의 안정을 유지하고 목표를 달성한다. ‘종교’는 세상의 근원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숭고한 소명을 부여함으로써 개인의 삶에 의미를 불어넣는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탄생한 ‘팬덤’은 열정적인 소비 행위를 통해 대상의 가치를 창조하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이 장에서는 세계관이 현실에서 구체적인 힘을 갖기 위해 반드시 참조해야 할 이 세 가지 권력 모델을 하나씩 심층적으로 해부하고자 한다. 우리가 만들려는 세계관이 구성원들에게 어떤 질서 속에서 행동하게 할 것인지(정치 모델), 어떤 궁극적인 믿음과 목적을 제시할 것인지(종교 모델),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떻게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고 인정받게 할 것인지(팬덤 모델)에 대한 답을 이 세 가지 모델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사회 현상을 분석하기 위한 틀이 아니라, 당신이 만들고자 하는 세계의 운영체제(OS)를 설계하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 실용적인 청사진이다.
모든 공동체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질서’가 필요하다. 누가 결정하고 누가 따를 것인지, 각자의 역할과 책임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규칙이 없다면 조직은 혼란에 빠지고 와해될 수밖에 없다. ‘정치 모델’의 핵심은 바로 이 질서를 구축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효과적인 방법, 즉 위계질서(Hierarchy)에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정치 모델은 단연 ‘국가(Nation)’다. 국가는 대통령, 국회의원, 공무원, 그리고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정교한 계급 체계를 통해 운영된다. 우리는 법이라는 규칙을 따르고, 세금을 내는 의무를 지며, 그 대가로 국가로부터 보호받고 사회 기반 시설을 이용할 권리를 얻는다. 이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부여받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위계질서는 국가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거의 모든 조직에서 발견된다. 회사에는 사원, 대리, 과장, 부장이라는 명확한 직급이 존재한다. 부하 직원은 상사의 지시를 따르고, 상사는 그 결과에 책임을 진다. 이 계급 시스템이 있기에 회사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며 이윤 창출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군대는 이러한 계급 질서가 가장 극단적으로 구현된 조직이다. 이등병부터 장군까지, 절대적인 상명하복의 원칙이 조직의 생존을 좌우한다.
세계관을 구축할 때 이 정치 모델을 참조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위계질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경험하는 최초이자 가장 근원적인 정치 공동체는 바로 ‘가정(Family)’이다. 가정 안에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명확한 역할과 권위의 차이가 존재한다. 자녀는 부모의 보호와 가르침을 받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고 책임질 의무를 진다. 우리는 이 최초의 경험을 통해 존중, 복종, 사랑, 책임과 같은 사회적 관계의 기본을 배운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이야기가 ‘가족’이라는 코드를 차용하는 이유다. 영화 《대부》 속 마피아 조직은 ‘패밀리’라는 이름 아래 강력한 위계질서와 충성의 규칙으로 움직인다.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두 주인공이 유사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형성하며, 플레이어에게 강력한 보호의 본능과 감정 이입을 불러일으킨다. ‘가족’이라는 하이어라키를 제시하는 순간, 사용자들은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이야기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당신이 만들고자 하는 세계관은 구성원들에게 어떤 질서를 제공할 것인가? 왕과 기사, 스승과 제자, 길드 마스터와 길드원처럼 명확한 계급을 설정할 수도 있고, 보다 수평적이지만 각자의 역할과 책임이 명확한 공동체를 설계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구성원들이 자신이 이 세계 안에서 어디에 위치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안정적인 ‘좌표’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좌표가 명확할 때, 공동체는 비로소 혼란을 넘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
인간은 단순히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묻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영적인 존재다. 정치 모델이 공동체의 ‘외적인 질서’를 구축한다면, ‘종교 모델’은 개인의 ‘내적인 동기’를 관장한다. 그 핵심은 세상의 근원적인 질문에 답을 제시하는 ‘지식 체계(Knowledge System)’와, 개인의 삶에 숭고한 목적을 부여하는 ‘소명 의식(Sense of Calling)’에 있다.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인간은 왜 고통받으며,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거대한 서사를 제공한다. 천지창조, 윤회, 최후의 심판과 같은 이야기들은 혼돈스러워 보이는 세상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고, 신도들에게 안정적인 세계관을 제공한다. 이것이 종교가 가진 ‘지식 체계’로서의 역할이다. 우리는 이 지식 체계를 통해 자신이 더 큰 이야기의 일부임을 깨닫고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다.
