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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우 Aug 08. 2021

모텔 청소부는 어떻게 '8조' 재벌이 되었나

모텔 청소부에서 유니콘 사업가로


이수진 대표/야놀자


1.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

이수진 야놀자 대표의 어린 시절은 평탄치 않았다. 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6살 때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집을 나갔다. 그렇게 그는 소작농인 할머니 밑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바쁜 할머니 밑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초등학교 5학년 전까지는 한글도 체 떼지 못했다.

6학년 때부터는 신문배달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때 다행히 같이 일하는 대학생 형이 무료로 과외를 해줘서 공부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할머니가 중 1 때 위암으로 운명을 달리하고 이수진 대표는 작은 아버지 집에 들어가 농사일과 알바를 병행했다. 공고에 진학한 이 대표는 졸업 후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전문대생과의 급여 차이를 느끼고 대학을 준비해 등록금 70만 원의 천안공전에 들어갔다.
 


2.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

대학을 가고 나서도 이수진 대표를 따라오던 가난은 끝까지 그의 뒤를 쫓았다. 대학에서 장학금은 받았지만 학비를 해결할 수 없어 방학에는 막노동을 하며 등록금을 마련했다. 이 대표는 이때 계속되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란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병역 특례로 설계 업체에 가서 일을 시작했다. 열심히 일해 60만원이던 월급을 180만 가까이 인상 시키고, 생활비 10만원으로 살며 돈을 모았다.   

가난으로 많은 걸 포기했던 유년 시절 때문인지 그는 빨리 부자가 되고 싶단 욕망이 강했다. 때로는 아버지와 할머니의 죽음, 어머니의 재혼 등 어린 시절의 결핍을 가난에서 발견하기도 했다.
 
돈을 벌고 싶다는 욕심에 그는 IMF 이후 주식을 시작했고, 6개월 만에 2천만 원을 날렸다. 주식 학원까지 등록하며 열심을 보였지만 남은 돈마저 잃고 말았다.
 

3. 숙박업소와의 인연, 모텔 청소로 시작하다
 
그 후 이 대표는 숙식이 제공되는 일을 찾다 모텔 청소 일을 하게 됐다. 그는 고된 노동이 참 힘들었다 회상한다. 하지만 업계에서 유명한 사장 밑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객실 점검 때 한 손에는 마른 수건, 한 손에는 물수건을 들고 돌아다니며 방의 물기와 얼룩을 제거하는 등 시스템화 된 서비스를 배울 수 있었다.



  
4. 갑자기 샐러드 가게 창업?

모텔 일로 돈을 모아 이 대표는 샐러드 가게를 창업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샐러드 시장은 턱없이 작았다. 게다가 식재료에 대한 이해도도 부족했던 그는 샐러드 사업으로 돈을 잃고 다시 큰 좌절감에 빠졌다.

아끼며 살아왔지만 주식도 사업도 실패한 그의 생각은 안 좋은 결말까지 닿곤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좌절에만 빠져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다시 설계 일을 할지 모텔 일을 할 지의 기로에 섰다.
   
 
5. 돌아온 모텔에서 시작한 사업
 
이 대표는 숙식이 제공되며 급여가 높은 모텔 일을 다시 시작했다. 2년 정도 일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리고 다시금 사업에 도전장을 내밀게 된다.

그는 2004년 숙박업 종사자들을 위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 카페인 ‘모텔 이야기’를 열었다. 모텔 종업원으로 일하면 느낀 점과 에피소드, 개선점 등을 정리해 글을 올렸다. 입소문이 나면서 카페 개설 1년 만에 가입자 1만 명을 넘겼다.

그러던 중 2005년 ‘모텔투어’라는 모텔 소개 카페를 운영하던 운영자가 그에게 인수를 제안했다.



6. 고객이 원하는 걸 듣다
 
그가 사이트를 활성화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고객이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어디 모텔이 좋냐, 어느 모텔 가격이 저렴하느냐 등 고객들이 원하는 질문에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이 대표는 빠르게 좋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텔들이 영세해 큰돈은 만질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대표는 전공을 살려 몇 년 만에 금형 설계에 도전했다. 당시 충전기가 없는 모텔들이 많아 아이디어를 냈다.

