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재미의 3요소는 탈신비주의를 위해 최대한 납작하고 얇게 포를 떠버린 반갈노가리 3조각 같은 글이었는데 거기에 이장주박사님과 김양욱선생님같은 고수분들이 첨삭가필댓글을 해주시는 바람에, 두 분의 글을 받들어 ‘게임 재미의 무릎쯤 빠지는 좀 더 깊은 구석‘ 을 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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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를 과정이자 나아가는 즐거움으로 정의한다면, 이는 속성상 ‘애딕티브’에 가깝다. 하지만 현실은 단순 반복이 가능한 곳이 아닐 것이기에 반드시 현실감, 즉 납득 가능한 현실감이 요구된다. 누구도 의미 없는 바둑알 옮기기를 애딕티브하게 느끼진 않을 테니까.
단순한 반복을 넘어 ‘이머시브’한 몰입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 과정이 단순 노동이 아닌 ‘발견’과 ‘숙련’의 과정이어야 한다. 기계적인 반복 속에서도 스스로 공략법을 찾아내고 성장했음을 확인할 때, 비로소 재미는 지속되기 때문이다.
만약 지루함이 삶의 방향이 틀렸다는 경고 신호라면, 인간에게는 기어이 (없는) 경고를 감지하고 반응하는 본능이 있다고 봐야 한다. 인간은 모든 수단을 이용해 반드시 지루해하고야 말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미 확보된 뻔함, 그 안전 구역은 안락함인 동시에 지루함이라는 경고의 영역이 된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경계, 즉 엣지로 향한다. 아무리 확률이 희박하다 해도, 오직 그곳에만 기회와 변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태초의 선악과는 인간에게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결코 피할 수 없는 필연적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붉은 버튼이 있는 부페와 침실이 있는 방에 갇힌 인간이 뭘 할 수 있겠나? 그 동네엔 엣지에 화염검이 도는데.
우리가 갖는 술자리는 현실과 분리된 제4의 벽을 만드는 행위와 같다. 이때 지불하는 비싼 술과 안주 값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증거이자 마땅한 비용이다.
쾌락에는 본능적인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만약 아무런 이유 없이 입안에 단맛이 퍼진다면, 인간은 기쁨보다는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쾌락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개연성’과 ‘핍진성’이라는 납득의 절차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초기 MMORPG의 고행에 가까운 노동을 그토록 사랑했던 이유다.
막대한 시간과 ‘익스펜시브’를 투입하는 행위는 경쟁자들을 밀어내고, 나의 우위와 영향력을 증명하는 ‘수고의 지불’이었던 것이다.
고통을 견디고 얻어낸 보상만이 진정한 카타르시스를 주며, 그때 비로소 게임은 단순한 시간 때우기가 아니라 내가 기여하는 세계가 된다.
물론 최선의 이득은 예측 가능한 안전지대 안쪽에 있다. 그러나 진정한 엣지는 모험과 불확실성이라는 확률을 통해 비로소 재미를 창출한다.
단,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는데 반드시 ‘돌아갈 길’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모험은 더 이상 재미가 아니라 재난이 되기 때문이다.
하- 하여튼 이 필멸자들이란…
비극이다. 돌아갈 길이 없어도, 나아갈 길이 없어도 경고 상태가 된다니. 갈 곳은 오직 상승 뿐이다. 게임은 성장의 감각을 대리하는 가상의 엘리베이터이다.
게임을 끄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 경험이 나를 한 단계 업데이트했다는 감각, 그것이 우리가 위험한 경계를 왕복하는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엣지가 사라진 삶은 곧 재미가 소거된 삶이며, 탈출구 없는 압력은 결국 폭발이나 소멸을 부른다. 역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끊임없이 경계를 넘나들며 스스로를 업데이트하는 한 우리는 살아있다.
지루한 안정을 깨고 경계로 나아가, 기어이 성장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그 순환. 결국 재미란 정체된 삶을 다시 뛰게 만들고, 세계의 상승을 지탱하는 거대한 라이프사이클인 것이다.
인간은 까다롭다. 매트릭스도 서너번 망했다더라.
AI시대에 인류를 지탱할 가상노동은 게임일 것이다. 세상은 게임이 된다.
김동은WhtDrgon. #게임기획자하얀용 260108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