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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우 Oct 04. 2018

뷁(Break)의 시작 : 8년 간의 여정

지금의 나를 만든 경험과 생각들


약 8년 전, 고등학교를 졸업한 19살의 나는 공군의 부사관이 되었다. 내가 받은 특기는 항공기 기관을 정비하는 것이었는데, 실질적인 업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항공기의 심장’을 정비하는 매우 매력적인 일이라고 생각할 만한 업무였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처음 특기를 정할 때, 나는 실질적인 업무를 몰랐고, 기관을 정비하는 것이 꽤나 매력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주로 부대를 배속받은 후 바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 이 일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여름에는 땡볕에서 하루 종일 서있거나, 걸어 다녀야 했다. 심지어는 거의 불이 붙을 것 같은 엔진에 바짝 붙어서 일을 하기도 했다. 땀으로 샤워를 하지 않으면 일을 한 기분이 안 날 정도였다. 겨울에는 찬바람을 정통으로 맞으면서 일을 했다. 한겨울에는 손이 얼다 못해, 동상이 걸리려고 하는지 보라색으로 변하는 일이 빈번했다. 손에 감각이 없어질 쯤이 되면 히터에 가서 손을 녹이고, 다시 일을 하곤 했다.


이처럼 일 자체도 힘들었지만, 사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일이 아닌 사람들과의 관계, 군대라는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틀 속의 압박감이었다. 선임들이 시간 외 근무수당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아무 일도 없이 야근을 해야 하는 일은 다반수였다. 그렇게 하는 야근의 실상은, 선임들은 사무실에서 최신형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면서 돈을 벌고, 나는 그들에게 돈을 벌어다 주기 위해 굳이 필요 없는 일이라도 만들어서 해야 했다.


‘항공기의 심장’을 다루는 부서인 만큼 원래부터 일 자체가 많아 야근이 잦은데, 그런 야근까지 하게 되는 것은 나로서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나마 운이 좋아 야근을 안 하게 되는 날은, 강제로 번개 술자리를 만들었다. 일을 시작한 초반기에는 술자리를 빠지기 위해 거짓으로라도 친척이나 친구 부모님의 장례식을 지어내야 했다. 이 정도에서 끝났다면 다행이다.


나는 내 바로 눈앞에서 친누나와 여자 친구를 성희롱하는 선임을 우두커니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야 여자 친구랑 헤어질 거면 나한테 넘겨. 나도 어린애랑 한 번 해보자”, “딱 보니까 누나가 글래머 스타일이네. 남자들이 좋아하겠는데? 옆 사무실에 X상사 알지? 걔 아직 노총각인데 밤일은 끝내주게 한다. 너네 누나 충분히 만족시킬 거 같은데 소개 좀 시켜줘라”


나는 이 일이 생각날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 선임이 아닌 나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다. 왜 그만하라고 말 한마디 못했을까, 그 사람이 날 죽일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겁이 나서 실실 웃기만 하고 있었을까.


내가 부사관 때 받았던 모든 형태의 압박들은 가끔 권위라는 직접적인 힘으로 나를 짓누르기도 했지만,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발생했다. 불필요한 야근을 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 번개 회식을 해도 당연하게 모두가 참석하는 분위기, 성희롱을 해도 웃어넘기는 분위기 말이다. 모두가 이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고 웃을 때 혼자 반대의견을 내기에는 그때의 나는 너무도 약했고, 미성숙했다.


결국 이런 압박들을 그 자리에서 저항하지 못하고, 도망치는 방법을 선택했다. 고등학교의 학비 지원 때문에 의무복무가 7년이었던 나는, 그 사람들과 같은 사무실에서 의무복무를 끝까지 해낼 자신이 없었다. 의가사 전역, 음주운전, 대민 폭행, 하극상 등 여러 가지 극단적인 선택지들을 간신히 뒤로하고 찾아낸 도피처는 장교로 다시 임관하는 것이었다. 당시 공군 장교는 내 기준에서는 꽤나 높은 벽이었다. 자격증과, 학사 졸업증이 필요했다. 하지만 당장 선택권이 없었다. 나는 가끔 강연을 할 때마다 그때의 기분을 이렇게 표현하곤 한다.



