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최근 몇 년간 가장 이슈가 되었던 말이다. 직장인들이 가장 바라는 결과이기도 하고, 국가적으로도 지원을 하는 사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이 단어 자체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라는 말은 얼핏 보면 굉장히 합당하고 좋은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엄청난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고 사용하는 모든 언어들은 우리의 무의식을 조종한다. 자식은 부모가 쓰는 언어습관을 쉽게 닮고, 부하직원은 상사가 쓰는 언어습관을 쉽게 닮는다. 아무리 그 사람을 싫어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1987년, 당시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였던 다니엘 웨그너(Daniel wegner)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가지 실험을 진행했다. 참가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사고의 억압이 우리의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했다. 웨그너는 첫 번째 그룹에게 ‘흰곰을 생각하라’ 라고 말했고, 두 번째 그룹에게는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지시했다. 실험 참가자들은 지시사항에 대한 사고의 빈도수를 체크할 수 있도록 흰곰이 떠오를 때마다 앞에 놓인 종을 치기로 했다.
결과는 예상외로 나타났다.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던 B그룹이 오히려 흰곰을 의식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A그룹보다 더 많이 종을 친 것이다. B그룹 참가자들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자꾸 흰곰이 생각난다고 대답했다.
웨그너의 흰곰실험이라고 불리는 이 실험은 우리가 아무리 생각을 안 하려고 하고 사고를 억제하려고 해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오히려 그것에 대해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생각은 의식의 영역이다. ‘흰곰을 생각하지 말아야지’라고 하면 뇌에 인식되는 이미지는 흰곰이다. ‘흰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보다는 그냥 흰곰 자체가 익숙해지고, 뇌리에 인식이 된다.
이것을 일상생활에 대입하면, ‘나는 절대 엄마처럼 안 살 거야’, ‘나는 절대 아빠처럼 안 살거야’, ‘나는 절대 저런 상사처럼 되지 말아야지’라고 아무리 생각해봤자 우리의 뇌는 내가 닮고 싶지 않은 부모님의 모습, 선생님의 모습, 직장상사의 모습을 떠올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싫어했던 사람들의 행동을 닮아가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많이 떠올릴수록 뇌는 익숙함을 느낀다. 무의식은 항상 편하고 익숙한 방향으로 우리의 행동을 유도한다.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무의식이 세팅되고, 그 무의식은 결국 우리를 조종한다.
다시 워라밸이라는 말로 돌아가 보자.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이 단어의 속내에는, 일과 삶을 분리하려는 노력이 들어있다. 이것은 단순히 ‘야근과 주말/공휴일에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이 단어는 자연스럽게 일과 삶을 상반된 관계로 만든다. ‘일’은 부정적인 이미지이고, ‘삶’은 긍정적인 이미지가 된다. 극단적으로 받아들였을 때 무의식은 이렇게 생각한다.
‘일은 최대한 적게 하고 배제해야 하는 것, 그와 반대되는 삶은 쟁취해야하는 것.’
다행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다. 나보다는 그의 말이 더 신뢰가 갈지 모르겠다. 아마존의 CEO 제프 베조스는 2018년 베를린에서 열린 ‘악셀 슈프링거 2018’ 시상식에서 워크라이프 밸런스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시상식에서 아마존 신입사원들을 위한 메시지를 발표했다.
‘일과 사생활의 균형을 찾으려 하지 말라.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이 두 가지 중 한 쪽을 추구할 경우 다른 쪽을 희생해야 하는 거래관계를 기정사실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과 일 외의 사생활은 보다 포괄적이고 거시적인 관계여야 한다. 가정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행복한 에너지가 충만한 상태로 출근할 수 있다. 그리고 직장에서 즐겁게 일한 뒤엔 역시 건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갈 수 있다.’
