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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OTT,AI. 창작의 문법

by 김동은WhtDrgon

제1부: 붕괴하는 경계, 새로운 창작 환경


제1장: 콘텐츠, 밀가루처럼 쏟아지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야기는 오랫동안 희소한 자원이었다. 하나의 이야기가 탄생하고 대중에게 전달되기까지는 값비싼 인쇄술, 거대한 방송 장비, 복잡한 유통망과 같은 물리적, 경제적 관문이 존재했다. 창작은 소수에게 허락된 특권이었고, 수용자는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문화를 향유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이 창작과 유통의 비용을 ‘0’에 가깝게 수렴시킨 지금, 우리는 인류사 유례없는 콘텐츠의 폭증, 즉 ‘하이퍼-어번던스(Hyper-abundance)’ 시대를 맞이했다. 이는 단순히 양의 증가를 넘어, 창작과 소비를 둘러싼 모든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구조적 변혁이다.


1-1. '신작'이라는 개념의 소멸

과거 아날로그 시대에서 ‘신작(新作)’ 혹은 ‘신간(新刊)’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을 가졌다. 서점의 가장 좋은 매대에 진열되고, 방송국의 황금 시간대에 편성되며, 월간 잡지의 리뷰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은 ‘새롭다’는 사실만으로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였다. 수용자 역시 ‘이번 달 신간 목록’, ‘이번 주 개봉작’과 같은 명확한 카테고리 안에서 새로운 콘텐츠를 능동적으로 탐색하고 발견할 수 있었다. 즉, ‘새로움’은 창작물과 수용자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적 좌표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 좌표는 그 의미를 거의 상실했다. 유튜브나 틱톡과 같은 플랫폼의 ‘최신순’ 정렬을 상상해 보자. 당신이 마우스 휠을 내리는 속도보다 새로운 콘텐츠가 업로드되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것을 직감하는 순간, ‘최신’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유의미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 콘텐츠는 이제 한 달, 하루, 한 시간 단위가 아니라 초 단위로 밀려드는 거대한 흐름이 되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창작물이 거대한 포대에서 쏟아지는 “밀가루처럼 부어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신작’이라는 개념에 사형 선고를 내렸다. 작품이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는 더 이상 그 어떤 노출도 보장받지 못한다. 수많은 콘텐츠의 물결 속에서 갓 태어난 작품은 등장과 동시에 다른 작품들에 의해 뒤덮여 시야에서 사라진다. ‘새로움’이 가졌던 특권적 지위는 소멸했고, 모든 창작물은 이제 갓 태어난 것이든 10년 된 것이든 동등하게 무한한 경쟁의 장에 내던져진다.


1-2. 인간의 인지 한계를 넘어선 정보의 홍수

콘텐츠의 폭증이 야기한 더 근본적인 문제는 생산의 영역이 아닌 소비의 영역, 즉 인간의 인지적 한계에서 발생한다. 인간의 뇌가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과거에는 콘텐츠의 양이 인간의 처리 능력보다 적었기에 ‘무엇을 볼까’라는 행복한 고민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 콘텐츠의 양은 인간의 인지 용량을 기하급수적으로 초과했다.


이는 수용자의 행동 양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무한한 선택지 앞에서 인간은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보다 오히려 ‘선택 마비(Choice Paralysis)’ 상태에 빠지거나, 가장 자극적이고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콘텐츠로 도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콘텐츠 하나하나의 가치를 음미하고 평가하는 대신, 스와이프 한 번으로 다음 콘텐츠로 넘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소비 패턴이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개별 콘텐츠의 가치는 희석되고, 창작자의 노력은 평가받을 기회조차 얻기 힘들어졌다. 이러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수용자들은 더 이상 스스로 콘텐츠를 찾아 나서는 ‘탐험가’가 되기를 포기한다. 대신, 이 거대한 정보의 강에서 자신을 익사시키지 않고 원하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줄 ‘가이드’를 찾기 시작한다. 이 가이드의 이름이 바로 다음 장에서 논하게 될 ‘알고리즘’이다. 결국, 현대 창작 환경의 본질은 더 이상 창작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인지 한계를 넘어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발견될 것인가에 대한 처절한 생존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제2장: 새로운 문지기, 알고리즘

1장에서 우리는 콘텐츠의 절대량이 인간의 인지적 한계를 초과하면서, 수용자들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는 ‘탐험가’가 되기를 포기했음을 확인했다. 그들은 이제 익사의 위험 없이 자신을 원하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인도해 줄 ‘가이드’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 현대 디지털 플랫폼의 심장에서 뛰고 있는 이 가이드의 이름이 바로 ‘알고리즘(Algorithm)’이다. 그러나 알고리즘은 단순히 길을 안내하는 중립적인 조력자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그 어떤 권력보다도 정교하고 강력하게 콘텐츠의 운명을 결정하는 ‘새로운 문지기)’다.


2-1. 과거의 문지기: 방송국, 출판사, 영화관

알고리즘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대체한 과거의 문지기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날로그 시대의 문화 생태계는 소수의 강력한 문지기들에 의해 통제되었다. 출판사의 편집자, 방송국의 PD, 영화사의 배급 담당자, 신문사의 비평가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의 권력은 ‘희소성(Scarcity)’이라는 자원에서 비롯되었다. 지면은 한정되어 있었고, 전파를 탈 수 있는 채널은 몇 개 없었으며, 스크린의 수는 정해져 있었다. 이 문지기들의 역할은 수많은 창작물 중에서 대중에게 ‘보여줄 가치가 있는’ 소수를 선별하여 좁은 문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의 결정은 절대적이었고, 이 문을 통과하지 못한 창작물은 사실상 대중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이것은 소수의 전문가가 다수를 위해 의제를 설정하는 명백한 ‘하향식’ 권력 구조였다.