“숲에서 사자가 쫓아오는 기분이었어요. 잡아먹히기 싫으면 가시나무라도 올라가야죠.”


이 비유들조차도 그때의 절박감을 표현하진 못한다. 나는 결국 그 많은 야근과 회식들 속에서도 1년 반 만에 학점은행제로 학사를 취득했다. 모든 자격증은 한 번에 모두 합격했다. 나는 물론 지금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지만, 절대 그 당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때보다 열심히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런 피나는 노력 끝에 생각했었던 최단시간 내로 장교가 될 수 있었다. 장교가 된 이후에는 부산으로 배속지를 옮겼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일을 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환경은 너무도 만족스러워서, 하루에 2시간씩 자며 그나마도 책상에서 엎드려 잤던 시절들이 전혀 후회되지 않을 정도였다. 더 이상 성희롱을 시도하려는 사람은 전혀 없었고, 불필요한 야근은 스스로 조절이 가능했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었다. 회식이 정말 가끔 있긴 해도, 부사관 때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적을뿐더러, 웬만해선 나의 사적인 일정까지 충분히 배려해주는 분위기였다.


장교로써 새로 맡게 된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초급장교의 역할은 주기적인 행정업무들이 대부분이었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실무자들을 위한 보고서들을 작성하는 것이 주요 업무가 되었다. 부사관 때는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시키는 일만 했다면, 이제는 중간에서 지시를 조율하고, 실무자들이 하는 일을 정리하는 위치가 된 것이다.


나는 부사관 때, 실무현장과 전혀 맞지 않는 지침이 내려올 때마다 울화통이 터졌던 기억을 떠올렸다. 화가 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상황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정말 현장에서, 실무자들이 도움이 될 만한 지침과 보고서들을 쓸 수 있을까 고민을 시작했다. 실무자들을 인터뷰하고,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철저히 배제한 채 정말 중요한 포인트를 강조한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크게 간과하고 있던 것이 있었다.


보고서의 내용이 최종적으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지휘관의 결재를 맡아야 했는데, 지휘관의 입장은 실무자들과 완전히 달랐다. 실무자들은 현장에만 주로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큰 그림을 보기 힘들 수 있고, 때문에 장교들은 그들의 말만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휘관의 입장이었다. 사실 이 내용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지만, 충분히 논리적이었고 내가 들어도 납득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나는 전적으로 지휘관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는 지휘관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보고서를 수정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이 부분에서 또다시 문제가 생겼다. 보고서에 대해 이해가 부족할 때에는 지휘관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무작정 보고서를 수정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휘관의 말대로 큰 그림을 보면서 작성된 보고서 중에서는, 실제 업무를 위한 보고서가 아니라 현장의 일을 늘리기만 하고 현실적으로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지시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부사관 때 그토록 증오했던 사람들의 행동을 내가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차마 지휘관에게 직접 ‘이 보고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 분야에서 경험이 많은 주변 동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원래 다 그래요. 괜히 스트레스받지 말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나아요.”가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부사관 때처럼 가만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다면, 분명히 후회하게 될 것이 뻔하니 말이다.


그래서 일을 잘하기로 유명한 선배장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보고서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은데, 선배는 이럴 때 보통 어떻게 하세요?” 선배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휘관한테 말해도, 한 번 말한 건 절대 번복 안 할 거야. 일단 쓰라는 대로 쓰고 나서 나중에 지휘관 바뀔 때 상황보고 취소해야지” 이 조언은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그 상황에서는 꽤나 현실적인 조언이다. 결국 나는 제대할 때까지 지휘관의 권위적인 지시에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간간히 시도는 해봤지만, 말문을 꺼내자마자 지휘관의 기에 눌려 금방 포기하곤 했다.  


근 8년간의 군 생활을 되돌아보면, 비록 다른 사람들은 나를 칭찬할지라도 나에게는 그 칭찬이 그 썩 달갑지 않다. 얼마나 찌질했고, 무력했고, 수동적이었는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일 잘하는 척, 후배들에게 잘해주는 척, 회식자리에서도 사교적인 사람인 척은 다 했지만. 너무도 쉽게 권위에 복종하고,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나 자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군생활 중에 내가 스스로 결정한 것을 타인에게 휩쓸리지 않고 해낸 것은 ‘전역’ 밖에 없다.



