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타임라인을 관찰하다 보면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나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는 페니키아 금 귀걸이를 감상하는 고고학 애호가, 게임 코스프레를 제작하는 이, 컴퓨터 실용 정보를 공유하는 이, 취소된 항공기 디자인에 관심을 보이는 항공 덕후, 게임을 개발하는 인디 개발자, 스웨덴 복지국가를 동경하는 정치 관심층 등이 뒤섞여 있다. 이들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점도 존재하지 않으며, 유일한 접점은 나라는 존재뿐이다.
여기서 질문이 발생한다. 나의 페친들의 타임라인에 공통점이 없다면, 나는 과연 나 자신에게 공통점이라 할 수 있는가. 나는 지금 하나의 점이 아니라 장이 아닐까. 이는 데이비드 흄의 자아 다발 이론, 나아가 질 들뢰즈의 다양체 개념과 맞닿아 있는 철학적 물음이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그 자체로 완벽한 인물 기반 커뮤니티다. 나는 내 모든 친구라는 이름의 카페에 가입한 회원이고, 그들 역시 내 카페의 회원이다. 수십 년간 우리는 이 중첩된 커뮤니티의 구조에 익숙해져 왔다. 그렇다면 이 구조의 중심인 나를 하나의 콘텐츠로 치환한다면 어떨까.
내 타임라인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공통점은 나라는 접속점뿐이다. 그 안에는 페니키아 귀걸이, 스웨덴 복지, 항공기 디자인, 게임 개발 등 서로 아무런 맥락 없는 세계들이 공존한다. 손으로 한 줄 한 줄 그은 머리카락처럼, 복잡한 선들이 제멋대로 흘러내리는 풍경이다.
콘텐츠가 커뮤니티의 중심이 된다고 해서, 모든 대화가 그 콘텐츠의 주제와 소재에만 묶여 있어야 하는가. 과거의 우리는 세계관이라는 상자 안에 완벽한 그림을 채워 넣으려 했다. 모든 설정과 연대표를 빽빽하게 기록한 거대한 박물관을 짓고는, 이것이 정통 공식 설정이니 경건하게 감상하라고 선포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타임라인은 그런 박제된 박물관과는 거리가 멀다.
거대하고 웅장한 위대한 영웅 서사라는 단 하나의 나무를 심고 모두가 우러러보게 해야 하는가. 그건 타임라인의 방식이 아니다. 페니키아 귀걸이와 스웨덴 복지가 하나의 줄기에서 자라날 수는 없다. 대신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을 들판 곳곳에 흩뿌려 놓는 것이다. 이 근처에서 이상한 유물이 발견됐다거나, 저기 취소된 항공기 디자인 도면이 떠돈다는 식의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하나의 정답, 즉 캐논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수많은 질문과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 그러면 사람들이 몰려와 그 화두를 자기들끼리 탐구하고, 상상하고, 논쟁하다가, 그 옆에 자기만의 해석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 해석들이 모여 진짜 세계가 된다.
그 순간, 타임라인의 사람들은 더 이상 관객이 아니다. 포스팅을 하는 사람은 모두 창작자이듯, 이 들판에 모인 이들 역시 모두가 창작자이고 주체이다. 그럼 이 판을 처음 연 이는 무엇이 되는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전지전능한 작가가 아니다. 그저 이 들판을 거닐며 사람들의 물음에 답해주는 정원사가 될 뿐이다. 여기엔 이런 씨앗을 심어도 되나요라는 물음에 그거 재미있겠는데요, 한번 해보시죠라고 북돋아주는 사람. 가끔 생태계를 해치는 요소를 솎아내고, 가뭄이 들면 영감의 비를 살짝 뿌려주는 역할이다.
결국 타임라인의 공통점은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이 모든 파편적인 세계들이 잠시 머물고, 부딪히고, 새로운 무언가를 피워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장으로서의 역할 그 자체다.
그렇다면 콘텐츠와 세계관의 관계도 명확해진다. 커뮤니티가 완벽하게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세계관이란, 빽빽한 설정집이 아니다. 각기 다른 해석 체계들이 자유롭게 화학작용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핵심적인 키워드 클라우드처럼 느슨한 구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키워드들이 시간이 지나며 커뮤니티의 역사와 함께 단단해질 때, 비로소 상징물적 지식 체계로서 천천히 자리 잡게 된다.
디지털 시대의 모든 것은 사실 똑같은 레고 블록으로 만들어져 있다. 내가 지금 쓰는 글도, 당신이 어제 본 그림도, 방금 들은 음악도, 심지어 게임 속 규칙이나 사물까지도 전부. 모양과 색깔만 다를 뿐, 재료는 모두 똑같은 데이터다.
예전에는 화가의 물감, 작가의 잉크, 음악가의 악보가 서로 다른 물질이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매체, 문법, 공정, 산업이라는 이름의 벽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그 모든 것이 결국 파일이라는, 0과 1로 빚은 똑같은 찰흙이다. 그러니 화가의 스튜디오와 작가의 서재, 음악가의 녹음실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벌써 텍스트 몇 줄로 애니메이션을 닮은 그림을 뚝딱 그려내고 있다. 이게 글자 블록으로 그림 블록을 조립한 게 아니면 대체 무엇인가. 그냥 맡겨놓을 뿐이고 선택해서 포스팅해서 타임라인에 올리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그게 우리의 가장 중요한, 공식적인, 유일하게 하는 일이다. 포스팅하는 것. 하트와 좋아요가 모든 소셜 행위이듯, 포스팅이 창작이며 선언이며 동의이며 기여이며 지식 체계와 세계관의 확장이다. 어떤 주제하에 포스팅이 이뤄지고 콘텐츠가 그 필드의 역할을 해주는 것. 키워드 클라우드 어딘가에 있는 단어 한두 개로 해시코드와 함께.
그 창작 수단은 사람이 아니라 계정이다. 즉 트위터의, 페이스북의 캐릭터이다. 실명을 드러내는 건 정보의 일부이지 이 계정은 내가 아니다. 디지털 트윈을 빙자하는 대외적 캐릭터이다. 우리가 매일 들락거리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속 사람들, 즉 데이터화된 계정들 역시 똑같은 레고 블록으로 만들어진 사람 피규어다.
재료가 똑같으니, 콘텐츠와 사람이 곧바로 붙어버리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과거에는 팬들이 작품을 보고 감동해서 자기들끼리 마음 맞는 사람을 찾아 팬 카페를 만드는 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감동과 동시에 가치를 복제하고, 지식을 전파한다. 그 모든 과정이 실시간으로 일어난다.
이 무시무시한 속도를 따라잡으려면, 콘텐츠를 처음부터 누구나 조립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기보다,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누구나 강제조립을 할 테니, 그렇게 비틀려도 여전히 형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콘텐츠 지식 체계 혹은 지적재산권이 클라우드화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세계관은 박물관의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 누구나 새로운 방을 증축하고 자기만의 가구를 들여놓을 수 있는 공용 설계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설계도만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콘텐츠 하나가 세상에 나올 때마다, 그 주변으로 수많은 커뮤니티가 즉흥적으로 생겨난다. 셀 수 없이 많은 커뮤니티들이 분무기처럼 실시간으로 뿜어대는 게 워낙 많아서 마치 거대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타임라인의 풍경이 펼쳐진다.
세계관, 지식 체계, 커뮤니티, 팬덤. 이 모든 것이 한 권의 책에 담길 수 있다고 믿는 이유다. 왜냐하면 디지털이니까. 그럴 수 있고, 그래도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