2-2. 현재의 지배자: 개인화 추천 시스템의 작동 방식

디지털 플랫폼은 이 오래된 권력 구조를 파괴했다. 이제 문 자체는 무한히 넓어져 누구든 자신의 창작물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문이 사라진 자리에, 알고리즘이라는 보이지 않는 필터가 등장했다. 과거의 문지기가 ‘공급’을 통제했다면, 알고리즘은 ‘주목’과 ‘발견’을 통제한다.

알고리즘의 작동 방식은 과거와 정반대다. 그것은 하향식이 아닌, 철저히 ‘상향식’으로 작동한다.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모든 상호작용 데이터(시청 기록, 검색어, 클릭, ‘좋아요’, 공유, 머무는 시간 등)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분석하여 개인의 취향과 관심사에 대한 정교한 프로필을 구축한다. 그리고 이 프로필을 기반으로,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무한한 콘텐츠 중에서 해당 사용자가 가장 좋아할 것이라고 ‘예측’되는 콘텐츠를 선별하여 제시한다.


“내가 아프리카나 우간다에서 올린 인디 단편 영화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상, 나는 평생 그 영화를 마주칠 일이 없는 것이다.” 이는 알고리즘이 객관적으로 ‘좋은’ 콘텐츠를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추천한다는 본질을 명확히 보여준다. 결국, 현대의 콘텐츠 유통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방송(Broadcasting)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을 위한 정밀 조준 사격, 즉 개인화된 협송(Narrowcasting) 의 집합체가 되었다.


2-3. 선택받기 위한 싸움: 어떻게 알고리즘의 눈에 띌 것인가?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창작자에게 완전히 새로운 과제를 던져준다. 이제 창작자는 인간 수용자뿐만 아니라, 기계인 알고리즘을 동시에 설득해야 하는 이중의 싸움을 벌여야 한다.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그것이 알고리즘에 의해 ‘발견될 가치가 있는’ 콘텐츠로 인식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알고리즘이 콘텐츠를 평가하는 기준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다. 알고리즘은 작품의 미학적 깊이나 사회적 메시지를 직접 이해하지 못한다. 대신 그것은 사용자의 ‘반응’이라는 데이터, 즉 ‘시그널(Signal)’을 통해 콘텐츠의 가치를 추론한다. 높은 클릭률, 긴 시청 지속 시간, 많은 ‘좋아요’와 댓글, 빠른 공유 속도 등이 바로 알고리즘을 움직이는 강력한 시그널이다.


따라서 현대의 창작 경쟁은 필연적으로 이 시그널을 극대화하기 위한 싸움으로 귀결된다. 어떻게 하면 사용자가 썸네일을 클릭하게 만들 것인가? 어떻게 하면 초반 이탈을 막고 시청 시간을 늘릴 것인가? 어떻게 하면 감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 댓글과 공유를 유도할 것인가? 이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에서, 창작의 문법 자체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결국 알고리즘 시대의 창작은, 작품을 만드는 행위를 넘어, 작품이 만들어낼 데이터를 설계하는 행위로까지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2부: 새로운 문법의 탄생: 플랫폼이 서사를 지배한다

원래 그릇이 물을 지배한다. 알고리즘이 새로운 문지기로 등극한 지금, 창작의 문법 역시 그가 지배하는 플랫폼의 특성에 맞추어 재편되고 있다. 이 새로운 문법의 혁신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고전적 서사 문법이 어떤 환경 속에서 탄생했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지배했던 ‘닫힌 세계의 문법’이다.


제3장: 닫힌 세계의 문법: 극장의 2시간

디지털 플랫폼이 등장하기 전, 영상 서사의 중심에는 극장이라는 견고한 성채가 있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영상을 소비하는 행위를 넘어, 정해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뤄지는 하나의 완결된 의식(Ritual)이었다. 그리고 이 의식의 모든 규칙은 ‘극장’이라는 플랫폼의 물리적, 시간적 제약 조건에 의해 결정되었다.


3-1.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만들어낸 기승전결

우리가 흔히 ‘잘 만들어진 이야기’의 전형으로 여기는 아리스토텔레스적 3막 구조, 즉 ‘기승전결(起承轉結)’은 추상적인 미학 이론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제약의 산물이다. 그 핵심 제약 조건은 바로 ‘약 2시간’이라는 상영 시간과 ‘출구가 닫힌’ 상영관이라는 공간이다.


영화의 러닝타임이 “보통 120분, 2시간인 이유는 그것이 극장의 단위이기 때문”이다.

이는 극장의 회전율과 수익성, 그리고 관객이 한자리에 앉아 온전히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심리적 한계점이 맞물려 형성된 일종의 사회적 계약이다. 창작자는 이 엄격한 시간제한 안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모두 담아내야만 했다. 1분에 시나리오 한 페이지라는 압박 속에서, 서사의 모든 요소는 효율적으로 기능하고 명확한 목적을 향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했다.


동시에, 관객은 일단 영화가 시작되면 임의로 이탈하거나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포획된 상태(Captive State)’에 놓인다. 이 ‘닫힌 공간’의 특성은 창작자에게 안정적인 서사 구축의 자유를 허락했다. 관객이 잠시 지루하더라도 참고 기다려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창작자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인물을 소개하고, 갈등을 쌓아 올리며, 클라이맥스를 향해 감정을 점진적으로 고조시킬 수 있었다. 결국, 우리가 아는 전통적인 서사 구조, 즉 명확한 시작과 절정, 그리고 완결된 결말을 가진 이야기는 이처럼 엄격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탄생한 필연적인 문법이었던 셈이다.


