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 세계를 채우는 8대 모듈 — 설계의 실제
참고자료 : https://brunch.co.kr/@whtdrgon/560
세계관은 스토리와 다르다. 스토리는 독자가 예측하지 못한 전개를 만들어야 한다. 뻔한 이야기를 쓰면 양산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세계관의 역할은 정반대이다. 세계관은 독자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할 수 있게 만드는 체계이다.
인지심리학에서 이것을 스크립트[1]라 부른다. 누군가 주먹을 들어올리면 다음 동작이 연상된다. 세계관은 이 연상의 철로를 깔아주는 작업이다.
현실에 기반한 소설은 이 작업이 별도로 필요 없다. 독자가 현실이라는 세계관을 이미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상의 세계를 다루는 경우, 독자에게 낯선 세계를 납득시키는 별도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스타트렉에서 배지를 누르면 우주선과 통신이 되고, 에너자이즈라고 말하면 물질이 전송되는 것을 독자가 받아들이려면, 그 세계의 규칙이 사전에 충분히 전달되어야 한다. 이 전달이 실패하면 집중이 깨진다. 기술이 없는 세계에서 갑자기 레이저가 나오면 허무맹랑의 영역으로 빠진다.
여기서 많은 창작자가 빠지는 함정이 있다. 새로운 세계니까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다. 독자적 도량형을 만들고, 칼을 칼이라 부르지 않고, 하늘의 색까지 바꾼다. 이렇게 모든 요소를 비틀면 독자가 학습해야 할 양이 급증한다. 5장에서 다뤘듯이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에너지의 지불이다. 그 지불을 요구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보여줘야 한다. 세계관의 원칙은 단순하다. 엣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익숙해야 한다. 세계가 현실과 달라야 한다는 보장은 없다. 필요한 만큼만 다르면 된다.
이 원칙을 적용하는 구체적 방법이 현실을 빗대는 것이다. 우주선 안의 계급 구조를 군대에 빗대고, 장기 우주 항해 중의 갈등을 원양 어선의 경험에 빗댄다. 독자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대중문화적으로 익숙한 것을 활용하면 납득의 비용이 급감한다. 세계관은 이 익숙함의 철로 위에서 달리되, 결정적인 한두 가지 지점에서만 현실과 다른 것을 제시한다. 그 다른 것이 세계관의 정체성이 된다.
[소결]
• 세계관은 스토리와 달리 독자가 다음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드는 익숙함의 체계이다.
• 엣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익숙해야 하며, 현실을 빗대는 것이 납득의 비용을 줄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 새로운 학습을 요구하는 것은 에너지의 지불이며,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보여줄 각오가 필요하다.
세계관을 실제로 구축할 때는 여덟 가지 기본 모듈을 채워 넣는다. 이 모듈들은 세계의 구조를 구성하는 층위이며, 옵시디언 볼트에 키워드를 배치할 때의 기본 분류 체계이기도 하다.
장르와 설정(Genre & Setting)은 세계관의 그릇을 결정하는 첫 번째 선택이다. 현대 리얼리즘부터 스페이스 오페라, 다크 판타지, 사이버펙크까지 수십 가지 장르가 존재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르를 새로 발명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기존 장르의 문법을 활용하고 변주하는 것이 세계관 설계의 출발점이다. 서부 영화의 보안관과 무법자, 사무라이의 무사도 같은 장르적 패키지는 이미 독자의 머릿속에 설치되어 있다. 기생충도 하나의 세계관이 될 수 있다. 현실을 기반하더라도 소설이 시작된 순간 그것은 현실과 똑같은 허구가 된다.
법칙과 원칙(Laws & Principles)은 세계를 지배하는 물리적·사회적 규범이다. 2장에서 다룬 규칙과 법칙의 구분이 여기서 적용된다. 열역학 법칙을 바꾸거나, 마법이라는 새로운 물리 체계를 도입하거나, 생각이 주변에 들리는 세계를 설정하는 것 모두가 이 모듈에 해당한다. 이 모듈은 패러독스 단계[2]와 직결된다. 패러독스 단계가 높을수록 현실과의 거리가 멀어지며, 독자에게 사전에 충분히 알려야 할 것이 많아진다.
지형과 환경(Geography & Environment)은 물리적 무대의 설계이다. 모든 세계관에 우주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해리포터의 세계에도 우주는 원리적으로 존재하겠지만 서사가 다루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도 중간계의 한 구석에서 벌어진 일이다. 영구 동토의 빙원, 프로스트펙크의 동토, 설국열차의 폐쇄된 객차 같은 지형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서사의 정서를 결정하는 물리적 조건이다.
시대와 문명(Era & Civilization)은 시간적 배경과 기술/문화 수준을 결정한다. 시대와 문명은 교차하는 개념이다. 미래의 로마 군단, 달 뒤편의 나치 기지, 조선시대에 특수부대가 떨어지는 이세계물 같은 조합이 가능하다. 벨 에포크라 불리는 그리워하던 시대도 있고, 사교계에 데뷔하는 로맨스 판타지의 배경중 굉장히 많은 부분이 유럽이나 프랑스보다는 러시아 재정 시대에 더 가까운듯 느껴지는 것처럼, 원료를 추적하면 예상치 못한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이국적이라는 것은 본래 그런 뜻이다. 무려 세계 씩이나 만드는 이유에는 평등한 이국의 느낌이란 것도 있는 것이다.
사회와 조직(Society & Organization)은 이데올로기를 담기에 가장 적합한 모듈이다. 세계관을 웨딩 케이크[3]에 비유하면, 이 모듈은 케이크의 층 구조 자체이다. 정부, 정치 체계, 사회 계층, 경제 조직, 종교 신념, 그림자 정부, 특수 목적 교육 조직. 이 세계는 무엇이 지배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이 모듈에 담긴다. 마왕이 지배하든, 다국적 기업이 지배하든, 그 구조가 스토리의 갈등을 발생시킨다.
생활과 일상(Life & Daily Living)은 주민들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떻게 생활하는가를 다룬다. 이 모듈은 절차적 생성의 원리가 가장 직관적으로 작동하는 영역이다. 섬유가 없는 세계에서는 섬유로 된 옷을 입을 수 없다. 나무가 없으면 나무 집을 지을 수 없다. 세계의 구성 요소가 자동으로 생활의 형태를 결정한다. 여기에 메시지를 넣을 수도 있다. 생물밖에 없는 세계에서 뼈로 집을 짓는다는 설정은 조상의 뼈로 만들어진 집이라는 문화적 함의로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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