개인적으로 ‘워라밸’이라는 단어를 유행시킨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생각을 했을 거라고 보진 않는다. 다만 일이 절대 인간의 삶에서 떨어뜨릴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이 글의 독자들만큼은 이 단어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해주었으면 한다. 워라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사회에서 ‘최고의 직장’은 확고해진다. 칼퇴근 시켜주는 회사, 일하는 시간이 짧은 회사는 가장 좋은 직장이 된다.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함께 20, 30대 대학생 및 취준생과 직장인 2201명을 대상으로 ‘2020년 공무원 시험 준비 현황’에 대해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조사결과 ‘올해 공무원 시험을 볼 것’이라는 응답자는 44.4%에 달했다. 설문조사에 응한 대학생들 중 47.5%, 취준생 중 58.7%, 직장인 중 30.3%가 올해 공무원 시험을 볼 것이라고 대답했다. 20,30대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주요 이유는 무엇일까?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공시족들의 핵심 동기는 정년보장과 복지/근무환경, 정시퇴근이었다.
사실상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과반수가 공무원이 되고 싶어한다. 현재의 20, 30대가 겪어온 시대적인 환경과 사회적 시스템의 영향이 지배적이다. 개개인들의 문제라고 본다면 공시생의 비율이 저렇게 높다는 사실을 입증하기가 불가능하다. 당연히 워라밸이라는 용어 하나 때문에 발생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워라밸이라는 용어가 점점 더 확산될수록 청년들은 더 노량진으로 몰리고, 한정된 회사에 지원하게 된다. 이 사실은 꽤나 명백하다. 2019년도 국가공무원 9급 공채시험 경쟁률은 39.2:1이다. 약 20만 명이 지원하고 5천명이 선발된다. 19만 5천명은 불합격되고,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필연적으로 받는 구조다.
공무원에 합격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천만의 말씀이다. 공무원은 기관별로, 부서별로 초과근무시간에 대한 편차가 크다. 어떤 부서는 일이 없어도 초과근무수당을 위해 억지로 일거리를 만들기도 한다. 어떤 부서는 일이 넘쳐서 주말까지 출근해도 계속 일이 쌓이기도 한다.
대기업, 중소기업은 어떨까? 2018년 7월부터 시행된 ‘주 52시간 상한제’가 연일 이슈가 되고 있다. 300인 이상의 대기업들은 2018년부터 적용이 되었고, 50인 이상 300인 미만의 중소기업들은 2020년 1월부터 예정되어있었으나 사실상 연기된 상태에 있다.(2020년 1월 기준)
주 52시간 상한제를 적용한 대기업들이라고 해서 직원들의 삶이 행복해졌을까? 인크루트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취업포털 인쿠르트는 2018년 52시간 근무제가 적용된 이후 직장인 557명을 대상으로 ‘근로시간 단축으로 달라진 점’에 대해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조사 결과, 달라진 점 1위에는 임금감소(18.1%), 2위에는 비공식 야근(12.8%)가 꼽혔다. 자기계발 시간, 여가시간이 늘어남을 체감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여전히 52시간 근무제가 완벽하게 적용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소기업에 취업한 직원들은 더 심각하다. 2018년 잡코리아가 직장인 1,007명을 대상으로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대상자들은 남녀를 통틀어 직장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워라밸이라고 말했지만, 현재 워라밸을 이루고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절반도 안 되는 40.3%에 불과했다. 특히 중소기업 종사자들은 공기업(59.5%), 외국계기업(58.6%), 대기업(44.6%)에 비해 더 낮은 결과(38.1%)를 보였다.
만약 워라밸을 행복의 가장 큰 기준으로 본다면, 자영업자들의 인생은 최악에 가까워진다. 중소기업중앙회는 2018년 5인 미만 소상인 700명을 대상으로 ‘소상인 일과 삶의 균형도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자영업자와 소상인들은 하루 평균 10.9시간을 일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주 5일 근무하는 소상인은 거의 없었다. 평균적으로 한 달에 3일을 쉴 뿐이었다.
