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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경험을 호출하는 힘, '마들렌 효과'

by 김동은WhtDrgon


8-1. 기억의 방아쇠, 마들렌 효과란 무엇인가


세계관을 구축하는 작업은 종종 백지 위에 새로운 도시를 설계하는 일에 비유되곤 한다. 하지만 이 비유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우리는 결코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의 진짜 출발점은 백지가 아니라, 사람들 각자의 마음속에 이미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무수한 경험과 기억의 도서관이다. 세계관 제작자의 진정한 임무는 새로운 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 방대한 도서관에 잠들어 있는 책들을 깨우는 ‘열쇠’를 만드는 일이다.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이 원리를 상징하는 매우 유명한 장면이 등장한다. 주인공 마르셀은 어느 겨울날,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 한 조각을 맛본다. 그 순간, 아무런 맥락 없이 까맣게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통째로 되살아나는 강렬한 체험을 한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맛과 향이, 과거 콩브레의 레오니 고모 댁에서 주일 아침마다 겪었던 똑같은 경험을 신경세포 깊은 곳에서부터 ‘호출’해낸 것이다.


이처럼 특정 감각적 자극(맛, 향기, 소리, 이미지)이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불러일으키는 현상을 우리는 ‘마들렌 효과(The Madeleine Effect)’라고 부른다. 이는 단순히 ‘옛날 일이 생각났다’는 수준의 회상이 아니다. 마들렌 효과는 논리적 추론 과정을 건너뛰고, 기억과 연결된 감정, 분위기, 심지어 신체적 감각까지 한꺼번에 현재로 소환하는 강력한 ‘경험의 재현’이다. 비 오는 날 흙냄새를 맡으면 문득 어린 시절 뛰어놀던 시골 할머니 댁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고, 특정 멜로디를 들으면 첫사랑의 설렘과 아픔이 가슴속에 되살아나는 것, 이 모든 것이 마들렌 효과의 일종이다.


세계관 창작자는 바로 이 마들렌 효과를 의도적으로 설계하고 활용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만드는 세계관 속 모든 요소—캐릭터의 눈빛, 특정 장소의 분위기,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상징이나 단어—는 잠재 고객의 마음속 경험 도서관을 여는 열쇠, 즉 ‘호출 부호(Call Sign)’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감정을 ‘주입’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 그럴 수도 없다. 대신, 그들 안에 이미 존재하는 슬픔, 기쁨, 분노, 그리움의 감정을 정확하게 조준하여 깨우는 방아쇠를 만들면 된다.


예를 들어, ‘첫눈’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라는 물리적 현상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우리의 뇌는 즉각적으로 과거 ‘첫눈’과 관련된 모든 경험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맞았던 낭만적인 기억, 입시를 앞두고 창밖을 보며 느꼈던 막막함, 친구들과 눈싸움을 하던 즐거움 등. 이 수많은 개인적 경험의 총합이 ‘첫눈’이라는 단어에 풍부한 감성적 아우라를 덧씌운다.


결국, 잘 만들어진 세계관이란 새로운 정보의 집합이 아니라, 익숙한 경험들의 새로운 조합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감정을 새로운 맥락 속에서 재발견하게 함으로써 깊은 공감과 몰입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우리의 진짜 재료는 텍스트와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들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시간 그 자체다.


8-2. 공통 경험이라는 거대한 자산: IMF부터 2002 월드컵까지


마들렌 효과가 개인의 내밀한 기억을 깨우는 미시적인 열쇠라면,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공유하는 ‘공통 경험(Shared Experience)’은 한 세대 전체의 마음을 뒤흔드는 거대한 공명판과 같다. 개인의 경험이 저마다 다른 빛깔을 띤 보석이라면, 공통 경험은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 속에 거대한 강처럼 흐르는 집단 무의식의 원류다. 세계관이 개인의 공감을 넘어 사회적 현상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거대한 강의 물줄기를 건드려야 한다.


1997년 겨울, 대한민국은 IMF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국난을 맞았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아버지들, ‘아나바다’ 운동과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던 어머니들, 용돈이 끊기고 낯선 불안감에 휩싸였던 아이들.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에게 IMF는 단순히 경제 용어가 아니라, 가족의 해체, 생존의 위협, 그리고 그것을 함께 이겨냈다는 처절한 연대감의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이나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그토록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IMF라는 공통의 상흔을 정면으로 건드렸기 때문이다. 작품 속 인물들이 겪는 고통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반대로, 2002년 한일 월드컵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폭발적인 ‘공동의 성공 경험’으로 기록된다. “대~한민국!”을 외치며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웠던 붉은 물결, 4강 신화의 기적을 함께 목격하며 느꼈던 환희와 자부심. 이 경험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를 넘어, IMF로 위축되었던 국민적 자존감을 회복하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집단적 효능감을 심어준 거대한 의식이었다. 이후 어떤 콘텐츠든 태극기, 붉은 악마, 축구공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는 순간, 2002년의 그 뜨거웠던 여름의 감정이 무의식적으로 호출된다. 그것은 단순한 애국심을 넘어,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던 승리의 기억이자 하나됨의 경험이다.


