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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우 Apr 05. 2021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 이 글은 2020년 8월에 쓴 글입니다.




살다보면 억울할 때가 많습니다.  


나는 미친듯이 노력해왔는데, 나만큼 아둥바둥하면서 살지 않은 사람들이 나보다 더 빨리, 더 높은 곳에 올라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특히 그렇습니다. 아무리 인생이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지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습니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20대 내내 안간힘을 쓰고 살았습니다. 16살에 공군 특성화 고등학교에 들어가, 19살에 공군 부사관이 됐습니다. 고등학교 때 학비를 지원받아 7년간 의무복무를 해야 했습니다. 죽도록 싫었지만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독기에 차있었습니다. 7년 후 군대를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습니다. 뭘 해야할지 몰라 미친듯이 책을 읽었습니다. 


부사관 때는 새벽출근, 야간을 많이 하는 환경이었습니다. 아침 6시에 출근해서 밤 10시에 퇴근해도 책을 읽었습니다. 씻고 책상에 앉아서 새벽 2~3시까지 책을 읽었습니다. 불을 켠상태로 책상에서 엎드려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항상 쓰러지듯 잠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날때마다 전날 몇시에 잠들었는지 기억이 안났습니다. 기절해서 잠들었습니다.


틈틈이 블로그를 하면서 하루 방문자 1000명이 넘을 때까지 키웠습니다. 테니스 코치가 되겠다고 1년 넘는 기간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 레슨을 받았습니다. 부사관에서 장교로 신분전환 하겠다고 야근 후 새벽까지 온라인 강의를 들었습니다. 하루 평균 2~3시간, 많이 자면 4시간인 생활을 5년간 했습니다. 그리고 군생활을 5년 했을 때, 장교가 됐습니다. 


공군 장교로 임관해서도 다시 책을 읽었습니다. 야근도 없고, 새벽출근도 사라졌습니다. 제대를 준비하기에 좋은 환경이 됐습니다. 근무지는 부산이었지만 매주 주말마다 서울로 왔습니다. 마케팅, 세일즈, 비즈니스, 부동산, 재테크, 글쓰기, 책쓰기 등 닥치는데로 교육을 들었습니다. 성공한 사업가에게 찾아가 1000만원을 내고 컨설팅을 받기도 했습니다. 새벽, 점심시간, 퇴근 후, 주말, 휴가 등 모든 남는 시간을 공부하고, 글쓰는 것에 썼습니다. 


1년에 한 권씩 책을 냈습니다. 제대 전까지 총 3권의 책을 냈습니다. 동기부여 강연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대학교, 군부대, 자기계발 커뮤니티 등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돈을 안받고 한적도 있습니다. 강연 기회만 주면 무조건 가서 했습니다. 부산 문화재단에서 지원받아 직접 강연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군생활을 하면서 진행했던 일들입니다. 3년 동안 장교생활을 하면서 휴가를 쓰고 편하게 놀러갔던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 휴가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하루종일 공부하는 날, 책 쓸 수 있는 날' 이었습니다. 


8년 3개월의 군 의무복무를 끝나고 제대했습니다. 부산에서 서울을 왔다갔다 하고, 고가의 교육들을 듣느라 돈을 많이 썼습니다. 저와 똑같이 군생활을 시작했던 고등학교 동기들은 1억 넘게 돈을 모으기도 하고, 누군가는 집을 샀다는 소문도 들려왔습니다. 똑같은 기간동안 군생활을 했지만 제 상황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퇴직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제 통장에는 마이너스(-) 3천만원이 찍혀 있었습니다. 군인은 공무원이기 때문에 마이너스통장 한도를 잘 내줍니다. 저는 제대 전에 오천만원 한도의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었습니다. 


제대 후,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영어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영어와는 담을 쌓고 살았기 때문에, 최단기간에 최대한의 효과를 내고 싶었습니다. 강남에 있는 박코치어학원에 등록했습니다. 국내 어학연수반 6개월 과정에 880만원을 내고 신청했습니다. 많은 후기를 찾아보고 결제했습니다. 마이너스 4000만원이 되었지만 뿌듯했습니다. 


6개월간 온전히 영어에만 몰입했습니다. 새벽부터 학원에 나갔습니다. 아침 8시부터 수업이였지만 7시까지 학원에 갔습니다. 아침 1시간 동안 예습, 복습를 하고 수업을 들었습니다. 저녁 7시에 모든 수업이 끝나면 10시까지 자습을 했습니다. 10시에는 학원 문이 닫기 때문에, 이후에는 집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주말에도 학원에 가서 자습을 했습니다. 6개월 동안 영어에 미쳐 살았습니다.