우리가 이 자료들을 통해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은 공무원, 대기업, 중소기업, 프리랜서, 자영업자, 전문직 등 어떤 곳에 속해있고, 어떤 일을 하던 간에 워라밸을 추구하는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직장인들 중 워라밸을 이루고 있는 사람은 절반도 안 되는 40.3%에 불과하다.
이쯤에서 이런 질문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워라밸이라는 단어도 쓰지 말아야하고, 워라밸을 이루기도 힘들다면 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이제부터 여기에 대한 답을 해보려고 한다. 워라밸은 기본적으로 일과 삶을 별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일은 단순히 생계를 위해 하는 것이며, 좋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일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워라밸은 일과 인생을 마치 제로섬 게임처럼 인식하게 한다. 저울에 균형을 맞추고 한쪽에 치우치기라도 하면 크게 잘못된 것처럼 말이다. 물론 업무적 성과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가족이나 인간관계에 소홀하다면 좋은 인생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일 자체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거부감을 조장하는 것 또한 절대 좋은 행위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하루 종일 일에 투입하는 시간을 고려한다면, 필연적으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일차원적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괜찮은 대안이 없을까? 제프 베조스는 ‘악셀 슈프링거 2018’ 시상식에서 워라밸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힌 것에 그치지 않았다. 동일한 자리에서 다른 대안까지 내놓았다.
‘워크 앤 라이프 하모니(work and life harmony) 즉, 일과 인생이 조화를 이루어야한다. 이것이 내가 아마존의 젊은 직원뿐 아니라 간부들에게도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다. 특히 신입사원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워크 앤 라이프 하모니(이하 워라하)는 일과 삶을 분리해놓는 개념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일과 삶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 CEO 사티아 나델라 또한 ‘조직 구성원이 내적 동기를 기반으로 일 자체에서 의미를 찾고 몰입하는 사람이라면 일에서 삶을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워라밸과 워라하. 얼핏 보면 말장난 같지만 이 두 가지 단어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존재한다. 어떤 삶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워라밸은 기본적으로 시간을 중요시한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사람은 일하는 시간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직장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일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안 좋은 직장이 된다. 반면에 워라하는 시간보다 일의 가치와 의미에 집중한다. 아래의 질문에 답변하게 만든다. 쉽지 않은 질문들이지만, 정말 중요한 질문들이니 스스로에게 꼭 물어보길 바란다.
- 이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삶에 어떤 가치를 부여해주는가?
예시) 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도록 돕고 싶다. 책을 쓰고 강의를 하는 일은 나의 사명과도 같은 일이다.
- 이 일이 나의 삶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은 무엇인가?
예시)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기 때문에, 책임감을 갖게 된다. 또한 스스로를 계속해서 성장시킨다. 사람들에게 기여하기 때문에 충만함을 느낀다. 그러나 성장과 기여에 대한 집착 때문에 내 스스로의 건강상태와 휴식시간에 대해 방관하는 경우가 많다.
- 이 일과 관련된 어떤 행동을 취해야 나의 삶이 더 성장하고 풍요로워질까?
예시) 장기적으로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건강(수면, 식단, 휴식, 운동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초심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워라밸이 일과 삶을 양쪽으로 분리시켜 시간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면, 워라하는 인생에서 일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일과 삶이 어떤 조화를 만들어내야 하는지 좀 더 근원적이고 생산적인 질문을 하게 한다.
요약정리 : 워라밸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일은 생계를 위해 하는 것일 뿐이다.’ 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당연히 부정적인 인식이다. 우리나라는 시대적 환경으로 인해 공무원 지원자가 엄청나게 치솟은 상태이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워라밸에 대한 욕구가 꼽힌다. 그러나 워라밸을 성취하고 있는 사람들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우리는 워라밸과 같이 시간으로 일과 삶을 양분하지 말고, 워라하를 통해 진짜 일과 삶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제는 시간이 아니라 일의 가치에 집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