3-2. 감독의 통제와 관객의 몰입

‘닫힌 세계’의 또 다른 핵심 특징은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의 명확한 권력 관계다. 극장 안에서 창작자, 즉 감독은 서사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존재다.


“감독의 힘은 영화관에 표를 끊고 들어온 사람들부터 시작”된다.


관객은 감독이 설계한 프레임 안의 세상만을 볼 수 있으며, 감독이 들려주는 소리만을 들을 수 있다. 정보의 제시 순서, 감정의 흐름, 시간의 속도 등 모든 것이 감독의 의도대로 완벽하게 통제된다. 관객은 이 거대한 서사의 흐름에 저항하거나 개입할 수 없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어두운 공간, 즉 ‘제4의 벽’ 안에서 관객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스크린에 펼쳐지는 세계에 자신의 의식을 온전히 내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감독의 절대적 통제’가 ‘관객의 완전한 몰입’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 된다. 선택지가 박탈된 환경 속에서 관객은 비로소 현실을 잊고 스크린 속 세계에 깊이 빠져들 수 있다. 이것이 극장이라는 플랫폼이 관객과 맺어온 오랜 계약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제, 이 견고했던 닫힌 세계의 문법은 언제든 멈추고, 빨리 감고, 다른 창으로 넘어갈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들의 등장으로 인해 거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제4장: 무한한 세계의 문법: OTT와 시즌제

극장의 견고한 ‘닫힌 세계’가 수십 년간 영상 서사의 표준을 지배했다면, OTT(Over-the-top) 플랫폼의 등장은 그 성벽을 단숨에 허물어뜨린 거대한 지각 변동이었다.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이 새로운 플랫폼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고 구성하는 방식 자체를 뿌리부터 재정의했다. 극장이 ‘단 하나의 완결된 경험’을 파는 곳이라면, OTT는 ‘지속적인 구독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비즈니스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근본적인 목표의 차이는, 닫힌 세계의 문법을 대체하는 ‘무한한 세계의 문법’을 탄생시켰다.


4-1. 러닝타임의 파괴: 이야기는 더 이상 완결되지 않는다

‘무한한 세계’에서 가장 먼저 파괴된 것은 극장의 문법을 지탱하던 가장 강력한 기둥, 바로 ‘러닝타임’이라는 제약이다.


“OTT로 넘어오면서 이 모든 게 다 박살 났어.”


2시간이라는 사회적 계약은 이제 무의미해졌다. 에피소드는 40분이 될 수도, 80분이 될 수도 있으며, 시즌은 6부작이 될 수도, 16부작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러닝타임의 해체는 서사의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이상 창작자는 정해진 시간 안에 기승전결을 완결시켜야 할 의무가 없어졌다. 오히려 플랫폼의 비즈니스 모델(구독자 유지) 아래에서, 완결된 결말은 다음 시즌의 시청을 막는 ‘장애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 결과, 이야기는 명확한 끝을 향해 달려가는 직선적 여정이 아니라, 언제든 확장되고 이어질 수 있는 ‘영속적인 중간 상태(Perpetual Middle State)’에 놓이게 된다.

이제 이야기의 목표는 관객에게 완결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음 에피소드, 다음 시즌을 클릭하게 만드는 것, 즉 이야기 자체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서사의 새로운 지상 과제가 되었다. 이는 창작자에게 무한한 자유인 동시에,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는 무거운 굴레이기도 하다.


4-2. 빌드업과 떡밥: 다음 시즌을 보게 만드는 서사 전략

이야기의 목표가 ‘완결’에서 ‘연장’으로 바뀌면서, 서사를 이끌어가는 핵심 동력 또한 변화했다. 닫힌 세계가 ‘해소’를 통해 만족을 주었다면, 무한한 세계는 ‘미해결’과 ‘궁금증’을 통해 시청자를 붙잡는다. 이를 위한 가장 강력한 두 가지 무기가 바로 ‘빌드업’과 ‘떡밥’이다.


빌드업: OTT 시대의 빌드업은 단순히 클라이맥스를 향한 감정의 축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 시즌 안에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세계관을 구축하고, 수많은 인물들의 서사를 동시에 전개하며, 복잡한 미스터리를 겹겹이 쌓아 올리는 전략적 행위다. 창작자는 의도적으로 거대한 서사의 ‘설계도’만을 보여줌으로써, 시청자에게 “이 이야기의 진짜 재미는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암묵적인 약속을 건넨다. 이 약속을 믿는 시청자는 다음 시즌의 공개를 기꺼이 기다리게 된다.


떡밥: ‘떡밥’은 시청자의 궁금증을 가장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서사적 장치다. 이는 결정적인 정보의 누락, 새로운 미스터리의 등장, 주인공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린 채 끝나는 클리프행어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떡밥은 이야기의 흐름에 의도적으로 ‘정보의 공백’을 만들어, 시청자가 그 공백을 메우고 싶은 강렬한 심리적 욕구를 느끼게 한다.


결국, OTT 시대의 서사에서 이야기의 진짜 중심은 스크린 안이 아니라 스크린 밖에 있다. 한 시즌이 끝난 후, 다음 시즌이 공개되기까지 팬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해석과 토론, 예측들이 바로 이 새로운 문법이 만들어낸 현상이다. 이야기는 더 이상 완결된 텍스트가 아니라, 시청자의 참여를 통해 계속해서 생명력을 이어가는 살아있는 유기체가 된 것이다.


제5장: 찰나의 문법: 숏폼(Short-form)

OTT가 극장의 ‘완결된 서사’를 ‘무한한 서사’로 확장시켰다면, 틱톡(TikTok)과 유튜브 쇼츠(Shorts)로 대표되는 숏폼 플랫폼은 이야기의 개념 자체를 원자 단위로 해체해 버렸다. 극장이 ‘시간’ 단위, OTT가 ‘에피소드’ 단위로 관객과 계약을 맺었다면, 숏폼 플랫폼의 계약 단위는 오직 ‘찰나(Moment)’뿐이다. 사용자의 엄지손가락이 다음 영상으로 넘어가기까지 허락된 단 몇 초. 이 극단적인 시간 압축은 이전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지극히 본능적이고 파괴적인 문법을 탄생시켰다.


