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이라는 개념이 오늘날처럼 비즈니스와 문화의 핵심 키워드로 떠오르기 훨씬 이전, 모든 것의 시작은 조촐했다. 1974년, 미국의 작은 출판사 TSR에서 내놓은 허름한 박스 세트, 바로《던전 앤 드래곤》(Dungeons & Dragons, 이하 D&D) 이 그 출발점이었다. D&D는 컴퓨터도, 화려한 그래픽도 없이 오직 종이와 펜, 기묘한 모양의 주사위, 그리고 상상력만으로 무한한 모험의 세계를 펼쳐내는 새로운 형태의 놀이, ‘테이블톱 롤플레잉 게임(Tabletop Role-Playing Game, 이하 TRPG)’의 시초였다.
D&D가 등장하기 전, 세상의 모든 게임은 정해진 규칙 안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경쟁’을 기반으로 했다. 하지만 D&D는 달랐다. 이 게임의 목적은 누군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에 있었다. 한 명의 ‘던전 마스터(Dungeon Master)’가 게임의 배경과 상황을 설명하면,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각자 전사, 마법사, 도둑 같은 자신만의 캐릭터가 되어 그 세계 속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자유롭게 결정했다. “갈림길이 나타났습니다. 왼쪽에서는 축축한 바람이, 오른쪽에서는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던전 마스터의 이 한마디에 플레이어들은 각자의 상상력을 발휘해 미지의 세계를 탐험했다.
초기의 D&D는 사실 ‘세계관’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할 정도로 단순했다. 그저 “던전에 들어가서 몬스터를 죽이고 보물을 얻는다”는 기본적인 뼈대만 존재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반복되면서 기묘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늘 죽였던 몬스터가 살던 던전 옆에는 어떤 마을이 있을까? 그 마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플레이어들은 어제의 모험과 오늘의 모험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시공간 속에서 연결되기를 원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출판사는 시나리오북을 하나둘씩 내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무슨 던전’, ‘어디어디 평야’처럼 단편적인 모험의 무대에 불과했던 것들이, 회차가 쌓이면서 하나의 거대한 지도 위에 점처럼 이어지기 시작했다. 남쪽으로 모험을 떠났다면, 다음엔 북쪽으로도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지도가 그려지고,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덧붙여지면서 마침내 하나의 일관된 세계, ‘미스타라(Mystara)’가 탄생했다. 이제 플레이어들은 단순히 몬스터를 사냥하는 용병이 아니라, 미스타라라는 세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영웅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관 비즈니스의 가장 원초적인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 TSR은 D&D라는 놀이의 ‘규칙(Rulebook)’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플레이어들이 모험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이야기의 무대(World)’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J.R.R.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위해 창조한 ‘중간계(Middle-earth)’와는 결이 달랐다. 중간계가 위대한 작가의 머릿속에서 완성된, 독자들이 오직 ‘감상’만 할 수 있는 닫힌 세계였다면, 미스타라는 던전 마스터와 플레이어들이 함께 뛰어들어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할 수 있는 열린 무대였다.
D&D의 성공은 수많은 아류를 낳으며 TRPG라는 장르를 개척했고, 이는 곧이어 등장할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CRPG)과 MMORPG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더 나아가, 이는 우리가 오늘날 메타버스에서 꿈꾸는 ‘사용자 참여형 창작 생태계’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이기도 했다. 결국, 세계관이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완결된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도록 마련된, 끊임없이 확장하고 진화하는 살아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모든 것은 바로 그 작은 상자, 《던전 앤 드래곤》에서 시작되었다.
세계관에 대해 논하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스토리(Story)’와의 차이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이 둘을 혼용하지만, 그 본질은 완전히 다르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세계관의 진정한 힘을 파악하는 첫걸음이다.
스토리는 ‘선형적(Linear)’이다. 기차와 같다. 작가라는 기관사가 정해놓은 선로 위를 따라 출발역에서부터 종착역까지 정해진 순서대로 나아간다. 독자는 그저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 즉 인물, 사건, 배경의 연속을 순서대로 감상할 뿐, 기차의 경로를 바꿀 수는 없다. 해리 포터는 반드시 볼드모트와 싸워야 하고, 프로도는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모르도르로 향해야 한다. 독자가 아무리 원해도 해리 포터가 갑자기 호그와트를 떠나 머글 세계에서 평범하게 살거나, 프로도가 반지를 차지해 새로운 암흑 군주가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스토리는 작가의 의도라는 강력한 인력에 의해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반면 세계관은 ‘비선형적(Non-linear)’이다. 드넓은 대지와 같다. 정해진 길은 없다. 사용자는 이 대지 위 어디에서든 출발할 수 있고, 어느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다. 동쪽으로 가면 신비로운 숲이 나올 수도 있고, 서쪽으로 가면 번화한 도시가 나타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사용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게임 기획자들은 이 차이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훌륭한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우리가 준비한 멋진 스토리를 감상하세요’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이 광활한 세계에서 당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보세요’라고 속삭인다. 물론 게임에도 중심이 되는 메인 스토리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 세계를 탐험하도록 유도하는 하나의 가이드라인일 뿐, 결코 유일한 길이 아니다. 플레이어는 언제든 메인 퀘스트를 무시하고 낚시를 하러 가거나, 마을 주민들의 소소한 부탁을 들어주거나,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미지의 동굴을 탐험할 수 있다.