영어학원 6개월 과정 중 마지막 달, 조금이라도 영어 쓰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외국인이 주로 찾는 게스트하우스 주말 알바를 시작했습니다. 평일에는 학원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주말에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외국인 손님과 대화를 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게스트하우스 면접은 영어 인터뷰로 진행됐습니다. 5개월 간의 노력이 빛을 발했습니다. 합격했습니다. 


게스트하우스 영어 인터뷰에 합격하면서, 영어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이번에는 국외여행인솔자(TC)라는 직업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유럽에는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유럽여행 인솔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잡코리아에서 유럽여행인솔자를 뽑는다는 문구를 보고 무작정 서류를 넣었습니다. 여행사 5~6군데 서류를 넣었습니다. 처음 2주 동안 아무 곳에서도 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유럽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을 유럽여행인솔자로 뽑는다는 게 말이 안되긴 했습니다. 포기하려는 찰나, '스위트유로'라는 2030 유럽 여행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최대한 빨리 면접 일자를 잡았습니다. 학원을 하루 빠지고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6개월 중 하루도 빠지지 않았던 학원을 그 때 처음 빠졌습니다. 면접자리에는 대표님 한명, 실무자 한명이 왔습니다. 처음에는 한국어로 인터뷰를 하고, 이후에는 실무자와 영어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영어 인터뷰는 오히려 문제가 없었으나 다른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유럽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것과, 수동 운전을 해본적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유럽에서 차량을 렌트해서 손님들을 데리고 다녀야 하는데, 유럽은 수동 렌트차가 대부분입니다. 면접때 강하게 어필을 했습니다. 


"유럽에 가본적은 없지만, 저의 장점은 새로운 것을 빨리 배우는 능력입니다. 군생활을 하면서도 책을 냈고, 영어 한마디도 못했지만 6개월동안 치열하게 공부해서 지금은 의사소통이 됩니다. 운전을 아예 못하는 것도 아니고 오토는 할 줄 압니다. 운전 센스는 있습니다. 유럽 가기 전까지 사비로라도 수동 운전을 배워놓겠습니다. 1종 자격증은 있습니다. 유럽에 대한 사전조사도 미리 다 끝내놓겠습니다. 답사 며칠만 갔다오면 인솔하는데 전혀 문제없게 하겠습니다."


저의 의지가 강해보였는지 결국 최종합격 통보가 왔습니다. 최종합격 통보가 오자마자 10일 후 유럽에 가야한다는 메시지가 왔습니다. 떠날 채비를 하라고 말입니다. 바로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1종 면허는 있었지만, 수동에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일주일동안 매일 같이 운전연습을 했습니다. 유럽 가기 전 조금은 익숙해졌습니다.


12월 11일, 체코 프라하에 도착했습니다. 모든게 낯설었습니다. 해외가 처음은 아니지만 유럽은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렌트카를 빌리러 갔는데, 영어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영어는 영어인데 체코식 영어는 처음 듣다보니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Sorry"를 연발하며 들릴 때까지 물어봤습니다. 결국 9인승 벤을 성공적으로 빌렸습니다. 한국에서 트럭으로 수동운전을 연습하긴 했지만, 새로운 차는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시동을 계속 꺼뜨렸고, 차가 커서 운전하기 어려웠습니다. 유럽의 길에서 운전하는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하루 8~10시간씩 운전을 하다보니 차츰 익숙해졌습니다. 손님을 데리고 인솔할 여행지를 미리 답사하면서 운전을 계속 했습니다. 주로 손님들을 인솔했던 국가는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였습니다. 전부 다 처음 가보는 나라였기 때문에 길을 외우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외워질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걸어다녔습니다. 정해진 시간상 10일 인솔 코스를 3일만에 돌아야 했습니다. 운전하는 내내 잠이 쏟아졌지만, 수면껌을 입에 들이부으면서 버텼습니다. 