5-1. 15초 안에 승부하라: 서두와 결론이 사라진 세계

숏폼의 세계에서 기승전결은 더 이상 유효한 문법이 아니다.


숏폼 콘텐츠의 제작자는 “그냥 그 자리에서 딱 15초만 버티면 돼. 10초만 버티면 돼.”


서두(起)의 소멸: 숏폼에는 인물을 소개하고, 배경을 설명하며, 관객을 서서히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일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상이 시작되는 0.1초 안에 사용자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하면 그 콘텐츠는 즉시 ‘사망’한다. 따라서 모든 숏폼 콘텐츠는 이야기의 가장 자극적이거나 흥미로운 절정(承, 轉)의 순간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관객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이야기의 한복판에 내던져진다.

결론(結)의 무의미함: 숏폼은 완결된 만족이나 감정적 해소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짧은 시간 안에 강렬한 자극을 준 뒤, 다음 콘텐츠로 즉시 넘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깔끔한 결말은 사용자의 스크롤을 멈추게 하는 불필요한 요소일 뿐이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결말을 잘라내어 궁금증을 유발하고, 댓글을 통해 ‘뒷이야기’를 묻게 만드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전략이 되기도 한다.


결국 숏폼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거세하고, 가장 원초적인 자극을 담은 ‘절정의 파편’만을 끝없이 전시하는 세계다. 이곳에서 이야기는 더 이상 유기적으로 연결된 서사 구조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소비되는 찰나의 감각적 경험으로 존재한다.


5-2. 자극과 반응: 오직 '훅(Hook)'만이 살아남는다

서사의 구조가 파괴된 자리에는 오직 하나의 법칙만이 남는다. 바로 ‘자극과 반응(Stimulus and Response)’의 원리다. 숏폼 콘텐츠의 유일한 목표는 사용자의 뇌에 가장 빠르고 강력한 ‘훅(Hook)’을 꽂아 넣어, 스크롤을 멈추게 하고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주의를 점유하는 것이다.

이 ‘훅’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예상치 못한 반전, 시각적으로 강렬한 충격, 귀에 꽂히는 중독성 있는 사운드, 보편적인 공감대를 자극하는 짧은 문구 등이 그것이다.


“건물 통째로 떠내려간 얘기”, “교통사고, 다리가 무너지는” 영상들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호기심과 안전에 대한 위협 감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은 창작자에게 끊임없이 더 강한 자극을 만들어내도록 요구한다.


“먹방으로도 안 돼요. 지금 먹방 하려면 이제 오토바이 타면서 먹어야 돼.”


이는 자극의 역치가 계속해서 높아지는 ‘자극의 인플레이션’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숏폼의 문법은 서사적 깊이나 예술적 완성도를 평가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인간의 신경계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해킹하여 ‘반응’이라는 데이터를 이끌어내는가에 대한 지독한 효율성의 게임이다. 이 찰나의 문법 속에서, 이야기는 사유의 대상이 아닌 소비의 대상으로 그 위상이 완전히 재편되었다.


제3부: 이야기 논리의 재구성: 현실적인가, 그럴듯한가

플랫폼의 변화가 이야기의 형식과 길이를 결정했다면, 이제 우리는 이야기의 가장 깊은 내면, 즉 ‘논리’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무엇이 하나의 이야기를 ‘진짜’라고 느끼게 만드는가? 왜 우리는 어떤 허구에는 기꺼이 빠져들면서도, 다른 허구는 작위적이라고 느끼며 거부하는가? 그 해답은 이야기가 독자와 맺는 암묵적인 ‘논리적 계약’에 있다. 이 부에서는 그 계약의 두 가지 핵심 원칙, ‘개연성’과 ‘핍진성’을 통해 현대 서사가 어떻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분석한다.


제6장: 순수 문학의 법칙, '개연성(Probability)'

전통적인 순수 문학, 혹은 리얼리즘의 전통에 서 있는 이야기들이 독자와 맺는 첫 번째 계약은 ‘개연성’이다. 개연성이란 간단히 말해, 작품 속 세계가 우리가 발 딛고 사는 현실 세계의 물리적, 심리적 법칙을 충실히 따를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 계약을 맺는 순간, 이야기는 현실을 모사하는 거울이 되며, 그 가치는 얼마나 현실을 정교하고 깊이 있게 반영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6-1. 현실의 인과율을 따르는 서사

개연성을 중시하는 서사의 가장 큰 특징은 변화가 ‘사건(Event)’이 아닌 ‘과정(Process)’을 통해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인물들은 “자연스럽게 바뀌어”간다.


예를 들어,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상상해 보자. 한 사람이 극적인 위기에서 다른 사람을 구해줬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건 중심’의 논리다. 개연성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작위적인 설정을 극도로 경계한다. 대신, 두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나누는 사소한 대화, 무심코 드러나는 작은 습관, 서로를 바라보는 미묘한 시선의 변화, 그리고 그 안에서 축적되는 복잡한 감정의 흐름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이 서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싹트는 과정을 보여준다. 원인과 결과는 명확한 하나의 사건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의 관계처럼 수많은 변수가 얽힌 복잡한 인과율의 결과물이다.


이 때문에 개연성을 추구하는 작품들은 직접적인 설명 대신 ‘포쉐도잉(Foreshadowing, 복선)’이나 암시, 상징과 같은 예술적 기법에 크게 의존한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장면이 주인공의 흔들리는 심성을 표현한다”는 것이 바로 그 예다.

