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태양>
SF 장르의 인기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그 열기를 이어왔다. 최근에는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우후죽순 창작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상 속 이야기에 대한 특별함은 점점 사그라드는 듯했다. 하지만 전에 없던 팬데믹을 겪게 된 이후, 바이러스로 인해 무질서해진 일상은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또한 서로 멀어지고 단절되는 극단적인 상황 또한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다. 디스토피아 SF 속 이야기가 우리 현실의 모습과 비슷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SF의 창작은 특정한 장르를 전시하는 시도를 넘어 우리 삶과 연결된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현실적인 시도로 거듭날 수 있다. 그렇기에 상상 속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이분화된 삶을 살고 있는 인류의 모습을 다룬 연극 <태양>의 시도가 반갑게 느껴졌다.
SF를 통해 현실의 양극화를 마주하다
코로나 이후 우리가 ‘알고 있다’고 여긴 기존의 세계가 붕괴되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여러 불평등과 차별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불평등은 붕괴로 인해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이라고 단정 지었던 단편적인 세계의 이면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디스토피아적 SF는 우리가 원래의 세계라고 믿었던 것들 뒤에 숨어 있던 보이지 않았던 세계를 드러낸다. 또한 그것에 상상을 덧붙임으로써 우리 현실의 이면을 직시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태양>의 세계 또한 그러하다. 연극은 바이러스가 창궐했지만 엄청난 면역력으로 살아남은 녹스라는 인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21세기 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정치, 경제, 사회적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렇지 않은 구인류 큐리오보다 모든 방면에서 우위를 차지한다. 작품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나가노 8구의 큐리오들은 녹스들의 경제 규제를 받으며 낙후된 삶을 살아갔다. 과거에 ‘인류’라는 카테고리 안에 함께 묶였던 인간들이 서로 다른 명칭으로 불리며 대비되는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은 경제적, 지적, 사회적 양극화를 달리고 있는 우리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우리 사회 사람들이 그렇듯 녹스와 큐리오로 양분화된 집단 안에도 그 집단이 공유하는 가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함께 그와 상반되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 있다. 녹스이지만 태양을 볼 수 있는 큐리오를 부러워하는 경비원 후지타나, 큐리오이지만 녹스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며 큐리오로 남으려고 애쓴 유와 같은 인물들이 집단 안에 존재한다.
양분화 혹은 공존, 관객의 선택으로
연극은 둘로 나뉘어 있지만 그 안에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지고 배제 혹은 공존의 가치를 이루려고 애쓰는 인물들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둘로 나뉜 세계와 인류의 분화 및 공존을 함께 그려낸다. 무대 공간 그 자체도 위와 아래가 나누어져 있고, 연극이 진행되면서 조명으로 인해 무대 바닥 또한 분리된다. 무대 천장에는 우리 일상에서 쓰이는 책상과 의자, 타이어들이 정돈되지 않은 채로 설치되어 있다. 어떤 특별한 소품도 설치되지 않은 무대 하단과는 다르게 상단의 가구들은 마치 쏟아질 듯 천장에 붙어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부서져버릴 것 같은 위와 심플한 아래의 대비는 둘로 나뉜 세계의 분화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연극은 아무것도 설치되지 않은 무대 아래의 공간에 조명을 쏘아 경계를 만들어낸다. 무대 대각선을 가로지르는 빛은 녹스와 큐리오 사이의 거리를 드러내며 그들이 사는 공간 사이의 단절을 만들어낸다. 연극이 시작할 때 녹스인 후지타가 보이는 딱딱하고 정제된 제스처와 큐리오인 테츠히코가 보이는 자유분방한 움직임의 차이 또한 눈에 띈다.
연극 초반 그 경계와 분화는 유지되고 큐리오보다 녹스가 우월하다는 가치가 전달된다. 하지만 연극이 진행되고 그 안의 사람들이 등장하며 둘 사이의 위계는 흐려지기 시작한다. 낮이라는 시간에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만끽하는 큐리오를 부러워하는 녹스들이 등장하며 그들 또한 빛을 향한 결핍이 있었음이 드러난다. 뚜렷하게 지어졌던 우위가 흐려지는 과정에서, 녹스와 큐리오 집단 내의 젊은 세대인 후지타와 테츠히코가 서로 간의 거리를 줄이려 애쓰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연극은 큐리오였지만 녹스가 되는 것을 선택했던 요지가 큐리오 친구인 소이치의 손을 잡고 태양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 결말은 녹스와 큐리오 사이의 우위를 뚜렷이 구분하는 시각에서는 분명 이해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 장면일 것이다.
연극은 마지막 결말을 통해 녹스와 큐리오 사이의 거리를 줄이고 둘 사이의 공존을 모색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과정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선택들은 결국 관객의 몫으로 남아있다. 큐리오만이 할 수 있었던 태양을 마주하는 행동을 하며 자신을 파괴하는 요지의 선택이나, 녹스 당첨권을 찢어버리는 테츠히코의 선택은 극명했던 녹스와 큐리오 사이의 우위를 흐리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이로 인해 두 집단의 상생의 가능성 또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우위가 흐려지는 것이 어떤 구체적인 과정 안에서 일어나지 않고 인물들의 개인적 선택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 이렇듯 공존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을 넘어 그 단절을 채우는 방법에 대한 고뇌는 연극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