손님들에게 폐를 끼치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길을 외웠습니다. 잘 안 외워지는 길은 하루에 5번도 갔습니다. 책과 인터넷을 통해 세계사, 관광지 역사를 공부했습니다. 공부한 내용은 블로그에 정리했습니다. 유럽에서도 시간이 날때마다 공부한 내용을 글로 정리했습니다. 그렇게 정리한 내용들을 손님들에게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유럽여행인솔자 생활을 한 것은 대략 9개월입니다. 2018년 말부터 2019년 8월까지 했습니다. 9개월 동안 약 200명 정도의 손님들을 만났습니다. 모두 큰 사고 없이 여행을 마쳤습니다. 즐겁게 여행을 마친 손님들이 스위트유로 카페에 좋은 후기를 올려주기도 했습니다. 손님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여행사 대표는 제가 일하는 모습을 보시고, 좋은 제안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체코에 법인을 세우려고 하는데 체코에서 살면서 법인장을 하는 것은 어떻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제 꿈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세계적인 강연가가 되는 것입니다. 저의 모든 의사결정 기준은 '세계적인 강연가가 되는 것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입니다. 유럽에 사는 것은 '세계적인 강연가'가 되는 것에 좋은 조건으로 여겨졌습니다.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이후 체코에 갈때마다 현지 법인 설립에 대한 절차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회사의 상황이 안좋아졌습니다. 많은 경쟁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는 체코 법인 설립을 미루기로 결정했습니다. 더 이상 계획대로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이 시기에 맞물려 한국에 여자친구가 생겼습니다. 유럽에 손님으로 왔었던 사람과 인연이 되어 사귀게 됐습니다. 유럽에 사는 계획도 틀어지고, 한국에 여자친구도 생기고, 유럽 여행도 실컷 했으니 더 이상 미련이 없었습니다. 여행일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들어오기로 결심했습니다. 


한국에 들어왔을 때, 통장에는 여전히 4천만원의 빚이 있었습니다. 유럽여행인솔자를 하면서 돈을 벌긴 했지만 급여 자체도 적었을 뿐더러 나가는 비용이 많았습니다. 호텔에 숙박하는데 보통 호텔에는 요리를 해먹을 수 있는 시설이 없습니다. 모든 식사를 밖에서 사먹어야 했는데, 유럽의 식비는 꽤 비쌌습니다.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마이너스 통장 기한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4천만원을 벌어야 했습니다. 닥치는대로 강연을 나갔습니다. 강연료도 적은 돈은 아니었습니다. 빚만 없었다면 생활하기에 충분했겠지만, 생활비 + 4천만원을 갚기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만 해도 사업적인 머리는 없었습니다. 영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왕 팔바엔 제일 비싼 것을 팔아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동산, 그 중에서도 빌딩을 팔자'라는 생각에 빌딩매매전문 중개법인에 들어갔습니다. 중개법인은 영업조직이기 때문에 항상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수습기간 3개월간 기본급 70만원을 준다고 했습니다. 기본급은 제 상황에서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빌딩을 팔아 수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처음 수습기간에 해야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흔히 업계에서 '매물작업'이라고 불리는데, 건물주의 개인연락처를 따오는 것입니다. 개인연락처는 개인 정보인데 어떻게 따냐고 했더니 여러 방법들을 알려주었습니다. 공무원 사칭은 기본, 전부 다 불법에 해당되는 방법들이었습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상황에서 불법이든 아니든 상관없었습니다. 제 주변에는 100명에 가까운 빌딩 컨설턴트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불법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업계에서는 그게 당연했습니다. 저 또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습니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말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공무원을 사칭하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면서 일했습니다. 


이처럼 시키는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하면서도, 아무도 안 시키는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낮에는 하루종일 건물주들을 만나러 돌아다니고 답사를 다녔지만, 퇴근 이후에는 빌딩, 부동산, 경제 관련 책을 닥치는대로 읽었습니다. 더 이상 불법으로 일하기 싫었고, 진짜 전문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3개월 후, 수습 종료와 함께 퇴사했습니다. 이런식으로 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서는 또 그만두냐고 했지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수습 3개월 동안 공부하고 정리한 내용을 토대로 빌딩투자 책을 출간 계약했습니다. 


2019년 까지 상황은 이랬습니다. 


만기가 다 되가는 마이너스 4천만원 통장, 직장없음, 책 3권 낸 작가, 1권 출간계약. 


은행에 가보니 마이너스 통장은 연장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고심 끝에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전까지 한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여태까지 배웠던 지식으로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막상 사업 프로세스를 구상해보니, 딱 하나가 부족했습니다. 네이버 카페 마케팅을 배워야 했습니다. 600만원을 내고 네이버 카페 마케팅 교육을 들었습니다.  


약 9년간 공부하고 쌓아온 모든 경험을 기반으로, 컨설팅/교육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빌딩중개 마케팅대행, 동기부여강연 등... (사업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운이 좋았습니다.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 3개월만에 빚을 다 갚았습니다. 