감정을 직접 말로 설명하는 순간, 이야기는 유치해지고 현실감을 잃는다. 대신 작가는 독자가 스스로 인물의 내면 변화를 감지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현실의 공기처럼 미묘한 단서들을 텍스트 전체에 흩뿌려 놓아야만 한다.


6-2. "저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

개연성의 세계에서 독자가 작품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바로 이것이다: “저런 일이, 저런 사람이, 실제로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때, 이야기는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이를 위해 작가는 인물들을 단편적인 기능적 존재가 아닌, ‘다면적(多面的)인 개인’으로 창조해야 한다. 현실의 인간이 선과 악, 이성과 욕망, 용기와 비겁함을 동시에 지닌 복합적인 존재이듯, 개연성 있는 캐릭터 역시 이러한 내적 모순과 복잡성을 지녀야 한다. 한 인물이 내리는 모든 결정은 그의 복잡한 내면세계로부터 비롯된, 심리적으로 타당한 결과여야 한다.


만약 이야기의 결정적인 순간이 우연에 기대거나, 인물이 자신의 성격과 맞지 않는 돌발 행동을 한다면, 독자는 즉시 이야기와의 계약이 파기되었음을 감지하고 몰입에서 깨어나게 된다. 하필 그 순간에 교통사고가 나서 원수가 은인이 된다는 식의 극적인 우연은, 개연성의 관점에서 보면 서사의 가장 큰 결함이다.

이처럼 개연성은 현실의 법칙을 엄격하게 준수함으로써 이야기의 깊이와 예술적 성취를 담보하는 강력한 원칙이다. 그러나 현대 콘텐츠의 또 다른 거대한 축은, 바로 이 현실의 법칙을 의도적으로 비틀거나 무시함으로써 더 큰 재미와 감동을 이끌어내는 또 다른 논리, 즉 ‘핍진성’의 세계 위에 세워져 있다.


제7장: 장르 문학의 법칙, '핍진성(Verisimilitude)'

개연성이 현실의 법칙을 준수함으로써 독자를 설득하는 원칙이라면, 현대 콘텐츠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는 장르 문학(웹툰, 웹소설, SF, 판타지 등)은 독자와 전혀 다른 종류의 계약을 맺는다. 그것은 바로 ‘핍진성(Verisimilitude)’이다. ‘핍진성’은 ‘현실다움’이 아니라 ‘그럴듯함’을 의미한다. 즉, 이 계약은 작품 속 세계가 현실과 똑같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대신, 일단 설정된 그 세계만의 고유한 법칙을 끝까지 충실하게 따를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이다.


7-1. 작품 세계 안에서의 논리적 타당성

핍진성의 세계에서 용이 하늘을 날고 마법사가 불을 다루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한번 ‘용은 불을 뿜는다’고 설정했다면, 이 사실은 이제 ‘얼음을 뿜는 용’을 내포하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왜?’ 그 용이 얼음을 뿜게 되었는가라는 핍진성 뿐이다.


이처럼 핍진성은 작품 외부의 현실이 아닌, 작품 내부의 논리적 일관성을 담보로 독자의 신뢰를 얻는다.

이러한 논리 구조는 서사의 전개 방식 자체를 바꾼다. 개연성이 ‘과정’을 통해 자연스러운 변화를 추구했다면, 핍진성의 세계는


철저히 ‘사건(Event)’을 기반으로 작동한다.

변화는 서서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원인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인물의 감정이나 상황이 급격하게 전환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드라마의 예시를 통해 이를 살펴보자.

한 외과 의사가 병원 내 응급센터 설립을 맹렬히 반대하고 있다. 그의 논리는 완고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의 딸이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 바로 그 응급센터로 실려 온다. 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는 바로 응급센터의 의사다. 극적인 수술 끝에 딸은 목숨을 구하고, 아버지는 자신의 신념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며 응급센터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로 돌아선다.

이 이야기에서 하필 그 순간 반대자의 딸이 응급실에 실려오는 것은 개연성이 없다. 하지만 아버지가 반대자에서 옹호자로 변하는 ‘결과’는 지극히 그럴듯하다. 사랑하는 딸의 목숨이 걸린 절체절명의 ‘사건’ 앞에서 아버지로서의 감정이 의사로서의 신념을 압도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매우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핍진성은 독자가 감정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강력한 인과관계를 ‘사건’을 통해 제공한다.


7-2. "저 세계 안에서 저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그럴듯한가?"라는 질문

핍진성의 세계에서 독자가 작품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바로 이것이다: “저런 일이, 저런 인물이, 저 작품의 세계관 안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만한가?”


이 질문은 6장에서 다룬 개연성의 질문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앞선 의사 이야기의 예시를 다시 개연성의 잣대로 평가해 보자. “하필이면 반대자의 딸이, 하필이면 바로 그날 교통사고를 당해, 하필이면 바로 그 병원으로 실려 온다고? 이게 현실적으로 말이 되는 확률인가?” 개연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설정은 너무나 극적이고 우연에 기댄, 즉 “개연성이 박살 난” 설정이다. 현실 세계의 엄격한 확률과 통계 법칙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핍진성의 세계에서 독자는 이러한 우연을 기꺼이 용납한다. 왜냐하면 독자는 이미 이 이야기가 현실의 지루한 일상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극적인 ‘사건’을 통해 주제를 명확하게 전달하려는 장르적 약속 하에 있음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현실에서도 저런 일이 일어날까?’를 묻는 대신, ‘저런 극적인 상황에 부딪혔을 때, 저 인물은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그럴듯한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 답이 ‘그렇다’일 때, 독자는 현실의 확률을 잠시 잊고 이야기의 논리에 온전히 몰입하게 된다.