이 ‘선택의 자유’야말로 세계관이 가진 가장 큰 힘이다. 작가가 구축한 선형적인 스토리는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기에 다른 이야기가 끼어들 틈이 없다. 하지만 세계관은 수많은 ‘빈틈’과 ‘여백’을 의도적으로 남겨둔다. 작품에 등장하지 않은 옆 동네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주인공이 스쳐 지나간 기차역 역장의 퇴근 후 일상은 어떨까? 스토리가 조명(Spotlight)이라면, 세계관은 그 조명이 비추지 않는 나머지 어둠 속의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는 무대 그 자체다.
결국 스토리는 ‘무엇이 일어났는가(What happened)’에 대한 기록이다. 그것은 이미 완결된 과거의 사건이다. 반면 세계관은 ‘무엇이 일어날 수 있는가(What can happen)’에 대한 가능성의 총체다. 그것은 무한한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는 현재이자 미래의 무대다. 창작자가 해야 할 일은 완벽하게 짜인 하나의 기찻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모험가가 각자의 기차를 몰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거대한 대지를 설계하는 것이다. 바로 그 대지가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세계관이다.
스토리와 세계관의 차이는 사용자가 콘텐츠를 경험하는 방식에도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 스토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감정 이입(Empathy)’이고, 세계관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역할 수행(Role-taking)’의 기회다. 이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야말로 팬덤을 움직이는 핵심 동력이다.
‘감정 이입’은 주인공의 시선에 자신을 투영하는 행위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슈퍼히어로의 고뇌에 함께 아파하고, 그의 승리에 함께 환호한다. 우리는 잠시 동안 ‘루크 스카이워커가 되어’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이것은 매우 강력하고 즐거운 경험이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는 관객석에 앉아 있는 ‘관찰자’일 뿐이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는 순간, 우리는 다시 현실의 ‘나’로 돌아온다. 감정 이입은 스크린 속 주인공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넘을 수 없는 벽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세계관은 이 벽을 허물어 버린다. 세계관은 우리에게 “주인공이 되어보세요”라고 말하는 대신, “이 세계의 주민이 되어보세요”라고 초대한다. 여기서 ‘역할 수행’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경험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해리 포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나도 호그와트 학생이 되고 싶다’고 꿈꾼다. 만약 내가 호그와트에 입학한다면, 마법의 모자는 나를 어느 기숙사에 배정할까? 나는 퀴디치 선수가 될까, 아니면 마법약의 대가가 될까? 여기서 ‘나’는 더 이상 해리 포터의 대리인이 아니다. 해리 포터와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새로운 존재다.
이것이 바로 《반지의 제왕》 팬들이 단순히 소설을 읽는 것을 넘어, 스스로 엘프나 드워프가 되어 축제를 벌이고, 《스타워즈》 팬들이 제다이나 스톰트루퍼 복장을 하고 광선검 대결을 펼치는 이유다. 그들은 더 이상 관객이 아니다. 그들은 세계관이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자신만의 역할을 부여받은 ‘참여자(Participant)’이자 ‘배우(Actor)’다.
이 ‘역할 수행’의 욕구는 팬덤 비즈니스에 있어 무한한 가능성의 문을 열어준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의 역할을 더욱 실감 나게 즐기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호그와트 기숙사 망토를 사고, 마법 지팡이를 휘두르며, 제다이 광선검을 수집한다. 이 모든 소비는 단순한 굿즈 구매가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완성하고 세계관에 대한 소속감을 확인하는 행위다.
메타버스가 꿈꾸는 미래도 본질적으로 이와 같다. 단순히 아바타를 꾸미고 가상 공간을 돌아다니는 것을 넘어, 그 세계 안에서 나에게 의미 있는 ‘역할’이 주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몰입이 시작된다. 내가 이 세계의 ‘주민’이며, 나의 행동이 이 세계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바로 사용자를 단순한 소비자에서 열광적인 팬으로, 더 나아가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 창조자로 만드는 힘이다.
결론적으로, 스토리는 우리에게 완성된 영웅의 서사를 ‘선물’하지만, 세계관은 우리 각자가 자신만의 서사를 써 내려갈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한다. 감정 이입이 일회성의 감동이라면, 역할 수행은 지속적인 삶이다. 우리의 목표는 단 한 명의 위대한 영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백만 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을 찾아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살아있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