더 나아가 종교는 단순히 세상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개인이 수행해야 할 특별한 임무, 즉 ‘소명’을 부여한다. 신의 뜻을 세상에 전파하는 선교사,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행하는 수행자, 약속된 땅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 전사 등. 이 소명 의식은 개인에게 자신의 삶을 뛰어넘는 숭고한 목표를 제시하고, 때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초월적인 헌신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종교 모델의 구조는 강력한 세계관을 만드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영감을 준다. 잘 만들어진 세계관은 단순히 흥미로운 설정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의 근원적인 비밀과 궁극적인 목적을 암시해야 한다. 《스타워즈》의 ‘포스(The Force)’는 선과 악의 이면에 흐르는 우주적 에너지로서, 세계의 균형을 설명하는 지식 체계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제다이 기사’는 바로 이 포스의 균형을 지키라는 소명을 부여받은 존재다. 팬들은 제다이가 되어 우주의 평화를 지키는 숭고한 임무에 동참하기를 꿈꾼다.
당신이 만들고자 하는 세계관은 구성원들에게 어떤 궁극적인 ‘왜?’에 대한 답을 줄 것인가? 당신의 세계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은 무엇이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구성원들이 수행해야 할 공동의 임무는 무엇인가? ‘악의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 ‘오염된 세상을 정화하는 것’, ‘잊혀진 고대의 진실을 되찾는 것’ 등. 이처럼 구성원들에게 단순한 보상을 넘어선 숭고한 ‘소명’을 제시할 때, 그들은 단순한 플레이어를 넘어 당신의 세계를 지키는 열정적인 신도가 될 것이다. 이 내적인 동기야말로 어떤 어려움에도 꺾이지 않는,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참여의 원동력이 된다.
정치 모델이 ‘질서’를, 종교 모델이 ‘의미’를 제공한다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탄생한 ‘팬덤 모델’은 구성원들이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그 핵심은 바로 ‘투자적 소비(Investive Consumption)’ 행위에 있다.
전통적인 경제학에서 소비는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행위로 간주된다. 하지만 팬덤의 세계에서 소비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K팝 팬이 똑같은 앨범을 수십, 수백 장씩 구매하는 것은 음악을 듣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음반 판매량을 높여 자신이 사랑하는 아티스트의 순위를 올려주려는 ‘투자’ 행위이자, 팬 사인회에 당첨되어 아티스트와 더 가까워지려는 열망의 표현이며, 다른 팬들 앞에서 자신의 열정과 충성심을 증명하는 과시적 행위이기도 하다.
이처럼 팬덤 모델에서 소비는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커뮤니티 내에서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확보하며, 대상의 가치를 직접 창조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된다. 예술품 시장의 컬렉터들이 경매에서 높은 가격을 부름으로써 특정 작가의 가치를 끌어올리듯, 팬들의 열정적인 소비는 그들이 사랑하는 대상의 사회적, 경제적 가치를 직접적으로 만들어낸다. ‘우리 오빠/언니를 우리가 지키고 키운다’는 이 믿음은 팬덤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다.
이러한 팬덤 모델의 메커니즘은 모든 세계관 기반 비즈니스에 적용될 수 있다. 게임 속에서 희귀한 한정판 아이템을 구매하는 행위는 단순히 캐릭터를 강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다른 유저들에게 자신의 재력과 열정을 과시하고 커뮤니티 내에서 존경받는 ‘큰손’으로 인정받기 위한 행위다. 크라우드 펀딩에서 높은 등급의 후원 옵션을 선택하는 것은, 단순히 더 많은 리워드를 받기 위함이 아니라, 프로젝트의 성공에 더 크게 기여한 ‘핵심 후원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은 명예욕의 발현이다.
지출은 즐겁다. 사람들은 돈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돈의 소비를 꿈꾸는 것이다.
창작자들이 할 일은 소비하지 않게 하는게 아니라 소비를 후회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만들고자 하는 세계관은 구성원들이 자신의 열정과 기여를 효과적으로 ‘증명’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다양한 통로를 마련해야 한다. 단순히 상품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소비 행위에 특별한 의미와 명예를 부여해야 한다.
한정판과 희소성: 누구나 가질 수 없는 희귀한 아이템을 통해 소유욕과 과시욕을 자극한다.
기여도 랭킹: 후원 금액이나 활동량에 따라 순위를 매기고 특별한 칭호를 부여하여 경쟁과 명예욕을 부추긴다.
인증과 기록: 특정 업적을 달성한 사람의 이름을 세계관의 역사에 기록해주거나, 특별한 인증 마크를 제공하여 성취감을 극대화한다.
결국 팬덤 모델의 핵심은, 구성원들의 ‘소비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긍정하고, 그들의 소비가 단순한 지출이 아니라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는 숭고하고 즐거운 ‘투자’ 행위가 되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이 투자적 소비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 때, 당신의 세계관은 비로소 지속 가능한 경제적 기반을 갖춘 강력한 커뮤니티로 성장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