7-3. 왜 현대 콘텐츠는 개연성보다 핍진성을 선택하는가?

그렇다면 왜 현대의 수많은 콘텐츠, 특히 디지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들은 현실의 복잡함을 반영하는 개연성보다 극적이고 명쾌한 핍진성의 논리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는가? 그 이유는 앞서 논의한 현대 창작 환경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정보의 홍수와 시간 압박 때문이다. 수많은 콘텐츠와 경쟁해야 하는 환경에서, 독자의 인내심은 바닥났다. 미묘한 감정선을 따라가며 변화의 과정을 천천히 음미할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없다. 핍진성을 기반으로 한 ‘사건 중심’의 서사는 이러한 환경에 최적화되어 있다. 명확한 사건과 빠른 전개는 독자에게 즉각적인 자극과 빠른 보상(감정적 쾌감)을 제공하며, 다음 화를 클릭하게 만드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둘째, 플랫폼의 상호작용성 때문이다. OTT와 웹툰 플랫폼에서 이야기는 더 이상 완결된 텍스트가 아니다. ‘떡밥’을 던지고, 다음 시즌을 예고하며 독자의 지속적인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극적인 사건과 명확한 인과관계로 이루어진 핍진성의 서사는 이러한 ‘떡밥’을 설계하고 독자의 예측과 토론을 유발하기에 훨씬 용이하다.

결국, 현대 콘텐츠가 핍진성을 선택하는 것은 단순히 작가나 독자의 취향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콘텐츠가 유통되고 소비되는 환경의 압력 속에서, 이야기가 살아남고 번성하기 위해 선택한 가장 효율적인 진화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개연성이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면, 핍진성은 현실의 요소를 재조합하여 더 선명한 의미와 재미를 만들어내는 ‘프리즘’이며, 현대의 독자들은 이 프리즘이 만들어내는 강렬하고 ‘그럴듯한’ 세계에 열광하고 있다.


제4부: 상상력의 한계를 지우는 도구: 게임 엔진과 새로운 시각 언어

이야기의 유통 환경(1부), 형식(2부), 그리고 내부 논리(3부)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창작의 가장 원초적인 영역, 즉 ‘표현’의 세계로 들어선다. 만약 플랫폼이 이야기의 형태를 결정하고, 그 논리가 설득력을 결정한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는 그 이야기의 표현 가능한 범위, 즉 상상력의 한계선 자체를 결정한다.

오랫동안 영상 창작자들은 현실이라는 물리 법칙의 감옥 안에서 분투해왔다. 카메라는 중력의 지배를 받았고, 렌즈는 광학의 법칙에 순응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제약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혁명적 도구가 등장했다. 게임 엔진은 더 이상 특정 장르를 위한 소프트웨어가 아니다. 그것은 창작자의 상상력 외에는 어떠한 물리적 제약도 존재하지 않는 궁극의 가상 스튜디오이며, 이 스튜디오의 등장은 영상 언어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고 있다.


제8장: 궁극의 스튜디오, 물리 법칙으로부터의 해방

‘궁극의 스튜디오’가 창작자에게 선사하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바로 물리 법칙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다. 현실의 촬영 현장을 옭아매던 중력, 공간, 비용, 안전의 족쇄가 풀리는 순간, 우리는 기존에는 불가능했던 새로운 시각 언어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8-1. 수만 개의 시선: 다중 시점 서사의 극대화

영화 <매트릭스>가 한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수십 대의 카메라를 원형으로 설치했던 ‘불릿 타임’ 기법은 시각적 혁명으로 평가받는다. 그것은 현실의 제약 안에서 시간을 조각내고 공간을 재구성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게임 엔진 안에서, 이 노력은 더 이상 처절할 필요가 없다. 창작자는 수십 대가 아니라 수천, 수만 개의 가상 카메라를 원하는 곳 어디에나 즉시 ‘설치’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 과시를 넘어, 서사 문법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꿀 잠재력을 지닌다.

예를 들어, 하나의 거대한 폭발 장면을 상상해 보자. 기존의 영화라면 감독은 폭발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단 몇 개의 ‘결정적 시점’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러나 게임 엔진 안에서는 폭발하는 건물의 파편 하나하나에 가상 카메라를 심어, 수천 개의 파편이 각자의 시점에서 흩어지는 세상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다. 주인공의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을 수억 개의 각도에서 동시에 포착하여, 그 슬픔의 입체감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시각화할 수도 있다.


이것은 더 이상 단일한 관찰자 시점에 묶여 있던 카메라의 주관성에서 벗어나, 사건의 모든 측면을 동시에 조망하는 ‘다성적(Polyphonic) 서사’의 가능성을 연다. 카메라는 더 이상 하나의 시선이 아니라, 사건을 구성하는 모든 입자들의 총체적 경험을 전달하는 매개가 된다.


8-2. 중력을 거스르는 카메라: 감정의 궤적을 그리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달리 줌(Dolly Zoom)’을 통해 인물의 내면적 충격과 현기증을 시각화했듯, 카메라의 움직임은 곧 감정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물리적 실체로서의 카메라는 언제나 그 움직임에 한계를 가졌다.

게임 엔진 속 카메라는 데이터다. 따라서 중력을 무시하고, 벽을 통과하며, 빛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이 무한한 자유는 감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궤적을 그려낼 힘을 부여한다.


슬픔에 잠긴 주인공의 심장을 카메라가 부드럽게 통과하여, 그의 내면 우주를 유영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분노에 찬 인물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오는 충격파를 카메라가 타고 날아갈 수 있다.

두 연인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간을, 카메라가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유려하게 유영하며 그들 사이의 감정적 교감을 시각화할 수도 있다.


