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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매스미디어의 종말과 팬덤 비즈니스의 부상

by 김동은WhtDrgon


6장. 매스미디어의 종말과 팬덤 비즈니스의 부상


6-1. 모두가 다른 채널을 보는 시대


“영구 없다~!”

1980년대 후반, 한 코미디언이 읊조린 이 어눌한 대사 한마디는 다음 날 아침 대한민국 전역을 휩쓰는 국민적 유행어가 되었다.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세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모두가 이 유행어를 알고 있었고, 함께 웃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 시절 우리에겐 ‘모두가 함께 보는’ 텔레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 8시가 되면 온 가족은 어김없이 거실 텔레비전 앞에 모여들었다. 채널은 KBS, MBC, SBS 등 손에 꼽을 정도였고, 9시 뉴스가 끝나고 방영되는 드라마나 코미디 프로그램은 사실상 전 국민의 공통된 화제였다. 광고 또한 마찬가지였다. ‘따봉’, ‘난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에요’ 같은 광고 카피는 제품의 이름을 몰라도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매스미디어(Mass Media)가 가진 막강한 힘이었다. 소수의 송신자가 다수의 수신자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시대. 하나의 메시지가 사회 전체를 관통하고, 하나의 유행이 공동체 전체를 묶어주는 강력한 구심점으로 작용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21세기의 풍경은 완전히 다르다. 오늘날 한 교실에 모인 서른 명의 학생에게 어젯밤 무엇을 봤는지 물어본다면, 아마 서른 개의 다른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누군가는 고양이 영상을 봤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게임 스트리머의 방송을, 또 다른 누군가는 아이돌의 직캠이나 넷플릭스 드라마를 시청했을 것이다. 거실의 텔레비전은 각자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으로 대체되었고, 정해진 편성표는 개인의 취향을 귀신같이 읽어내는 유튜브 알고리즘에 자리를 내주었다.


우리는 지금 ‘초개인화된 미디어’의 시대, 즉 ‘대파편화(The Great Fragmentation)’의 시대를 살고 있다. 매스미디어가 하나의 거대한 광장이었다면, 지금의 미디어 환경은 각자의 관심사로 이루어진 무수히 많은 ‘작은 섬’들의 군도와 같다. 이 섬들은 알고리즘이라는 투명한 벽으로 둘러싸여 서로를 인지하지 못한 채 고립되어 간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같은 언어를 써도 공통의 화제를 찾기 어려워졌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미디어 소비 습관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브랜드를 알리고, 메시지를 전파하고,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내던 과거의 모든 성공 방정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루 수억 원의 광고비를 들여 TV 황금 시간대에 광고를 내보내도, 그 광고를 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더 이상 ‘국민 유행어’도, ‘국민 드라마’도 탄생하기 어려운 시대. 우리는 매스미디어 시대의 종결을 공식적으로 선언해야만 한다. 거대한 광장은 사라졌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섬으로 흩어졌다. 그렇다면 질문은 명확해진다. 이 파편화된 세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다시 사람들을 연결하고, 어떻게 공동의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6-2. 구독에서 팬덤으로, 팬덤에서 세계관으로

광장이 사라지자, 기업과 창작자들은 흩어진 섬들을 찾아 나서는 새로운 항해를 시작해야 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외침이 더 이상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이 가장 먼저 발견한 해법은 ‘구독 모델(Subscription Model)’이었다.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욕심을 버리고, ‘특정한 우리’를 찾아내 그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잡지 구독, 우유 배달처럼 고전적인 형태부터 넷플릭스, 멜론 같은 디지털 구독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구독 모델의 핵심은 일회성 판매가 아닌 장기적인 관계 형성을 통한 안정적인 수익 창출에 있었다. 이는 파편화 시대의 첫 번째 생존 전략이었다.


하지만 곧 구독 모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매달 일정 금액을 내는 고객은 언제든 더 나은 대체재가 나타나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계약 관계’에 가깝다. 여기서 한 단계 더 진화한 모델이 바로 ‘팬덤 비즈니스(Fandom Business)’다. 팬덤 비즈니스는 단순한 계약 관계를 넘어, 깊은 ‘정서적 유대 관계’를 구축한다. K팝 산업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팬들은 단순히 음원을 ‘구독’하는 소비자가 아니다. 그들은 앨범을 수백 장씩 구매하고, 굿즈를 모으고, 아티스트의 성장을 위해 시간과 돈, 감정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적극적인 파트너다. 이들에게 소비는 필요를 채우는 행위를 넘어, 자신의 사랑과 지지를 증명하고 소속감을 확인하는 신성한 의식과도 같다. 비즈니스의 목표가 ‘유지(Retention)’에서 ‘충성(Loyalty)’으로 이동한 것이다.


팬덤이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커뮤니티(Community)’가 만들어진다. 팬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2차 창작물을 만들며,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쌓아나간다. 그런데 이 강력한 공동체를 더욱 단단하게 묶어주는, 그저 ‘좋아한다’는 감정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했다. 같은 아이돌을 좋아하더라도 팬들 사이의 결속력을 극대화하고, 그들의 활동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할 ‘공통의 시공간’은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이 바로 ‘세계관(Worldview/Universe Setting)’이다. 세계관은 커뮤니티가 살아 숨 쉴 수 있는 가상의 영토이자,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헌법이다. 팬덤 활동은 이제 ‘덕질’을 넘어 ‘세계관을 지키고 확장하는 임무’라는 숭고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비즈니스 모델의 진화는 마침내 최종 단계에 이르렀다. 흩어진 개인을 ‘구독자’로 묶고, 구독자를 ‘팬’으로 만들며, 팬들을 ‘커뮤니티’로 조직하고, 최종적으로 그 커뮤니티에 ‘세계관’이라는 영혼을 불어넣는 것. 이것이 파편화된 시대를 헤쳐 나가는 가장 진화된 항해술이다.


6-3. 이 책이 당신에게 줄 것: 세계관이라는 생존 지도


이쯤에서 많은 이들이 의문을 가질 것이다. ‘세계관’은 판타지 소설가나 게임 기획자에게나 필요한 전문 영역이 아닌가? 우리 브랜드, 우리 회사, 나의 창작 활동과 과연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 책은 바로 그 고정관념에 도전하기 위해 쓰였다. 이 책에서 말하는 세계관은 용과 마법이 등장하는 가상의 설정을 넘어,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강력한 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한 핵심 전략이다. 세계관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모든 창작자와 마케터, 브랜드 매니저, 커뮤니티 리더가 반드시 갖춰야 할 ‘생존 지도’다.


당신이 만약 신제품 론칭을 앞둔 마케터라면, 이 책은 당신의 제품에 잊을 수 없는 서사를 입혀 고객을 열광적인 팬으로 만드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 당신이 퍼스널 브랜딩을 고민하는 크리에이터라면, 당신만의 고유한 세계관을 통해 대체 불가능한 존재감을 구축하는 노하우를 얻게 될 것이다. 스타트업 창업가라면, 당신의 비전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설계하여 투자자와 팀원, 그리고 초기 고객들을 강력한 운명 공동체로 묶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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