누군가는 ‘전역이 뭐 그리 대수냐’ 하겠지만, 부모님과 친척들, 주변 사람들의 강력한 반대는 이겨내기 정말 힘든 싸움이었다. 그분들에게는 이 어려운 세상에, 다들 공무원 하려고 난린데 안정적인 직장을 제 발로 차고 나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그분들을 이성적으로 설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뉴스 좀 봐라. 취업 안돼서 난리다.”, “요즘 소상공인들 얼마나 힘든지 몰라? 난리잖아. 사업하면 거의 다 망해”, “사람들이 멍청해서 다 공무원을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니야. 안정적인 직장이 최고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이런 압박들 속에서도 전역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운이 좋았다. 운이 좋았기 때문에 항공기 기관정비 특기를 받고 청주에 갔고, 사자가 쫓아오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 경험은 나를 벼랑 끝까지 내몰았다. 고등학교 때 86명 중 82등을 했던 나를 밤새 공부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평생 읽지도 않던 책을 미친 듯이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독서는 내가 인생을 바꿀 수 있도록 돕는 자양분이 되었다. 군 내 일과시간에서의 나는 꾸준히 찌질하고 무력했지만, 퇴근하는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새벽까지 책을 읽고, 학점은행제 수업을 듣고, 자격증을 공부하고, 다시 새벽에 일어나 테니스를 쳤다.


장교가 된 이후로는 야근과 회식이 없어지면서 이런 생활에 가속도가 붙었다. 남는 시간 동안 전역 후를 체계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많은 전문직 종사자들과, 성공한 사업가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대학원에 재학하고, 더 많은 책을 읽고, 심지어는 3권의 책을 출판하기까지 했다. 이러고 나니 전역하기 직전부터는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원한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주변 사람들의 말에 쉽게 휩쓸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객관적인 자료들로 공부하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사람은 100% 객관적일 수는 없다. 하지만 경제와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적어도 언론과 SNS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며, 주변 환경이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조종하고, 사람이 얼마나 권위와 집단, 일반화에 취약한지 알게 되었다. 또한, 내가 군대에서 겪었던 모든 경험들이 나뿐만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겪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성희롱, 성추행을 당하면서도 반박하지 못하고, 불필요한 야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있으며, 죽도록 가기 싫은 회식에 참석해 술을 진탕 먹고, 상사의 불합리한 지시에 따르면서 부하직원을 고통스럽게 하고, 젊은이들에게 안정적인 직장이 최고라고 강요하는 사람들, 상사와 회사를 지겹도록 씹어대면서도 절대 그만둘 생각은 못 하는 직장인들.


관심도 없는 전공을 공부하고, 학점과 스펙의 노예가 된 대학생들과 비싼 등록금을 내기 위해 허리가 휘어가는 부모들. 그렇게 돈을 쓰고 공부를 했지만, 취업은 녹록지 않은 현실. 자신이 평생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별로 관심도 없는 채 그저 안정적인 직장이 최고라는 신념으로 노량진의 고시학원 앞에 새벽부터 줄 서 있는 사람들.


개개인과 사회적인 문제로 비치는 이러한 현상들은 여러 가지 복잡한 인과관계들로 끈끈하게 이어져있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지만, 이 문제들을 조금씩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다. 또한 이런 개인과 사회 속에서 나 스스로를 어떻게 만들어나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뷁(Break)에서는 그런 이야기들을 다양한 시각으로 공유하고 싶다.



뷁(Break)의 사전적 의미는 ‘부서지다, 깨어지다 ; 깨다, 부수다’가 있다. 이렇게 제목을 정한 이유는, 이 이야기들이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깨는 것에 중점을 둘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면, 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게 된다.’


이 문장은 뷁의 슬로건이다. 앞으로 우리는 삶에서 당연시 해왔던 것들이 왜 더 이상 당연하지 않고, 그런 것들이 왜 당연하게 여겨져 왔는지 하나하나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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