카메라가 아니라 카메라 모사장치는 이제 카메라의 제약을 벗어난다. 이제 카메라는 현실을 찍는 기록 장치가 아니라, “춤을 추듯 움직이며” 인물의 감정과 서사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능동적인 참여자가 된다. 그것은 더 이상 현실에 묶인 관찰자가 아니라, 창작자의 의지를 대변하는 ‘살아있는 시선’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 시선의 해방이야말로 새로운 영상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흥미로운 화두다.


제9장: 코드가 빚어내는 새로운 미학

게임 엔진이 단지 현실의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수준에만 머물렀다면, 그것은 정교한 시뮬레이터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상 스튜디오의 진정한 혁명성은 현실을 초월하는 것을 넘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법칙을 창조하고, 그 법칙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미학적 경험을 빚어낸다는 데 있다. 이곳에서 모든 시각 정보는 원자와 분자가 아닌, 0과 1의 코드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코드의 세계에서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던 감각의 연금술이 가능해진다.


9-1. 의도된 흐림: 현실을 재창조하는 계산된 감성

우리가 현실에서 특정 대상에 초점을 맞출 때 배경이 흐려지는 현상, 즉 ‘아웃포커싱(Out of Focus)’은 우리 눈의 수정체와 카메라 렌즈라는 물리적 도구의 광학적 특성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우리는 이 ‘흐림’을 통해 공간의 깊이감을 인지하고, 시선의 집중을 경험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모든 픽셀이 동등한 데이터 값을 가지는 디지털 세계에서는 ‘초점’이나 ‘흐림’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디지털에게는 아웃포커싱이 없어요. 애초에 그런 게 존재하질 않아.”


게임 엔진 화면 속의 아름다운 아웃포커싱은 현실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시각적 경험을 흉내 내기 위해, 수많은 데이터와 연산을 통해 ‘의도적으로 계산되고 시뮬레이션된’ 효과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현실의 법칙을 단지 모방하는 수준을 넘어, 그 법칙의 변수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재창조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특정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연출을 할 수 있다.


주인공이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그의 눈에 비친 연인의 모습만 선명하게 남고 세상의 모든 것이 극단적인 빛의 입자로 흩어지는 효과.

공포에 질린 인물이 바라보는 괴물의 형상만 끔찍할 정도로 선명하고, 도망쳐야 할 주변의 모든 공간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되고 흐려지는 효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넘어 시적 허용의 수식으로 작동하는 수식들, 기분 만큼의 조도, 설레임만큼의 진동, 교감만큼의 흔들림, 열린 마음 만큼의 투명도를 세팅할 수 있다.


이것은 더 이상 현실의 재현이 아니다. 창작자의 의도에 따라 물리 법칙을 해체하고 재조립하여, 감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계산된 감성’을 창조하는 행위다. FPS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편의를 위해 의도적으로 아웃포커싱을 배제하는 것처럼, 이 세계의 모든 시각 법칙은 리얼리즘이 아닌, 창작의 ‘목적’을 위해 복무한다.


9-2. 마이너스 광원: 오직 디지털에만 존재하는 어둠의 표현

코드의 세계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미학의 정점은, 바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데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마이너스 광원(Negative Light)’이다.


현실의 물리 세계에서 빛이 없는 가장 어두운 상태는 ‘0(Zero)’이다. 빛이 완전히 부재하는 상태. 그러나 그보다 더 어두운 ‘마이너스(-)’의 값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데이터의 세계에서는 가능하다. 마이너스 광원은 빛을 발산하여 공간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빛을 흡수하고 삼켜버리는 ‘어둠’ 그 자체를 발산하는 개념이다.


이것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경험은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다.

손전등을 켰는데 그 빛이 닿는 곳이 오히려 더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물드는 장면.

괴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이 주변의 모든 빛과 색을 빨아들여 무채색의 공허로 만드는 장면.

주인공의 절망감이 검은 안개처럼 피어올라,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이 담긴 공간을 침식하고 지워버리는 심리적 풍경의 시각화.


이 경험은 “되게 이상한 느낌”이며 “부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우리의 뇌가 평생에 걸쳐 학습해 온 물리 법칙에 정면으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낯설음과 부자연스러움이, 기존의 어떤 표현 방식으로도 담아낼 수 없었던 초현실적 공포, 근원적 상실감, 심리적 공허를 표현하는 가장 강력하고 새로운 시각 언어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코드가 빚어내는, 오직 디지털 시대에만 가능한 새로운 미학의 탄생이다.


제10장: 기술을 비전의 언어로 바꾸는 법

우리는 앞선 장들을 통해 게임 엔진이라는 궁극의 스튜디오가 어떻게 물리 법칙의 족쇄를 풀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미학을 창조해 내는지를 목격했다. 수만 개의 시선, 중력을 거스르는 카메라, 계산된 감성, 그리고 마이너스 광원. 이 모든 것은 창작자에게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무한한 표현의 자유를 약속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가장 위험한 함정과 마주하게 된다. 무한한 자유는 종종 명확한 목적의 상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모든 놀라운 기술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단순한 시각적 유희를 넘어, 관객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강력한 이야기로 바꿀 수 있을까? 그 해답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사용하는 창작자의 ‘비전(Vision)’에 있다.


10-1. 기술 자랑의 함정

새로운 도구를 손에 쥔 창작자가 가장 빠지기 쉬운 유혹은 바로 ‘기술 자랑의 함정’이다. 이는 기술의 ‘가능성’에 매료된 나머지, 그것을 ‘왜’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 없이 기술을 남용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단지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현란한 카메라 워크를 남발하는 것.

이야기의 맥락과 상관없이 기이한 시각 효과로 관객의 눈을 현혹하는 것.