이처럼 공통 경험은 강력한 문화적 자산이다. 그것은 별도의 설명 없이도 즉각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치트키’와 같다. 창작자는 자신이 타겟으로 하는 세대가 어떤 공통 경험의 강을 건너왔는지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열망,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져온 문화적 충격, 2000년대 초반의 닷컴 버블과 좌절, 2010년대의 촛불 집회와 세월호 참사의 아픔까지. 이 모든 집단적 기억은 우리 안에 살아 숨 쉬며 현재 우리의 판단과 감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가적 경험을 예로 든 것은 국가급 공통경험이기 때문이다. 이 공통경험 자체가 커뮤니티를 규정하게 된다. 즉 세계관이라는 경험의 기호와 상징이 커뮤니티를 규정하는 지식체계가 되는 것이다. 검은 색 고양이나 공룡에서 아이돌 멤버를 떠올리는 사람들의 그룹이 있다. 커뮤니티는 이 지식체계를 통해 서로를 식별한다.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를 선정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우리 사회가 공유하게 된 보편적인 감정—불안, 희망, 연대, 분노, 슬픔—을 존중하고, 그것을 현재의 이야기에 진정성 있게 녹여내는 것이다. 공통 경험이라는 거대한 자산은, 그것을 책임감 있게 다룰 준비가 된 자에게만 강력한 힘을 허락한다.


8-3. 호출 부호 설계하기: 세월호를 직접 말하지 않고 세월호를 말하는 법


경험을 호출하는 원리를 이해했다면, 이제는 그것을 실제로 설계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고도로 숙련된 세계관 설계자는 자신이 원하는 개념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사용자의 마음속에서 그 개념이 총체적으로 떠오르도록 만들 수 있다. 이는 마치 여러 악기를 조합하여 하나의 완벽한 화음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도 같은 작업이다. 우리는 이 설계 기법을 ‘키워드 클라우드를 통한 연상 유도’라고 부른다.

하나의 강력한 사회적 사건,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를 생각해보자. ‘세월호’라는 단어 자체는 매우 직접적이고 강력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논쟁이나 사건의 참혹함 같은 너무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불러와 이야기의 결을 해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월호’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사람들 마음속에 그날의 아픔과 기억을 떠올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세월호 참사’라는 중심 개념을 둘러싼 핵심 키워드들을 나열해 본다. 이 키워드들은 인물, 사물, 장소, 시간, 감정 등 다양한 카테고리로 분류될 수 있다.


시간/장소: 4월 16일, 진도 앞바다, 안산, 단원고등학교

사물/상징: 노란 리본, 학생들의 교복, 책상 위의 국화꽃, 다이빙 벨, 구명조끼

인물/역할: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들, 잠수부, 유가족, 선장

감정/개념: 기다림, 미안함, 분노, 무력감, ‘가만히 있으라’


이제 이 키워드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장면에 배치해보자. 예를 들어, 한 영화의 도입부가 다음과 같다고 상상해보자. 궂은비가 내리는 4월의 어느 날, 한 중년 남자가 텅 빈 교실을 찾아온다. 책상 위에는 하얀 국화꽃 다발이 놓여 있고, 창가에는 빛바랜 노란 리본들이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남자는 낡은 교복 재킷을 어루만지며, “미안하다”고 나지막이 읊조린다.


이 장면 어디에도 ‘세월호’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세월호는 배 이름일 뿐이다. 하지만 이 장면을 본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날의 비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4월’, ‘국화꽃’, ‘노란 리본’, ‘교복’, ‘미안함’이라는 각각의 호출 부호들이 서로 공명하며 하나의 강력한 키워드 클라우드를 형성했고, 이 클라우드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세월호 참사’라는 공통 경험을 정확하게 호출해낸 것이다. 각 키워드들은 지역과 단체, 정치나 종교, 기업 등의 인접 키워드로 연결되어 퍼지고, 키워드를 신중히 설계함으로서 어느 방향으로든 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호출 부호 설계의 힘이다. 그리고 세계관 설계가 관심사로 떠오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치, 종교, 팬덤 그리고 가정, 교육, 예술의 세계관이 겹겹으로 우리의 인생의 짜임을 만들어낸다.


이 기법은 비단 슬픈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당신의 브랜드가 ‘따뜻한 가족의 사랑’이라는 가치를 전달하고 싶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가족을 사랑합니다”라고 직접적으로 외치는 대신, 저녁노을이 지는 마당, 펄럭이는 빨래, 밥 짓는 냄새, 아이의 웃음소리, 아빠의 낡은 구두 같은 키워드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강력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세계관 설계란 메시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환기’시키는 기술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머리에 새로운 정보를 집어넣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슴속에 이미 존재하는 감정의 현을 울리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달하려는 핵심 가치를 수많은 키워드로 분해하고, 그 키워드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조합하여 사용자 스스로가 의미를 완성하게 만드는 정교한 설계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당신이 만들고자 하는 세계의 핵심 경험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경험을 깨울 수 있는 당신만의 키워드 클라우드는 어떤 모습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순간, 당신의 세계관은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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