빚을 다 갚자마자 동기부여강연 이외의 모든 수입원을 자체적으로 끊었습니다.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고, 이런 방식으로는 '세계적인 강연가'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어떻게 하면 '세계적인 강연가'가 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2019년 말에 '동기부연구소'를 시작했습니다. 세계 최고가 되려면 저 혼자의 힘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와 같은 길을 갈 사람들과 합심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동기부여 강연가가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기에, '동기부여전문가양성교육'을 진행했습니다. 힘들더라도 단체교육이 아닌 1:1로 했습니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동기부여 전문가들을 키워서 같이 나아갈 목적이었습니다. 


교육을 하면서 한명한명 상황에 맞는 피드백을 주기위해 치열하게 연구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수년간 공부하고 쌓아왔던 경험들을 단기간에 전달해 줄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모든 수강생들을 진심으로 대했습니다. 그 결과 수강생들 중 90% 이상이 흔쾌히 좋은 후기를 써주었습니다. 


2020년이 되고, 본격적으로 외부강연을 나가기 위해 새로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점에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강연시장에 피바람이 몰아쳤습니다. 국내 1위 스타강사인 김미경 강사도 모든 강의가 끊겼습니다. 저 또한 다 끊겼습니다. 강의로 벌던 1~2천만원 매출이 코로나로 하루아침에 날라갔습니다. 이제서야 조금 자리를 잡나 했는데 말입니다. 


제 스스로가 동기부여 강연을 못하는 상황이 됐는데, 더이상 동기부여전문가양성교육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강의를 듣겠다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지금은 제가 강연을 못나가고 있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교육을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몇달간 모아놨던 돈을 교육비로 또 지출했습니다. 코로나 이후 언택트 시대에 대비할 수 있는 지식들을 빠르게 습득해야 했습니다. 교육이란 교육은 닥치는대로 들었습니다. 코로나 관련된 책은 죄다 읽었습니다. 통장은 다시 0원이 됐습니다. 마이너스가 아닌 것에 위안을 얻었습니다. 역치가 높아졌음을 체감했습니다.


이 상황이 2020년 3월이었습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고, 네이버 비즈니스판(인터비즈)에 입사했습니다. 코로나 이후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뉴미디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일반인이 한달동안 배울 내용을 일주일만에 습득하는 환경을 만드는데 집중했습니다. 이후에도 계속 공부하고, 정리하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갑자기 제 인생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풀어놓은 이유는, 오늘 아침 아버지가 한 말씀 때문입니다.


"너가 열심히 하는건 인정하는데, 결국 돈은 하나도 못 모았잖아? 군대에 있는 동기들보다 나은게 뭐야. 책을 그렇게 많이 읽으면 뭐해 돈도 못버는데. 책장에 쌓여있는 책들 장식품이잖아 결국 "


그 말을 듣고 너무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느껴져서, 순간 울컥했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사랑해서 그런 말을 하신다는 것도 알고, 부드러운 표현에 서투신 것도 압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인생에서는 돈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된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제가 여태까지 공부하고 경험해온 것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 인생이 길다는 것도 압니다. 앞으로 저의 인생이 더 찬란하게 빛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편하고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삶보다, 힘들고 의미있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때문에 10년간 미친듯이 열심히 살았습니다. 제 자신에게 떳떳할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군생활하면서 퇴근하고 술 한잔, 운동도 하고, 적당히 자기계발도 하면서 안정적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동기들을 보면서 많이 부러웠습니다. 사실 지금도 가끔 부럽습니다. 그들이 10년간 모은 돈보다, 적당히 현재에 만족하면서 살 수 있는 삶의 태도가 미치도록 부럽습니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휘감을 때마다, 아래의 단어를 생각합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에는 오직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


이 단어 또한 저희 아버지가 즐겨 쓰시는 단어인데, 마음을 다잡을 때마다 도움이 됩니다. 


어쩌겠습니까.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내 스스로 떳떳할 정도로 최선을 다했는데. 나머지는 하늘에 뜻에 맡기면 됩니다. 물론 나보다 덜 노력한 사람이 더 잘되는 걸 보면 배가 아프고 속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근데 어쩔 수 없습니다. 인생이 원래 그렇습니다. 


그냥 내 갈 길 가면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저도 가끔은 '진짜 신이 있긴 한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정도로 운이 안 받쳐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또 합니다. 운이 올 때까지. 하늘이 날 봐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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