스토리텔링의 필요가 아닌, 기술적 실험을 위해 장면을 구성하는 것.

이러한 접근은 단기적으로는 관객에게 신선한 시각적 충격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공허한 스펙터클에 불과하며, 이야기의 감정적 흐름을 방해하고 관객을 서사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기술이 이야기보다 앞서는 순간, 작품은 영혼을 잃고 텅 빈 껍데기만 남게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What can be done)?’가 아니라, ‘무엇이 반드시 되어야만 하는가(What must be done)?’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다.


기술에게도 개연성과 핍진성이 적용된다. 왜 3D인가, 왜 VR인가, 왜 게임엔진인가?


10-2. "나의 비전을 위해 이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득하라

기술을 의미 있는 예술적 언어로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기술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명확히 종속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위의 목적이 바로 창작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비전이다. 모든 기술적 선택은 이 비전을 가장 효과적으로, 그리고 가장 필연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평가자나 관객을 설득하는 가장 강력한 논리는 기술의 현란함이 아니라, 기술 사용의 ‘필연성’을 증명하는 데서 나온다. 당신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비전은 ‘기억의 파편화와 왜곡’이라는 심리적 상태입니다. 이 불안정하고 다층적인 내면세계를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건을 수백 개의 모순된 시점에서 동시에 보여주는 다중 시점 연출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존의 물리적 카메라로는 이 비전을 결코 완벽하게 구현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의 아이디어를 100%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바로 게임 엔진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신이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다룰 줄 아는 ‘테크니션’이 아니라, 자신의 창의적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최적의 언어를 선택하고 구사할 줄 아는 ‘아티스트’임을 증명한다. 기술에 대한 당신의 깊은 이해는 곧, 당신의 아이디어가 얼마나 깊고 구체적인지에 대한 명백한 반증이 된다.


결국, 게임 엔진이라는 새로운 도구는 우리에게 백지 수표를 건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너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너의 비전은 이 무한한 자유를 감당할 만큼 강력하고 선명한가?” 이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가진 창작자만이, 기술을 비전의 언어로 바꾸고 미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11. 창작자는 어떻게 미래의 언어를 습득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디지털 기술이 촉발한 거대한 지각 변동을 목격했다. 콘텐츠는 밀가루처럼 쏟아지고, 알고리즘은 보이지 않는 문지기가 되었으며, 이야기의 문법은 그것이 담기는 플랫폼에 따라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조립되고 있다. 현실의 법칙을 따르던 ‘개연성’의 시대는 그럴듯함이 지배하는 ‘핍진성’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으며, 게임 엔진은 상상력의 물리적 한계마저 지워버렸다.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거의 지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오늘날의 창작자는 혼란스럽고 막막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예측 불가능한 미래의 창작 환경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고, 어떻게 자신만의 이야기를 세상에 펼쳐 보일 수 있을까? 미래의 언어는 어떻게 습득해야 하는가?

그 해답은 단 하나의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변화 그 자체를 이해하고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여러 언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창작의 폴리글롯(Creative Polyglot, 다중언어 구사자)’이 되는 데 있다.


첫째, 플랫폼의 문법을 이해하고 구사해야 한다.
극장과 틱톡의 문법이 다르듯,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문법 또한 다르다. 미래의 창작자는 단 하나의 장르나 형식에만 정통한 전문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2시간짜리 완결된 서사를 설계할 줄 아는 동시에, 15초 안에 보는 이의 심장을 멎게 할 ‘훅’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시즌제의 긴 호흡으로 거대한 세계관을 구축하는 능력과, 단 하나의 이미지로 모든 감정을 폭발시키는 감각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 각 플랫폼의 특성은 제약이 아니라, 당신의 비전을 담아낼 수 있는 다양한 ‘언어’다. 이 언어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최적의 표현 방식을 선택하는 능력이 미래 창작자의 첫 번째 조건이다.


둘째, 기술을 도구가 아닌 ‘사고방식’으로 체화해야 한다.
게임 엔진이 제공하는 가능성은 단순히 새로운 시각 효과를 추가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창작의 출발점 자체를 바꾸는 ‘엔진적 사고(Engine Thinking)’를 요구한다. “카메라를 어디에 둘까?”가 아니라 “카메라가 생명체라면 어떻게 움직일까?”를 질문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가능한가?”를 고민하는 대신, “나의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어떤 물리 법칙을 파괴해야 하는가?”를 상상해야 한다. 기술을 배우는 것을 넘어, 기술이 열어준 새로운 상상력의 차원에서 사유하는 것. 이것이 미래 창작자의 두 번째 조건이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자신만의 ‘비전’을 가져야 한다.
알고리즘이 당신의 작품을 추천하고, 플랫폼이 당신의 서사 형식을 결정하며, 기술이 당신의 표현력을 확장시켜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당신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알려주지는 못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결국 살아남는 것은 가장 화려한 기술이나 가장 유행하는 형식이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 창작자의 고유한 목소리와 철학이다.


새로운 모든 기술이 자연어로 진입했다. 이제 당분간 메시지가 기술을 압도한다.


당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그 단 하나의 메시지, 당신만이 할 수 있는 그 이야기. 그것이 바로 이 모든 혼란 속에서 당신의 방향을 잡아줄 유일한 닻이자 나침반이다. 기술과 플랫폼은 그 비전을 세상에 전달하기 위한 언어일 뿐, 언어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결국 미래의 언어를 습득하는 길은 외부의 변화를 맹목적으로 좇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의 문법을 배우고 익히되,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비롯된 ‘왜?’라는 질문에 종속시키는 치열한 과정 속에 있다.


미래의 언어는 누군가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과 같은 창작자들이 흔들리지 않는 비전을 가지고 새로운 도전을 계속할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창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동은WhtDrgon@MEJEworks 25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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