거기에 배너광고를 끼워 영업을 다녔다. 하지만 첫 광고를 따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매출이 오르지 않으면 다시 돈을 돌려주겠다는 조건으로 1년 만에 첫 광고 수익 100만 원을 얻게 됐다.

그는 모든 역량을 다해서 그 모텔을 광고했고, 모텔 매출은 3달 만에 40% 가까이 올랐다. 그렇게 업계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나면서 광고가 물 밀 듯이 들어왔다. 2006년도의 일이다. 컨설팅까지 하게 된 그는 상권과 트렌드를 읽게 되고 모텔 위탁 운영까지 맡게 됐다.
   
 
7. 위기를 기회로 삼다
 
하지만 그는 사내 정치로 인해 직원 13명 중에 10명을 잃고 만다. 거의 전 직원이 경쟁사로 이직해 많은 정보를 빼앗겼다.

당시 사용하던 모텔투어의 약자인 ‘모투’라는 상표까지 빼앗겼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모투를 포기하고 새로운 브랜드인 ‘야놀자’를 설립했다. 이 대표는 브랜드도 바뀌었으니 더 이상 모텔로만 승부하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이수진 대표는 모텔을 숙박업소이기 전에 데이트 장소라 생각하고, 연인들에게 필요한 데이트 코스를 개발하는 쪽으로 사업영역을 늘렸다.

데이트 콘텐츠를 개발하고 보니 모텔 정보 페이지뷰보다 훨씬 조회수가 잘 나왔다. 그렇게 영역을 넓혀식당과 스튜디오 등과도 제휴에 들어갔다. 야놀자 숙박 프랜차이즈 사업의 초석이 다져지는 순간이었다.



▼ 영상으로 확인하기 ▼ 

https://www.youtube.com/watch?v=kHENIikVpHM






출처: 야놀자






8. 야놀자 모바일에 들어가다
 
초창기 야놀자는 ‘호텔모텔펜션’이라는 숙박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PC용 온라인 사이트였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이수진 대표는 2000만 원으로 외주를 맡겨 모텔 정보를 볼 수 있는 앱을 개발했다. 소비자들의 반응은 좋았다. 소비자들이 호응하는 것을 확인한 그는 큰 기회가 올 것이라 예측했다.

이후 쿠폰은 물론 숙박, 대실, 예약 결제 시스템을 도입해 고객들이 편하게 숙박업소를 이용할 수 있게 서비스를 확장시켜갔다. 몰카 걱정이 없는 ‘마이룸’, 내부 비품 공개 등의 디테일도 더했다.









출처: 야놀자







9. 모텔의 인식을 바꿔가다
 
이수진 대표는 고객들이 모텔에서 느끼는 불편함과 찝찝함을 없애기 위해 더 좋은 공간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통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숙박업소가 긍정적인 이미지를 덧 입는다면 성장폭은 더욱 커질 것이라 예측한 것. 이 대표는 좋은숙박연구소를 만들고 좋은 숙박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모텔을 ‘코텔’, 코리아형 호텔의 약자로 부르며 네온사인, 캐노피, 성인방송 등을 없앴다. 그리고 오픈형 프런트와 조식 서비스, 세탁실, 다이닝룸 등을 추가했다. 일부 코텔은 더 편안함을 주기 위해 가구 디자이너와 콜라보 해서 오픈했고,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수진 대표는 숙박업에 대한 인식 자체를 서서히 바꿔 가고 있었다.









출처: 야놀자






10. 코로나에도 위기는 없다
 
지난해 야놀자는 코로나19 국면에도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2020년 연결기준 매출 2888억 원, 영업이익 109억원을 기록했다. 코로나로 여행산업이 축소된 가운데에서도 발 빠른 디지털 전환과 클라우드 솔루션 확장에 집중한 것이 실적을 올렸다.
 
또한 7월에는 2조 원의 투자 유치를 성공하고 야놀자는 단순 숙박 중개 앱에서 통합 여행 서비스를 판매하는 ‘슈퍼 앱’으로 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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